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

조회 수 724 추천 수 35 2010.05.03 21:41:13
(묵상한 말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행13:22)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16:7)

(같이 묵상한 말씀)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27:10)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3~6)


2010년을 맞은 저의 첫 진검승부는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본편은 ‘바라봄의 법칙 - 제2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라봄의 진수가 무엇인가? 라는 각도로 읽으셔도 좋겠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안의 생각이 많아, 두서없이 길고 지루할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말씀이 수없이 많지만, 사도행전 13장22절 말씀은 특별합니다.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소개된 것도 그렇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친히 연약한 한 인간을 지칭하여 말씀하셨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셨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나 결론적으로, 오늘날 은혜시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압니다. 다윗을 비롯한 구약의 선진들이 그렇게 목마르게 바라던 메시야를 우리는 보았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통해서 구약의 어느 누구보다도 천국에서는 큰 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마11:11참조)

다윗의 어느 부분을 보셨길래 하나님께서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다윗의 전 생애를 둘러 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서 크나큰 치적을 이뤄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장수로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곧 사울의 미움을 받아 도망길에 오릅니다. 이후 유다의 왕이 된 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일궈냈고 대내외적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입지를 크게 높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평생 동행하실 것과 다윗의 후대 왕조가 영원히 견고하게 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왕되신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실수와 논란거리도 적지 않았습니다. 자식 농사는 형편 없어서, 이복누이를 강간했던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 아들을 죽이고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도 있었습니다. 왕권의 후계 다툼이 치열했습니다. 부하들 간의 권모술수도 난무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실수 투성이였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모셔오는 과정에서 사람이 죽었으며, 충성된 부하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엄명을 무시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하다가 7만명의 무고한 인명을 상실했습니다.

다윗을 깎아 내리거나 정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뛰어나기는 하나,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외적’ 증거를 찾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증거는 의외로 다윗의 외형적 업적이나 능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해답은 ‘중심’이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중심을 이해하려면 사무엘상 16장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고있다 자부했던 사무엘 조차도 간과한 부분이 무엇인지는 차기 왕권을 위한 기름부음 받을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어느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아들이 있었는데, 다윗은 그 중 막내 아들이었습니다. 다윗이 막내로서 우리 식의 막둥이로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집안에서 무시받고 잊혀진 존재와도 같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무엘의 제사에 참석하도록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 시간에도 양들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들 중 한사람에게 기름 부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이새에게 그의 아들을 전부 부르라고 분부했을 테지만, 이새는 일곱 아들만 데리고 버젓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전통은 철저한 장자 적통의 문화입니다. 혹시라도 장자가 유고시는 둘째가, 둘째가 또 유고시는 셋째가.. 이렇게 내려가다 보면 결국 막내까지 내려올 차지는 거의 없었겠지요. 그렇다 할지라도 이새가 다윗을 제사에 데려가지 않은 것은 뭔가 다윗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는 얘기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어릴 적부터 부모의 버림을 받다시피 하면서 자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시편에서 불쑥 고백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시27:10) 예나저나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대하여 자신을 버렸다고 막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천하의 효자라고 불리웠던 다윗이(삼상22:3-4 참조), 어찌 부모가 자신을 버렸다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실제 사실이 그랬다면? 이것이 다윗이 처했던 현실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는 그를 버렸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로도, 다윗을 향한 가족들의 냉대는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새는 여전히 막내 아들에게 군대간 형들의 뒷치닥거리나 시켰고 (참조 삼상17:14 이하; 윗 삼형제가 징집을 갔으므로 다윗 외에 시킬 아들이 네명이나 더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시켰음, 이에 양치느라고 바빴던 다윗은 양들을 형들에게 맡기지도 못하고 다른 목동에게 맡겨야 했음), 또한 다윗을 대하는 첫째형의 태도는 볼상 사나울 정도로 쌀쌀맞게 화만 냈던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가족 간에 왕따도 보통 왕따가 아닙니다.

집안에서 냉대와 버림받은 다윗의 낙은 양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었지 아닐까요? 사람은 편견이 있지만, 양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목자를 충성스럽게 따릅니다. 양과 목자와의 관계는 시편23편에 잘 나타나 있지요. 이런 환경 속에서 다윗이 자연스레 발견한 것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었을까요? 시편 27편10절의 뒷부분을 보면 명확합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다윗의 믿음의 태동은 이런 배경에서 이해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중심’으로 돌아가 봅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을 본 사무엘이 생각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어 이새의 모든 일곱 아들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이 택한 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 밖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다윗이 선택되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제 범위를 좁힐 수 있겠지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중심’이 다윗의 것과 그 형들의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퀴즈를 냅니다.^^  위의 일곱 형들을 다 버리고 유독 다윗 만을 택하셨는데, 그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길래 그러셨을까요? 형들과 차별화된 다윗의 유별난 점은 무엇일까요?

이 퀴즈 문제의 답은 ‘없다’라고 믿습니다. (물론 관점을 달리하면, ‘있다’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다윗과 그 형들과의 ‘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인간이 뛰어나 봤자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다윗 자신의 표현을 빌려 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2-3) 인간 중 어느 누가 스스로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윗,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선진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한결같이 죄악 중에서 하나님을 배반했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를 비교한다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나, 다윗의 형들이나, 그 ‘마음의 중심’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입니다.(마15:19)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기에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습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참으로 오묘하지요? 모든 인간들이 다 똑같이 불의하고 더러운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하심은 이같이 부족한 저에게도 똑같이 미쳤습니다. 다윗에게도 특별히 다른 점은 없었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기라”(롬9:15). 이 말씀이 진정한 정답이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겠습니까?(롬9:21) 다윗이 남달라서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택하심의 긍휼을 입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잘나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하심의 은혜 안에서 건져올림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죄악이 가득한 인간의 완악한 마음 속에서도 구원의 ‘가능성’(Potential)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기에, 원죄의 굴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지라도 우리 모두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3:11)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영혼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갈구하고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도 똑같은 이치 아닙니까? 나의 죄인됨과 나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주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믿고 받아 들임으로 구속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닙니까?

이제 이것을 기반으로 해서, 조금 더 이야기를 진척시켜 보겠습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쬐끔은(!) 다윗의 유별난 차이를 보신 것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그의 과거와 현재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미래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아니십니까? 다윗의 마음 속 중심에 담겨있는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까지도 보셨을 것입니다. 또한 그 잠재적 가능성을 통하여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킬 설계도와 청사진을 예비하셨을 것입니다. 당장은, 그의 마음 중심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조그마한 갈망도 보셨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대하16:9) 저는 그 해답이 이 말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중심은 ‘남달리’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미 그 배경은 나누었지요? 가족의 왕따가 영적으로 보기엔 다윗에게 큰 보약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과 나아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철저하게 죄 문제에 대한 자신의 정체성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후 목동으로서 양들을 치며 묵상 중에 자연스레 태동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 이 조그마한 차이를 하나님은 크게 보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중심’을 두가지로 대별하여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년 다윗의 중심이라기 보다는, 후일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훈련과정을 거친 다윗의 성숙한 신앙 모습이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절망과 갈망의 두가지였습니다. 절망은 나에 대한 절망이요, 갈망은 주님께 대한 갈망입니다. 이것이 제가 본 ‘바라봄의 법칙’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생애는 바라봄의 법칙을 잘 이룬 모범적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망과 갈망.. ‘두가지 다른 차원의 바라봄’ 이라고나 할까요? 이제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절망입니다.

절망(絶望)의 사전적 의미는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버림, 또는 그런 상태’입니다. 다윗은 깊은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시편을 읽다보면 그 절망의 깊이에 깜짝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는 부모, 형제, 상사(사울왕), 자식, 친척, 동료, 부하, 친구 등 주위 사람들의 배신을 처절하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아가, 그는 자신과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과 통회함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가난하고 궁핍하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상하고 낙심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모든 일의 결과로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닥을 모르는 절망이었습니다.

그 절망의 밑바닥을 잘 표현한 시편이 22편이라고 생각합니다.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실제 다윗의 절망을 리얼하게 표현한 것으로도 보여 집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1절) 그는 자신을 또한 벌레로 비유했습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6절) 절망은 환경과 자신의 상태를 깨달음으로 나옵니다. 이같이 극심한 고통의 절망을 통해서 다윗은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항복 선언이었습니다.

절망의 열매는 애통의 눈물입니다. 절망은 애통을 낳고, 애통은 눈물을 낳습니다. 참 절망을 경험한 자는 눈물샘이 마를 사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눈물의 골짜기요(시84:6), 눈물의 시내요(시119:136), 눈물의 양식(시80:5)입니다. 다윗의 눈물은 어땠을까요?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시56:8) 아, 주님의 눈물병.. 그는 자신의 눈물을 주님께서 일일히 기억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과장이 들어갔다 치더라도, 밤마다 눈물로 띄우는 침상이라니요? 주님께서 다윗의 눈물을 어찌 기뻐 받으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절망의 끝은 상한 심령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109:22) 아, 여기에 오늘의 화두인 ‘중심’이 나옵니다. 중심의 상함-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상한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은 또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그것은 상한 심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51:17) 그에게는 또한 죄에 대한 철두철미한 깨달음과 뉘우침이 따릅니다.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3,5) 어떤 의미에서는, 죄에 대한 절망이 없이는 구원에 대한 의미도 없습니다.

둘째, 갈망입니다.

갈망(渴望)의 사전적 의미는 ‘간절히 바람’입니다. 갈망의 의미를 말씀에서 좀더 찾아 봅니다. 시편에서 간절한 바람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재미있는 대목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 이것이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130:6) 군대가서 보초 서본 남성들은 이 구절이 실감날 것입니다. 밤새도록 두 눈 부릎뜨고 지키다 동이 터오르기 직전의 새벽녘.. 이제나 저제나 아침이 오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파숫군의 심정, 이것이 갈망입니다.

갈망의 갈(渴)은 ‘목마를 갈’입니다. 목마름을 넘어서 일정 시간이 넘으면 목이 탑니다. 목이 타다가 일정 시간이 넘으면 혀가 타 들어갑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갈급함은 물이 없어 ‘목이 타는’ 갈급함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음부에서 고통 중이던 부자가 한 말을 기억하시나요?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눅16:24) 부자가 애타도록 기다렸던 한 방울의 물.. 이것은 혀가 타는 갈급함이었습니다. 이럴 정도의 갈급함이 또한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망은 누구를 향한 갈망일까요?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42:2) 비슷한 톤으로 다윗은 선언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시62:1,5) 구원과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것도, 그의 마음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한편, 유다광야에서 쓴 그의 시, 63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그렇습니다. 아, 주님을 향한 내 영혼의 갈망! 이것이 진정한 다윗의 갈망이었습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3절) 아, 그것은 또한 그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갈망이었습니다. 단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바꿔서 얻으려고 했던 숭고한 갈망이었습니다. 63편 후반부에서 그 갈망의 결과를 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5절) 목숨을 내어 놓는 갈망의 결과는 영혼의 만족으로 이어 집니다. 또한 기쁨과 찬송이 따릅니다.

지난 연말에 가족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 왔습니다. 여러 인상적인 추억거리 중 하나가 광야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유다 광야와 사해 쪽으로 이어지는 네게브 사막을 돌아 보면서, 상상했던 광야의 의미가 몸으로 다가왔습니다. 광야에서의 생명은 물을 따라 생겨 납니다. 먹을 것은 없어도 살지만, 마실 것이 없으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물은 이들의 첫번째 생존 조건입니다. 실제로 오가는 길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덥고 햇빛이 따가와서, 광야의 갈증이 어떤 것인지 실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물을 향한 갈증의 정도처럼, 주님을 향한 나의 갈망도 이러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너무 길어졌지요?^^ 이제 정리해 봅니다.)

다윗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은 오늘날 나에게도 그대로 미치십니다.
나는 토기장이의 진흙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남다른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저는 다윗에게서 그의 절망과 갈망을 보았습니다.
절망과 갈망은 구원의 핵심 요소이자,
그리스도인의 평생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절망과 갈망은 바라봄의 두 축입니다.
절망과 갈망의 망(望)은 말뜻 그대로 바라봄입니다.
나를 향해서는 절망이요, 주님을 향해서는 갈망입니다.
나에 대한 절망이요, 주님에 대한 갈망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을 이루는 양대산맥입니다.

절망은 바라봄을 끊는(絶) 것입니다.
절망은 ‘나’에 대한 바라봄을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한 소망은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로부터의 출발을 완전히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은 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주님께 드리는 항복 선언입니다.

갈망은 주님에 대한 바라봄을 극대화(渴)하는 것입니다.
전심을 다해, ‘마음을 다해 힘을 다해’ 바라보는 것입니다.
목이 타고, 혀가 타 들어가는 심정으로 목마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토록 철저하게 주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망은 주님을 향하여 바라보되, 내 목숨까지 내어놓는 것입니다.

절망과 갈망은 따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같이 맞물려 움직이는 바라봄의 싸이클입니다.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이 반복될수록 나는 성숙해 갑니다.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이 심화될수록 나는 주님과 더 가까와 집니다.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은 팔복의 전반기 싸이클이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진정 가난한 자는 절망의 밑바닥을 알고 경험한 자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절망을 경험한 자만이 애통의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절망에서 갈망으로 옮아가는 자가 온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을 갈망하는 자만이 진정한 배부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그랬듯이,
나의 목표는 주님을 더 알아가는 것이고,
나아가 주님이 나를 아시는 바 되는 것입니다. (갈4:9)
다윗이 그랬듯이,
나의 최종 목표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행13:22)

나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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