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조회 수 1074 추천 수 51 2008.07.16 22:43:04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이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살아가면서 무조건 만사가 형통하고 평안함만이 주어지는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본성이 본능적으로 갈망하는

소원이기는 하지만요. 그렇게 완벽하게 찬송가의 가사처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로 가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이땅에 육신의 장막을 입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에게는 필연적으로

근심하는 일들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없이 말입니다.



동일하게 동일한 일을 당하며 겪기도 하며 근심에 쌓이는것이

삶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훌륭하면 다른말로 있으면

근심도 염려도 해결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고난과 어려움이 주님이 행하심과 계획하심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모든일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에다가 맞추는 것이지요.



그렇게 문제를 대할 때 놀랍게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법으로 열리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이지요. 말씀을 통하여 믿음으로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지으셨고 그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하여 즉, 예수로 인하여

만물을 붙드시고 다스리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의 십자가와 죽으심이 나에게 관계가 있으며

그것은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미 나에게 주어졌다는것을

아는 것입니다. 알아버렸고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순간은 낙심하고 절망할지라도

결국은 나에게서 눈을 돌리고 위를 향하여 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 시편에도 보면 비탄한 심정을 고백한 글이

많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라자손의 노래,시42:5)



고라 자손은 찬양을 인도하는 구룹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며 예배를 인도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일에 헌신하도록

세움을 받은 지파입니다. 요즘으로 본다면 성가대를 의미할수 있겠죠.



보십시오.

늘 영광스러운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입에서 놀랍게도

낙심하며 불안해 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은 귀한 믿음의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근심함으로 두려웠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는게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존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여러가지로 두려움과

낙심과 염려로 밤을 새워야 하는 일들에서 자유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 예수께서는 너무도 잘 아시고서

자꾸만 떠나신다는  말씀에 두려움과 근심으로

어쩔줄 몰라하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베드로의 진정어린 고백에 '고맙구나 과연 너희들이 있어서

든든하다' 이러시는게 아니고 '너뿐이다' 이러시지 않고

'네가 닭 울기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전혀 제자들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빈 말이라도 고맙구나 할것이지만

우리 예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은 당장 이해가 안되지만

경국은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것과 같이 자기들도

그렇게 주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주님이 예언하셨다면 틀림이 없잖아요?

그럼 우리들은 전부가 헛수고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지것 주를 쫒아 여기까지 왔는데

그 마지막이 주를 부인하는 것이라니오.



충격입니다.

나름대로 괜찮게 스스로를 생각도 했습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모든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왔습니다.

수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라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님앞에 달려와서 이렇게 고백 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끝까지 주를  따르겠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들은

주님앞에 나온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님이 부르셔서 감사함으로 온것이지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단해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사람은 결단하고 주앞에 나온것입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상하게 거절 하십니다.

나는 머리둘곳이 없다.

주를 따르겠다는 사람들에게 거절하십니다.

가족들과 작별인사하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도 부모의 장례를

치루고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도 거절하십니다.



어떤 병자가 주님의 고쳐주심으로 온전하여져서 주를 따르겠다고

하자 그것도 거절하시고 돌려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그런 모습을 여러번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했을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믿음이 괜찮은가. 저들은 그렇게 주를 따르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어떤 부자 청년 역시도 주앞에

엎드렸지만 근심하면서 등을 돌렸지 않았는가 하면서

제자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동안 갈릴리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고 하찮게 취급당했지만

지금은 수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로 삼아주신것을

자신들의 믿음을 인정해 주신것이라 생각 했었습니다만

오늘 완전히 그것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된것입니다.



그래도 난 아직까지는 믿음이 괜찮은줄 알았습니다.

말씀에 은혜도 받았고 주님에 대한 사랑도 있고 열심도 있고

열정도 있으니까 주님이 무엇을 시키든지 할 수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나는 저사람보다는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내가 누구보다는 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난 이만큼이나 변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를 위해 죽기까지 따를 마음도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들이 나를 위해 죽을수 있다는 말을 하지만

오히려 나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예언적으로 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큰 파장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뭔가 말입니다.

그동안 주를 믿고 따라온 것이 이게 뭐란 말이냐 갈등하지

않겠어요? 내가 어떻게 주를 부인할 수가 있을까?



단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주님은 그럴것을 알고 계시다니...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이런 제자들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자는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근심이 우리를 해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근심이 없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근심은 너희들이 할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심은 믿는자들이 할게 아닙니다. 근심은 내가 스스로를

책임지는 실력이 있는자가 하는 것입니다.

책임을 질 수 있는자가 근심하지요.

우리를 누가 책임진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시편의 고라 자손이 하는 고백을 알아봅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고백합니다.

자기 영혼에게 선언하는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라 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노래들은 대부분 이스라엘의 민중시요 노래입니다.

제가 정확하게 입증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 합니다.



아리랑을 우리 민족은 즐겨 부릅니다.

힘들때나 슬플때나 기쁠때 어김없이 부르는 곡입니다.

이스라엘역시 민족적으로 고난과 한이 많습니다.

시편의 노래들이 대부분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을 것입니다. 즐겨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동일하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시편의 이부분을 인용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는다는 것은 바라는 것입니다.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근심이 생길 때 주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

할 수 없는 가운데 그래도 주를 부른다는 것,

낙심가운데 있어도 그래도 주를 바라는 것,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그래도 내가 주를 소망하나이다 하는것 아닐까요.



2008-07-17. 주께 교회에서...

주님과함께

2008.07.16 22:45:47
*.7.13.27

그동안 원인 모르게 접속이 안되어서...
오랫만에 마음을 비우고서 로그인을 시도했더니...

야홋!

아마도 제 컴에 문제가 있는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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