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은사와 성령의 은사는 같은것일까요?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첫 머리글의 시작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질문형식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제가 워낙 배움이 없어서 감히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풀어줄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언젠가 방언을 사모하는 어떤 형제분의 질문을(댓글로) 접하고서 나름대로 신경써서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우수운것은 솔직하게 저는 방언을 하지 못할 뿐더러 방언의 경험도 없고 그렇게 간절하게 소원하지도 않는사람이었기에 사실 그 형제분이 모르고 저에게 질문을 한것이지요^^;

일단 편안하게 글을 진행하겠습니다 ^^
비록 전문성에서는 한참 모자라지만 그저 웃고 요런글도 있구나 정도로 생각하시고
편하게 힘을 빼시고 읽어주세요^^

저기..눈을 부릅뜨고서 노려보시는 분들...무서워요 ^^

왜 이렇게 엄살을 피우는가 하면 방언에 대한 논쟁은 언제나 어디서나 식을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제 졸고를 몇군데 싸이트에 올려서 나눴는데 불행하게도 시끄러웠거든요.
무수히 이어지는 댓글들과 답글들과 각자의 경험들이 나눠졌습니다.
저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놀랐었고
일일히 댓글들을 추적하면서 많은 유익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크게 두가지 반응으로 나눠지는것을 보았습니다.

한쪽은 방언의 은사는 신약시대에 와서(오늘날)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들이었고
한쪽은 여전히 왕성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해서 불붙는 논쟁들을 주욱 지켜보면서 어찌되었든간에 저때문에 촉발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기에 원인제공자로서 한마디라도 변명을 해야할까 궁리를 하였습니다만....제가 실력이 달려놔서 고민만 죽어라 했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성경에서 전하는 말씀을 통해서만 여러가지 논쟁들이 검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에는 동의 하시리라 생각하고요^^
그가운데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도들의 전한 서신서를 근거로 해서 적용해야 하는것이
당연하겠지요^^ 아마도 방언에 대하여 적극적인 분들도 아니면 다른 이견을 주장하시는 분들도 동일하게 근거로 삼는 성경이 바로 오늘의 본문일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제 14장  짜잔~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고전14:1) 표준새번역.

여기서의 핵심은 예언하기를 열망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구하고 신령한 은사를 구하라는 바울의 권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것들 가운데 특별하게
무엇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예언을 강조합니다. 구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그것보다 더 미치도록
구해야 하는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언" 하기를 열망하라는 것입니다.

예언은 은사가운데 가장 특별한 은사이며 성도의 보편적인 은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성도에게는 누구든지 예언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자녀라면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은 곧 말씀이며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신 말씀이며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고 증거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곧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믿음도 구원도 회개도 성령도 바로 이 말씀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는것은 곧 말씀을 믿는것이고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과 오늘 우리들에게 힘 주어서 강조하기를 예언을 사모하라하며 더 나아가서 갈망하라고까지 합니다.

다윗은 이르기를 그의 시편 일편에서 복있는 자가 누구냐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밤 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생명의 양식인 말씀, 즉 예언하기를...말씀을 먹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을 알기를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제일 긴 책이 119편 입니다. 시편 19편을 볼수 있다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을 갈망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서 울부짖으며, 주의 말씀 묵상하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웁니다.(시119:147-148)표준새번역.

이 구절을 자꾸만 새벽기도합시다라고 강조하는데 기도자체의 의미보다는 다윗이 말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것을 간과하는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119편은 전체가 말씀을 사모하고 갈망한 다윗의 고백이며 찬송이며 기도입니다. 물론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불가한 것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강조하는 이유는 성도의 삶의 기준과 은혜가 무엇인가할 때 이거다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특별한 성령의 은혜와 간섭하심속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그렇다고 누구 누구에게만 적용될까요?
말하자면 은사를 받았다는 어떤 특별한 자들에게만 나타나는 것이며 가능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주의 종에게만 기름부은 받은 종에게만 이라는 식으로 어떤 성직자에 한하여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구원얻은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가장 원하고 소원하는것이 어떤것입니까?

능력입니까?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는 성령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인데, 덕을 세우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자기에게만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사람은 교회에 덕을 세웁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방언으로 말할 수 있기를 바라지마는, 그보다도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방언을 통역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게 해주지 못하면,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예언하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다.(고전14:2-5)표준새번역.

방언과 예언하는 것에 대하여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언을 금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알아듣지 못하기에 권장하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예언은 성도와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기 위하여 권장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지금 차별하는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느것이 옳습니까?

그러나 방언을 경험하거나 실제로 방언때문에 큰 유익을 얻고 개인적으로 은혜를 맛본 분들 입장에서는 방언하는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주장에 대하여 거부감과 함께 불쾌감마져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언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당신이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실 방언에 대한 무수한 간증들이 나옵니다.

방언을 맛본 사람의 마음이야 그것처럼 귀하고 은혜로운 것도 없다 생각하실 것입니다.
저는 비록 그러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알지는 못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말씀을 통해서 얻는 은혜와 감동역시 방언으로 경험하신 분들보다 못하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알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들은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조심스러운 것은 과연 지금의 방언이 성령의 감동하심과 주권적인 역사이며 은사가 맞는가라고 볼 때 냉정하게 말해서 그렇게 확신 할수 없다는 점입니다.

오해없으시기를 부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방언의 부정적인 현상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의 은혜가운데 주어지고 경험한 것들을 폄하하거나 거짓이다라고 몰아부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피혜사례를 예로 들어 볼 때의 무분별한 은사주의자들과 및 방언 운동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그렇게 보았을때 지금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서 권고하는 바울사도의 편지는 매우 중요하고

오늘날도 변함없이 적용되어져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입장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분명 방언을 경험하고 신앙의 유익함을 얻고 간증하시는 분들이 사실이지만
바울사도의 권고에 그러함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대하거나 금하거나 폐하여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방언의 유익은 자신의 신앙의 유익이며 예언의 유익과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시라는 뜻입니다.

바울사도의 권고는 그것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와 성도들의 덕을 세우기 위한것이며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최종적인 권세는 말씀입니다.

방언하는것을 억재하거나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라고 오해할 수 있는 부분이 오늘날
여전히 교회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든다면
바울이 연약한 자들과 믿음이 흔들릴만한 어린 신자들을 위하여서 비록 믿음으로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함이 있지만 실족할 것을 걱정하기에 차라리 안먹겠다고 한것과 같습니다.
그런면에서 볼때 지금도 방언에 대하여 왜 몰라주는가 하며 억울해 하실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사모하시거나 구하시는 분들은 계속 구하십시오.
그러나 사도의 권면에 순종하시는 것을 성경은 원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시간에 마음껏 방언으로 하나님과 이야기 하십시오.
그러나 성도들의 모인 곳에서는 예언을 하려고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안에서 합심하여 통성으로 기도하거나 할 때 방언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야 은혜를 경험하기에 그럴수 있겠지만 통역이 없는 가운데 방언으로 길게 소리하는 분들이 과연 성령의 인도함이라고 장담할수 있을까요?

성령은 인격이시며 절재와 근신과 오래참으심을 원하시지요.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기뻐하며 진리와 함께 하며 진리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제가 경험한 일이 있습니다.
저녁에 출근을 하기 때문에 주택가에 교회에서 철야기도회를 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되더군요.
갑자기 방언으로 인도자가 기도를 하는데 깜작 놀랐습니다.
마이크의 쇳소리와 어울려져서 드럼소리와 음악이 한데 어우러지고
모인 신자들이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온 주변이 떠들석하더군요

저는 짐작하건데 기도하나보다 이해를 하기는 하지만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저녁시간에 창문을 닫아버려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들어보니 전혀 알수 없는 소리요 비명과 절규와 고함소리가 참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물론 그분들은 순간적으로 기도하면서 어떤 은혜를 맛보셨겠지요.
하지만 은혜 받은 분들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받는 이웃들도 있다는 것을 알고 지혜롭게 하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는 이웃들을 향하여서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입니다.
저는 지금 그런 일면만을 부각시켜서 방언의 부정적인 모습을 비판하려는게 아닙니다.
바울사도의 권고가 오늘날 처럼 교회와 성도들에게 무시를 당하거나 거절을 당하는 때가 또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좋다고 맛보았다고 너도 해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십일조와 주일성수를 잘 했더니 복받았다며 성공했다며 당신도 해봐라 하는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분명 방언으로 은혜를 받은것도 사실이며
십일조를 해서 은혜받았거나 문제해결 받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이라고 성경에서 강조하지도 않은것을 계속 주장할 이유가 있을까요?
만일 바울 사도가 방언을 그렇게 강조하였다면 그의사역은 방언찬양으로 흘렀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도 방언의 유익과 은혜를 넘치도록 받았으나 그것보다는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것 외에는 다 베설물과 같이 하찮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방언을 강조하며 방언의 유익함을 자랑하며 방언 받음이 곧 성령 받음이라고까지(일부에서는 극단적으로)주장하며 가르치는 것이 과연 성경이 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나왔습니까? 또는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누구든지 자기를 예언자나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는,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이 글이 주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누구든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사람도 인정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 모든 일을 적절하게 또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고전14:36-40)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라고 다시한번 결론을 내립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는 데 이것은 개인적으로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나아갈 때를 말하는 것이지 무조건 아무데서나 교회의 모임가운데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도의 덕을 세우고 격려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회개함과 죄에 대하여 돌아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예언(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언은 구원얻은 성도라면 당연히 누구나 할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러한 예언을 금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언은 자기와 은밀하게 계시는 하나님과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사도의 목적입니다.
오늘날 보면 은사주의자들뿐 아니라 모든 교단과 교회에서 이미 이러한 방언을 받자라는 등 비슷한 성격의 집회를 자주 하는것을 봅니다. 신앙과 믿음이 성령안에서 말씀(예언)으로 성장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표적과 이적과 신비한 현상에 초점을 맟추는 모습들을 보면서 바울사도의 권고를 다시한번 살피는것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또한 예언의 말씀을 가감없이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목회자들의 경성이 촉구되는 시기입니다.
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양육해야할 목사의 사명을 망각한체 오로지 사람 끌어 모으기에 급급한 모습들....
부흥회나 은사집회와 성공신화를 추구하면서 십자가의 복음을 뒤로하는 모습들....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지독하게 독설을 한 바울의 충고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온통 세속화되고 물량주의화된 교회의 현상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서 있는 자리를 살펴야 한다 생각합니다.

글을 마감하면서....

방언을 부정하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방언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뒤로하면 자꾸 다른것에 속기 쉽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고 지식에도 졸한 부족한 사람이 감히 방언에 대하여 무슨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만...
우리가 정말 집중하고 소원해야하고 갈망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디 이글이 여러분들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어줍잖은 글 길기만 하고 남는것도 없는데 끝가지 따라와 주셔서 그저 고맙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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