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15:11)표준새번역

절기에 같힌 예수,그리고 복음과 부활

올해도 어김없이 모든 교회는 사순절을 기념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정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때로는 금식을 강조할것이고 특별 새벽기도에 동참하자고 강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절기를 지키고 행하는것이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신앙이며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만일 이러한 교회의 절기에 대하여 다른말을 한다면 틀림없이 이단시할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아마도 분개하며 교회를 어지럽힌다고 할것입니다.

말씀을 들어가기 전에 한가지 질문을 해볼까요?

우리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 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절대적인 기준이 무엇일까요? 당연하게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생전에 오늘날과 같은 많은 절기들을 지키라고 하신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있다면 어디 어느구절에 강조하셨는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정말로 교회력에 따라서 성서일과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한다고 명시한 곳이 있습니까? 또는 모든 지상교회(건물및 예배당, 예배모임)에서 그러한 교회 전통들을 반드시 지켜야할 것을 가르친 곳이 있습니까?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22: 14-20)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여 오실 때까지 유일하게 기념하라고 명하신 성찬식입니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오늘날 얼마나 많은 의식들과 절기들이 강요아닌 강요로 수천년간을 지배해 왔는지 알수 있습니다. 저는 신학자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닙니다만 이러한 예전 형식들이 과거 구교(로마 천주교=교황,사제들에 의하여 말씀이 보여지는 미사로 대치한것)의 산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상징인 루터와 요한 칼빈은 바로 이러한 로마교회를 거부하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표지를 말씀과 성찬으로 확정하였고 이것으로 로마교회와 다르다는것을 천명했습니다.

그런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오늘날 개신교회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아 보십시오. 어느덧 현대교회는 이미 로마교회의 형식과 의식주의를 그대로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 한 예가 바로 교회력에 따른 절기예배를 지금까지 안고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만약 사도 바울이 보았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옷을 찢고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뜯어말릴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바울사도의 성격 알지요? 얼마나 열정적이며 직설적인지를요.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고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행14: 11-18)

오늘날의 교회는 과거 유대교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과 사도들이 유대인들에게 배척을 당하거나 고소를 당한 이유가 그들의 조상의 유전과 전통을 범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범했고 손을 씻지 않아서 유전을 범했고 성전을 신성시하는것을 반대하는것 때문에 그렇게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과 제사장을 통해 행하는 절기들을 지키지 않는것은 이단이며 범죄한자며 율법에 의하여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죄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안식일은 더이상 구속력이 없어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단번에 제물이 되셔서 완성하셨고 휘장을 찢어 버리시고 자기 피를 의지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도 산 길을 뻥 하고 뚫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집사가 공회에서 전도설교를 할 때 과거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유전과 잘못을 실랄하게 꼬집고 오직 성전에 임재하신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물이나 신전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저들이 이를갈며 돌을 들어서 죽인것입니다. 그때 회심하기전의 사울이라는 청년(바울)도 함께 있다가 마땅히 죽을자라고 인정하며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의 벗은 옷을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은게 아니라 성전건물을 신성시하고 우상처럼 믿은것이기 때문에 그토록 사도들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미워한 것입니다.오늘날 믿노라하는 현대교회도 이러한 우상주의에서 결코 자유로울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수 없이 많은 절기들과 형식들과 십일조와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박박 우기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단지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를 지고가는 삶에서 멈추게 된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능력이 실종되는 것입니다. 고상하게 인간적으로 낮아지고 비우고 희생하는 삶으로서의 십자가를 묵상한다면 여타의 종교와 다를게 없습니다. 타종교를 비하하거나 폄하하려는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란 인간적이고 자비를 베풀고 도덕적이어야 하며 윤리적인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전통적인 인간의 고급한 수준을 행하라고 십자가를 지시며 고난을 당하시고 멸시를 받으심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성경을 믿는다면 분명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죄를 대신지시고 형벌을 대신 담당하심 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주님께서 대신 마심입니다. 그럼으로 그를 믿는자들을 심판에서 건지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끄집어 내신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이 어디에서 절정을 이룰까요? 바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부활하신 주님입니다. 사도들의 능력은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걷지 못하던 장애인을 고친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라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거기에 베드로 사도가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고 고난을 묵상하고 그러한 경건과 행위가 있는지요?

다시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들어 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과 주님과의 연합과 친밀함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성도=신부)와 그리스도와의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운 관계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세상이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으며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핍박을 할것을 예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하나님을 세상이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비유의 중요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지금 기독교가 세상으로 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욕을 먹고 비난을 당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직시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이 당한 고난과 핍박이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 이름을 믿는다는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을 주여 주여 하고 부르고 믿은것 때문에 핍박을 당한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모든 가치와 순종이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에 기반했기에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겉으로 믿음이 있노라 하던 신자들이 고난 당하고 욕을 먹는것이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와 같은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불의하고 부도덕적이며 욕심에 양심을 팔았기 때문에 욕을 먹는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가 왜 비난을 당합니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서 그런것일까요? 만일 그렇게 주님의 계명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기뻐할 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참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분별한 교회 확장과 선교라는 명분으로 포장한 영역확장에 따른 것으로 욕을 먹는다면 자성을 해야지요. 그것을 애둘러서 복음때문에 핍빅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솔직해질 때가 되지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면에서 볼때 이제는 교회의 절기에서 해방이 될때가 왔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에 의하여 계속 되풀이 되는 이러한 관행들이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신학자들은 각성해야 합니다. 자칭 교회 원로들은 정직하게 교회와 성도들앞에서 진실을 고해야 합니다.
저는 정말 무식해서 아는게 없습니다만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감히 말씀 드립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사도는 기쁨의 사도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자기의 생명도 귀하게 생각하지 않고 달려갈 길을 달려간 사도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성도들에게 도전하였습니다. 만일 감옥에 있을 때 그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묵상하였다면 기뻐하라고 말하였을까요? 물론 바울의 트래이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본 주님의 십자가는 단지 주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그것에 동참하는 식의 경건 행위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넘어서서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부활을 위한 시작이며 출발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만일 십자가가 끝이라면 주님은 무덤에서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의 권세가 주님을 잡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시고 승리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만을 묵상하며 괴로워 해야 합니까?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일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부활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하여 주셨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사순절이 왠말입니까? 그것은 로마 교회의 전례이며 관습이며 특징입니다. 개혁주의는 그러한 미신적인 숭배행위에서 구별되고자 나온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온 교회는 그러한 것을 단지 교회사의 전통이라는 것으로 복음의 빛을 감추고자 하는 것입니까? 사도들이 그들의 삶에서 그런 절기를 지켰고 가르쳤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미사나 교회력에 따른 것을 보면 성도들의 마음을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기에 급급한 것입니다. 복음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는것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지요?

일년 내내 그러한 절기지키느라 평생 복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다가 교회전통 사수하다가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십자가를 지는 삶이란 주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온전하게 지켜 행할 때 필연적으로 부닥치는 현실세계와의 가치와 문화와 권세자들에게 당하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말씀을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질병이나 고난을 참고 따라오라는 것으로 좁혀서는 곤란합니다.

예수 믿는사람은 이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새 언약으로 초청을 받았고 새 언약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뀐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지만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의 법과 가치와 문화와 풍속에 머물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이 여기가 아니라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1-2)

초대교회 공동체는 날마다 집에서 모여 떡을 때며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들인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떡을 때며 순전함으로 하나가 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슬퍼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슬퍼할 것은 아직 복음안에 들어 오지 못한 영혼들을 위하여 슬퍼해야 하며 복음안에서 완전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함을 애통해야 하며 연약한 육신때문에 죄를 끊지 못한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연약한 지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함께  죄와 허물을 이용하는 사단과 악한영들에 대하여 싸울수 있도록 기도하며 동참하는 것입니다.

모두들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 하느라 야단입니다. 그것 자체를 무시하거나 폄하하는것이 아닙니다. 과연 이 시점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성도들의 의무화 되고 제도화된 이러한 절기에 무조건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유물론적인 제도와 전통적인 것이 경건한 신앙이며 참다운 믿음일까를 고민해 봅니다.

신앙은 강요되서도 안되고 강요 당해서도 안됩니다. 저는 다른사람들의 신앙을 뜯어 고치거나 이것이 옳으니까 바꿔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 무조건 옳고 다른사람은  다 틀렸다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비춰질 수 있는것은 사실입니다만 그저 이러한 생각도 있다는것을 나누고자할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들 누가 듣기나 하겠습니까만은 그저 누군가에게는 혹시라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힘이 들겠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절기와 의식에서 자유롭기를 원합니다. 죽은 전통과 죽은 신앙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의 말씀안에 거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가운데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 복음의 자유함을 누리는것이 주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절기여 안녕!

2009/01/03.ⓒ 주사랑.

관련 URL: http://cafe.naver.com/pray153/1020

조재춘

2009.01.12 08:43:47
*.29.165.137

아멘! 아멘! 아멘!
너무나 정확한 복음 선포인것 같습니다.
구원의 절정은 부활인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었으며 더 좋은 부활의 소망으로 살았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복음)은...
성경대로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내 마음에 모시는(영접)것 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가 내 맘대로 내가 주인되어서 살던 이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1:15)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아니함이요 (요16: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9)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17)

죄사함, 천국과 지옥, 천사와 마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볼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12:39)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행17:30~31) 아멘!!

주안에서 늘 영육간에 강건하십시요 .. 샬롬^^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15:14)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전15:17)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8:32) 아멘!

주사랑

2009.01.15 22:02:27
*.7.13.27

샬롬~ 반갑습니다 ^^
오랫만이죠~
제가 잡다하게 올린글 보다는 조재춘 형제님의 간결한 글이 더 확실하네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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