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
요즘은 마귀라는 말을 사용하면
오래된 옛날사람으로 좀 어리숙하게 보는듯 합니다.
마치 이단 사이비가 아닌가라는듯 경계를하기도
하고 그런단어에 별로 심각하게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적 전쟁이라든지 영적 싸움에
대하여 말을 꺼내면 이내 대화자체를 거절해버립니다.
그런말은 배경에는
과거 청교도식의 묵은 전유물이다는식입니다.
그런 이면에는 아마도 요즘 첨단을 향해서 삶의 질과
문화가 엄청난 속도로 다양해지고 포스트 모던주의가
인본주의적 사고와 과학주의적 발상이 지배하는
사회적인 경향에서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세계대전을 겪었던 그 당시의 시대와
지금의 보여지는 나름의 세계질서 속에서 평화가
지속되는 듯한 시점에서의 사람들의 사고가
과거 청교도적인 전통이 답답하다는 것이지요.
물론 어느주의나 어느 사상이나 급변하는 시대를
온전하게 포용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많은 사고의 전환들이 그 당시에
절대 진리로 인식했던 것이 오늘날에는 상대화 되기도
하고 오늘의 시각에서는 오류와 단점으로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것은 원래 인간의 사유세계의 한계성과
성경에서 증언한 것처럼 죄로인한 비틀어짐의
본성때문입니다.
저는 단언합니다.
성경이외에 인간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폭로하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인류의 처음과 과거와
오늘과 미래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성경보다 더 진실하고 확실한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먼저 마귀의 뜻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봅시다.
마귀의 뜻, 훼방자?
마귀는 사탄의 또 다른 이름으로(계 12:9), 이를
가리키는 헬라어 디아볼로스(diabolos)는 ‘중상자’,
‘훼방자’ 또는 ‘고소자’를 뜻한다.
성경은 마귀에 대하여 자세히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창세전부터 존재하였다는것을
여러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속이고 넘어지게
하였고 성경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간들을 조롱하고
유혹하고 넘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의 서신서에도
성도들에게 이 마귀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사도바울은 영적인 싸움을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까지 당부합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에
여러번 마귀에 대하여 밝혀주셨습니다.
과연 사도들이 마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
악한 영들의 개입이 있다고 하는 것을
시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는 마귀론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마귀의 존재가
마지막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고 속이고 넘어지게 하려고 발악을 하고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정한 시기까지는 허용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모든 인간들의 삶에
마귀의 개입이 있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라고
생각하시는분들이 계실줄 압니다.
하나님이 인간들의 사소한 문제까지 일일히
참견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시겠지요.
이렇게 주장하시는 분들의 생각에는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책임은 전혀 의미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겁니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는데
우리가 해야할 일이 뭐가 있느냐는
논리입니다. 매우 그럴듯하지요?
정말 그럴까요?
사실 인간이 구원얻은 것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우리에게 없었고 그 조건이 있다해도
만족시킬 사람이 아무도 없지않겠습니까?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그런것입니다.
너희가 구원을 얻은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자랑할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은자의 자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은후에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열심히 주의 뜻을 위해
일했다고 자랑할수 있을까요?
예수께서 누가복음에
무익한 종의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힘에 겨웁도록 수고하였을지라도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을 뿐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것이 종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것이
이미 은혜를
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혹시 내가
주를 위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노라 자랑하려는 마음이 들거들랑
급히 입을 막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요한의 증언은
분명하게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물론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제자들은 전혀 알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만이 알았습니다.
이것이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도 실재로
얼마나 교묘하게 마귀는 바쁘게
자기의 할일을 하는지 모르십니까?
특히 믿는자들사이에 얼마나 분주한지요.
언젠가 어느 칼럼에서
주일날에 가장 바쁜것은 사탄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얼마나 공감이 가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들을 자주 합니다.
전도를 하다가
한참 열심히 복음을 나누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누군가의 등장으로 대화가 중단되는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모릅니다.
주일날
교회 가자고 약속했던
새신자에게 그날 하필이면
무슨 일이 생겨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은 다른 곳으로이사를 간다든가....
제가 너무 비약한 것일까요?
이런 경우는 가정에서도 친척들에게서도
정확한 타이밍을 맟춰서 방해를 합니다.
별거 아닌 말한마디로
아내와 대판 다툼을 하기도
얼마나 했을까요?
그때마다 저는
사단의 속임과 개입이라는것을
알고 소리없이 기도할 뿐입니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서 기도하고
다시 가서 보면
아내는 언제 그랬냐는듯이
평상시로 돌아옵니다.
반대로
제가 악역을 맡을 때도
제가 스스로를 통재할수 없을 만큼 화를 냅니다.
내면서도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것은 분명 마귀의 장난이구나 하며
기도를 합니다만 그 순간에는
기도가 막혀버립니다.
나중에 아내와 예기를 해보면
그때 아내는 제 눈이 평소와 다르기에
맞서다가는 큰일나겠다 싶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제가 평정심을
찾은것이겠지요.
급하게 성질을 내거나
분을 통제하지 못하는것은
우리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마귀가 틈을 탄 것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통해서
교묘하게 이간질하고 유혹하는 그 정체를
지금 폭로하는 중입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주리셨을 때
마귀가 와서 시험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시험이 올까요?
역설적으로
은혜 충만히 받았다고 할 그 순간에
더 강력하게 시험과 유혹이 온다는것을 기억하세요.
물론
그 넘어짐과 실패를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만 그것이 없이
승승장구한다면 우리는 또다른 마귀의 전략인
교만으로 넘어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것이
마귀의 장난이냐 물으신다면
그것에 대하여는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명백하게도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신앙인이라면
사도들과 같이 깨어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분명한 분별력을 갖고서
오직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서
매 순간들을 지혜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게 어디있어 라고 무시하거나
설마...하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살펴보심을
기억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십시오.
그는 성령의 사람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고백하기를
나의 앉고 일어남을 아시며
누운것과 마음의 생각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피해 숨을곳이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나의 모든 인생의 날들이
주의 앞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고 이 땅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도
주의 은혜를 간구하며
두려움과 경외함으로 오직 주 예수를
소망하는 삶을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께서 지켜 주옵소서!
2008-07-05.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하고 더럽고 이간하는 사단아 떠나갈찌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