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전부가 하나의 약속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말씀하셨고 다음으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셨고
제자들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말씀하셨습니다.
좀 복잡하지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관계를 설명하셨는데 솔직하게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알아 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주의 말씀 한 말씀이 영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영생의 말씀 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들은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확대해서 이해한다면 지금 이시간에 말씀을 듣는자들역시
영생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주님의 약속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말씀하셨지만
말씀이 씨라고 하였고 이 말씀이 뿌려졌는데 여러곳에 뿌려졌다 하셨죠.
길가와 돌짝밭과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뿌려졌다 하십니다.
그리고 각각 말씀을 받아서 심어져서 싹이 나며 자라는데 오직 좋은 땅에서만
큰 결실을 맺었다는 비유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거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사랑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무에 붙은 가지가 열매를 저절로
맺듯이 풍성해진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솔직하게 여러분들 가운데 이 말씀이 분명하게 이해가 되십니까?
말하자면 눈으로 보듯 손에 무엇인가 잡히듯 하는가 하는 뜻입니다.
잡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론적이고 교리적이고 지식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좋으신 분이 계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님이 알게 해주시고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보증은 놀랍게도 어떤 특별한 체험이나 환상이 아니라 그동안 죽 보아왔던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입증하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은 바다를 가르고 광야에 길을 내고 반석에서 물을 낼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주님의 말씀으로 보여주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기를 가장 즐거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시기 위해
믿는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결코 자기를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성령님을 애타게 부르거나 찾지 않아도 섭섭해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요16:13~15)
우리가 주님 하고 부르면 그 안에 성령님도 함께 반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안에 하나님과 성령님이 충만하게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꼭 따로 구별하지 않아도 주님하고 찬양하며 경배할때 하나님과 성령님이
함께 받으시고 기뻐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수준으로 생각을 하지는 않는지요?
가족 구성원들을 구분하듯이 엄마 아빠 형 누나 삼촌 작은 아버지 이런식으로
구별해서 대우를 해야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혹은 감사함으로 혹은 애통함으로 주를 부를 때 섭섭해하거나
나를 안불렀으니 대꾸하지 말아야지 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다 있습니다. 그 이름을 마음껏 부르세요. 외치세요.
노래 하세요.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말씀으로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왜 주님의 사역을 구별하고 나누고 구분하는지 잘 이해가 안갑니다
성령사역이라고 구분을 짓고 논문을 쓰고 발표를 하는지 물론 의미는
있겠습니다만 언제나 하나님은 예수님과 성령님과 태초이전부터
그러니까 영원전부터 함께 영원까지 더불어 계셨지 따로 떨어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은 신학자님들께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주 예수 이름으로 충분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예수 이름만 믿으면 된다 이말씀입니다.
예수 이름안에 하나님과 성령님이 존재하심입니다. 따로 만나서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이 예수 이름으로 다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심으로 영원토록 함께 하시겠다고 임마누엘 이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만 굳게 믿고 그 이름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것이며 성령님도 기뻐하시며 우리를 세세히
살피시고 인도하셔서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쁨의 원천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되신 예수님께서 당연히 기쁨으로 충만하신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충만하면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악이 충만하면 악이 넘치고 기쁨이 충만하면 기쁨이 넘치고
찬양이 충만하면 찬양이 넘치고 감사가 충만하면 감사가 넘치고
기도가 충만하면 기도가 넘치고 슬픔이 충만하면 슬픔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쁨이 충만하셨기에 기쁨이 넘쳐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으로 충만하시는 지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신 약속의 말씀이 기쁨입니다.
내 기쁨이라 하신 예수님의 기쁨을 제자들 안에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쁨으로 제자들안에 부어 주셔서 제자들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기쁨을 따로 때어서 나눠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이신 주님 자신이 성령으로 더불어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오늘도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자들에게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의 특징은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환경이나 조건이나 신분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삶은 정말 하루라도 편히 살수 없는 악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옥에 있거나 핍박을 당해서 도망을 가거나 토굴속에서
혹은 파선해서 바다에 빠지거나 굶주리거나 매를 맞거나 상관없이 혹은
사형을 당하거나 내어 쫒김을 당해서도 기쁨을 잃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착고에 차여서 깊은 감옥속에서도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졌고
오히려 간수들은 잠도 못자고서 고생한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상황이 가난이나 어려움과 병듦으로 인하여 고난에 있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러분에게
구원의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떠나시지 않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함께 하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외부적으로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 원망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것은 우리에게 예수 이름을 부르며
그 이름으로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코 모릅니다.
우리가 왜 그러한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 이름을 놓지않고 더욱 힘써서
그 이름을 부르며 찬송하는지 세상은 도무지 모릅니다. 알 길이 없습니다.
영생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며 복인지요.
이러한 기쁨은 받은자 밖에는 모릅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모두에게도 어떠한 형편에 있던지 간에 이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 들려지며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2008-08-27.주님과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