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까지 순종할까요?
이 글을 작성하게 된 동기를 설명 한다면 매주 수요일에 여호수아서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도전이 된 내용이라서 따로 보충해서 작성을 해봅니다. 설교 제목이 어디까지 순종할까요 라고 정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부터 드디어 여리고 함락전투를 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결과는 대승을 거두게 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 방식과는 너무 달랐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통 싸우는 싸움은 칼과 창과 온갖 병기와 무기를 동원하는 싸움 입니다. 아무리 첨단 과학을 동원해서 치루는 전쟁역시 별로 다를게 없습니다만 오늘 여리고 전투는 인간적인 전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의 싸움입니다.
그 이유는 이 전쟁이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영적 전쟁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선택받은 민족입니다. 그 이유는 온 세상에 하나님이 참 신이며 창조주라는 것을 증언 하도록 영적인 제사장 나라로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잘나서도 아니고 수효가 많아서도 아니고 거룩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작정하심 이었고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오직 이방족속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이 주 되심을 전하는 사명을 살아 내는것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기록과 출애굽의 기록들이 분명하게 이스라엘의 최종적인 목적을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충분합니다만 문제는 그 우주적인 사명을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고 이스라엘의 실패와 무지함과 불순종함에도 불구하시고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하심을 변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역사적인 기록들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시대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불러 내시는데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이 뭐냐 하면 절대적인 순종의 사람들 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역시 동일한 의미에서의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서는 이 사실을 자세하게 증언 하고 있는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선택받은 세대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민족이요, 독특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덕을 너희로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니라.(벧전2:9)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귀한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곧 교회입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성도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 교회요 참 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과거 구약시대의 성소의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몸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당시 대 제사장 홀로 들어가야 했던 지성소로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새롭고 산길이 열린 것입니다. 때와 장소와 시간과 날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당하게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셨습니다.
이는 그가 한 번의 제사로써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 그것에 관하여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거자가 되셨으니, 이는 그후에 그가 미리 말씀하시기를 “그 날들 이후로 내가 그들과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주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법들을 그들의 마음들 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그 법들을 기록하리라. 또 그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음이라. 이제 이것들을 용서하신 곳에는 더 이상 속죄제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하여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나니, 그가 우리를 위해 바치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하여 들어가느니라.(히10:14-20)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느니라.(요14:6)
그렇다고 한다면 당연하게도 오늘날 성도들의 신분과 삶의 소명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원래 세상의 공중 권세를 잡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과의 싸움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귀의 술책에 대항하여 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정사들과 권세들과 이 세상 어두움의 주관자들과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 악에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엡6:11,12)
영적 전쟁이라는 사도의 가르침을 자세히 주의 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의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이미 완료된 싸움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바울은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이 땅에서의 남아있는 싸움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때까지 여기서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완성하실 때까지 구원얻은 성도들을 남겨두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실 때 기도를 살펴봅니다.
내가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더니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나이다.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옵니다. 내가 기도하옵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을 악에서 보호해 주시라는 것이옵니다.(요17:14,15)
그러나 나는 이들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옵고 그들의 말을 통하여 나를 믿을 사람들도 위한 것이옵니다.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요17:20,21)
여호수아는 그동안 많은 전쟁을 경험했었고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모든 싸움이 사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는데 오늘 여리고와의 싸움의 방법이 너무나 특이함에 놀랐습니다. 그 방식이 과거의 싸움의 것과는 다르기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곤혹스러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범람하는 요단강을 통과하는 것도 사실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독특한 방식이었습니다. 옛날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법입니다. 광야에서 새롭게 태어난 세대들인지라 모세의 이야기만을 들었던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바다를 향하여 내밀자 밤새도록 바람이 불어와서 홍해를 가르고 길을 내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밖히도록 들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당시의 생생한 목격자였을 뿐입니다.
여호수아의 기억에 모세의 지팡이는 분명 홍해를 향해 가리켰었고 그 바다를 육지같이 통과했었던 경험이 어쩌면 요단강에서도 볼 수 있을거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앙에서 경험은 분명 중요한 힘이며 자신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길에서의 과거의 경험은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과거와 동일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시대를 초월해서 역사하시지만 늘 같은 방식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절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기대와 경험을 비웃듯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전적으로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어께에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에 들어 서자 강물이 쌓여 선 것입니다. 모세처럼 여호수아가 단 창을 들어서 요단강을 향하거나 멈춰라 하고 명령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먼저 요단강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거기 서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 건너 갈 때가지 서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의 사역이 곧 말씀과 함께 언약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아서 순종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후의 제사장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특이한 방식으로 요단강을 건너는 하나님의 방식을 보았습니다. 비록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순종함으로 요단을 건넌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장벽에 부닥치는 것은 곧바로 여리고를 향하여 진군한 것이 아니라 거기서 삼일동안 머무른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라면 여세를 몰아서 단숨에 여리고로 돌격해야 함에도 하나님께서는 멈추라고 하십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할례의식을 행하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할례를 함으로서 각 처소에서 고통을 견디고 있을 때 만일 여리고 백성들이 처들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거기서 머물면서 첫 유월절 절기까지 지켜야 했습니다. 요단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여리고는 완전 정신을 잃을 지경까지 코너에 몰린 것이었지만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러서 다시 여리고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미 여리고는 성문을 꼭꼭 걸어 잠근채 마지막 필사의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지키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시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생각을 놀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여리고와 모든 백성들을 다 주겠다고 하시면서 당장 처 들어 가라 하심이 아니고 이상한 것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여리코와 그 왕과 힘센 용사들을 네 손에 주었으니, 너희 모든 전사들은 성을 에워싸고 성읍 주위를 한 번 돌되, 육 일 동안 그리하라.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뿔 나팔을 들고 궤 앞에 가고 일곱째 날에는 너희가 성읍을 일곱 번 돌 것이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지니라. 제사장들이 양뿔 나팔을 길게 불 때 너희가 그 나팔 소리를 들으면 모든 백성은 큰 소리를 지를지니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들은 각기 자기 앞으로 곧장 올라갈지니라.” 하시니라.(수6:2-5)
앞에서 말한 것과는 너무나 다른 방식으로 싸울것을 명하시는 하나님을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이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사람의 계산이나 지혜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는 싸움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전혀 경험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무모함입니다. 인간적으로 어리석은 싸움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반응이 그저 순종한 것만 나오니까 그들의 심리적인 상태가 어떠할까는 상상으로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시대와 문화가 달라도 인간적인 생각과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늘에서뚝 떨어진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 역시 천사들처럼 하늘에서 살다가 잠간 세상에 내려온 특별한 족속들도 아니라 범죄하고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으로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성정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믿음이 탁월한 선진들 역시 우리와 다를게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방법이 선 뜻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을 한바퀴씩 돌기만 하는데 성이 무너지는 것인가 할 수 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눈에 보이는 싸움 이전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싸움은 보이는 싸움의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영적 싸움의 실체를 알아야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불고 앞서 진행합니다. 그 뒤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따라갑니다. 또 그 뒤를 백성들이 묵묵하게 따라 갑니다. 한 바퀴를 돌고 진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 이튿날에도 똑같이 행하였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행하였습니다. 참으로 갑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불만을 할 수도 없이 묵묵히 돌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순종이 어떤 것일까요?
왜 이렇게 해야만 할까요? 이렇게 성을 돌기만 한다고 무너질까요? 혹시 여리고 성 위에서 갑자기 돌을 던지거나 불화살을 쏘아댄다면 그래도 돌아야 할까요? 여러가지로 무방비 상태로의 어처구니 없는 전술입니다. 너무나 허슬한 방법이지요? 나 잡아 잡수하며 목을 길게 내밀고 흡사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들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싸워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어찌 하시렵니까? 끝까지 순종할 자신이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순종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거리가 얼마나 될까요?
저는 그 생각을 하면서 너무나 놀랐습니다. 저 자신 역시 이런 순종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솔직하게 자신 없습니다. 정말 자신 없습니다. 전 못합니다만 오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여리고성 돌기를 묵상하면서 그동안의 나의 순종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 것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순종보다는 억지로 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서 굴종한 것이지 감사함으로의 자발적인 순종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순종 할만 해서의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여섯째 날까지 돌았지만 여리고성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시험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순종해야 할까요? 우리의 모든 기대가 다 무너질 그 순간에도 우리는 순종할 수 있을까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도 순종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영적 싸움은 누구와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싸움입니다. 진정한 영적 전쟁은 하나님과 나와의 싸움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이 아니라 나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싸움하면 눈에 보이는 적들과의 싸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눈에 보이도록 우리에게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속임수 이고 본질적인 공격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입니다. 정말 강력한 사단의 본거지는 우리 속에 있다는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분과 감정을 통해서 우리를 흔드는 것이 멀리 있는 적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전략은 자꾸만 우리의 시선을 밖으로 보이는 현상에만 머물도록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한 법을 발견하노니 그것은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 악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라. 내가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들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나를 내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갈5:17)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 하듯이 싸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뜻이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겼다 해서 야곱에게 주신 이름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과 우리의 싸움입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거역하느냐의 치열한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싸움이 영적 싸움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진정한 영적 승리의 답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적 승리의 해답은 말씀에 순종입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순종해야 할까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삼일길을 걸어 갔습니다.
이삭이 그의 아비 아브라함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니, 그가 말하기를 “불과 나무를 보소서. 그런데 번제에 쓸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하자,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에 쓸 어린양으로 마련하실 것이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가더라.(창22:7,8)
아직까지 아무런 변화도 감지 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묵묵히 순종하였습니다. 어디까지 순종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곳에 와서,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나무를 가지런히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묶어서 제단의 나무 위에 올려 놓고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창22:9,10)
여기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기대가 다 무너지는 순간까지 말입니다. 이삭의 모든 소원이 끝나는 때까지 순종함입니다. 인간적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 시점까지의 순종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할 만해서도 아닙니다. 그 순종의 끝은 예수님의 십자가 까지의 순종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도망을 가고 예수님 홀로 남았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혀서 높이 들려 졌습니다만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절규하시던 예수님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소리에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순종은 어디까지 일까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날에까지 왔습니다.
칠 일째 되었을 때 그들은 그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그 성읍을 같은 방법으로 일곱 번 돌았으니 그들은 그 날에만 성읍을 일곱 번 돌았더라. 일곱 번째 돌 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소리지르라. 주께서 너희에게 이 성읍을 주셨느니라.(수6:15,16) 그리하여 제사장들이 나팔을 부니 백성들이 소리질렀더라. 백성들이 나팔 소리를 듣자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니 성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들이 각자 자기 앞으로 곧장 성읍으로 들어가서 그 성읍을 취하니라.(수6:20)
여기까지 순종할 수 있어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즉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순종은 결국 사람의 모든 기대와 계획이 무너질 때가지의 순종함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까지 순종했지만 여리고성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순종의 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며 그리아니하실찌라도의 순종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순종했건만 현실은 조금도 변화가 없습니까?
내가 이만큼 오래 기도했지만 여전히 달라지지 않아서 혹시 낙심하시는지요? 순종은 거기까지가 끝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무익한 종입니다까지 입니다. 내가 이것도 했고 저것도 했고 하라는것은 다 했는데도 왜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는가라고 혹시 좌절하시는가요?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의 엄청난 순종때문에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일하시기는 하시지만 순종을 넘어서 하나님의 기쁘심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열심으로 해서 혹은 바쳐서 감동 받으신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시거나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이름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심입니다. 자꾸만 우리가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우기지 맙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십니다. 영적 승리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순종의 자리로 까지 겸손해지고 낮아지도록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실뿐 우리가 믿음이 엄청 좋아서 그러는거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신 순종은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도 속죄제도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고 완성하심은 예수 뿐입니다.
예수께서 다 이루시고 성취하심으로 우리는 이제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 이름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날과 달과 절기와 먹는것과 마시는 것과 안식일과 율법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받아서 믿음으로 누리는 삶이 성도의 성도다운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공동체의 모임인 교회는 이 사실을 날마다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형제들에게 자매들에게 증거하고 나누고 교제하는 곳입니다. 서로 짐을 나눠지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
너희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살리셔서 너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셨으니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한 손으로 쓴 법령을 지워 버리고 또 그것을 그의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셨으며 정사와 권세를 벗겨 내어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그러므로 음식으로나 마시는 것으로나 거룩한 날이나 새 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해서는 아무도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2:13-17)
순종은 예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신 순종밖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우리에게 죄에서 온 율법에서 자유를 주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전통보다 더 중요하고 권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하심을 믿으십니까?
그 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습니까? 사도들의 서신서와 복음서를 믿으십니까?
신약 성경의 말씀이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그 메시야요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은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이며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임을 믿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만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이는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너희는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 (고전3:16-17)
교회의 전통이 아무리 좋고 오래 되었어도 말씀에 없으면 고쳐야 합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조차 언급하거나 강요하지 않은 것들을 성도들에게 강요하거나 강조하는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임을 모르십니까? 마치 유대인들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할례를 해야 한다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것과 똑같은 실수를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한번도 십일조나 건축 헌금이나 일천번제 헌금을 전하지도 않았는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런 일들을 행하고 강요를 한다면은 분명 십자가로 원수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과 구원의 기준을 어쩌다가 십일조와 각가지 종교적인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입니까? 새벽기도가 믿음의 척도가 되고 직분이 믿음의 척도가 되고 십일조 행위가 믿음의 척도가 되는 교회 전통들은 바울사도가 전부 배설물처럼 여긴 인간적인 전통이며 유전들입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같힌자를 자유케 하는 것이며 고와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이 금식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것을 뒤로한채 종교적인 열심으로 대신하는 전통은 죽은 행실이며 죽은 전통입니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율법시대의 계명들을 지켜서 의로워지고 구원에 이른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헛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도 헛 것이며 그 보혈의 공로역시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시고 완성하신 십자가의 구원함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과 십일조와 날과 달과 주일성수라는 명분으로 제한해 버린다면 십자가는 다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다 십일조와 주일성수와 교회 전통이 더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까? 지금 교회가 이것을 회개하고 청산하고 개혁하지 않고 지금의 기득권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더이상 희망은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이 사실을 아는 교회 사역자들이 빨리 회개하고 그동안 교단과 노회의 눈치 보느라 모른채 하거나 오히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가편에 서서 옷을 지킨 사울과 같은 죄와 함께 함을 직시하여야 합니다.
세례요한이 유대인들에게 바리새인들에게 서기관들에게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너희 속으로 말하려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느니라.(마3:9)
바울사도가 일생을 통해서 전한 복음은 이것뿐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없나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인하여 온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 (갈2:20-21)
이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외에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우리의 순종함이란 어디까지 가야 할까요?
내 생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종교적인 전통입니까? 사람들의 유전입니까?
나에게 아무리 좋고 유익함이 있다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로 다 이루신 구원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순종함은 여기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계속 우리를 유혹하고 충동질하고 변명하게 하고 말씀보다 십자가 보다 더 달콤한 것을 내려 놓는 순종함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누려온 안락함이 전통이 아무리 좋아도 십자가가 없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내가 자랑하는 몇대째 기독교 집안 출신이 아무리 자랑스러워도 십자가로 점검해서 아니라면 아닌것입니다.
내가 몇대째 새벽기도 해서 아무리 많은 은혜와 유익함이 있었어도 거기에 십자가가 없으면 아닌것입니다. 내가 십일조 철저히 해서 풍성한 삶의 윤택함을 누렸더라도 거기에 십자가가 없으면 아닌것입니다. 내가 그러한 복을 넘치도록 받았다 해도 십자가를 전하지 않고 받은 복만 세고 당신도 나처럼 해서 받아라고 가르친다면 거기에 십자가가 없으면 아닌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의 명예와 담임으로 명성을 구가해도 거기에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믿음이란 순종이란 십자가로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묘하게 둘러서 회피하고 영광과 축복만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순종해야 한다구요?
그런즉 예수께서도 자신의 피로써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도 그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있는 그에게로 나아가자. 여기에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성이 없는고로 우리는 장차 올 도성을 찾고 있노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찬양의 제물을 하나님께 계속해서 드리자. 이것이 그의 이름에 감사하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히13:12-15)
돌에 맞을 각오하고 이글을 작성합니다
나는 거룩하거나 믿음이 온전하지도 않습니다. 인격적인 성품도 없습니다. 경험도 없는 무지랭이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다른 좋은것들을 다 잃어버린다해도 저는 이 복음, 사도들이 전한 복음 십자가 복음과 함께 하기를 소망합니다.
200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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