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묵상] 나눔의 법칙

조회 수 909 추천 수 36 2009.06.02 20:20:30
일치의 법칙에 연이어서 이번에는 나눔의 법칙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독일에 오기 전에는 바라봄의 법칙만 주로 생각했었는데 요즈음은 일치의 법칙, 나아가 나눔의 법칙을 더 많이 묵상하게 됩니다. 나눔의 법칙이라고 거창하게 명명했지만 사실은 이미 성경에, 또한 목사님의 글 속에 다 나와있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팔복강화와 감정을 살려라 말씀에서 많이 카피를 해 왔지요.^^ 앞에서와같이 베드로와 그의 아들 마가를 또 써먹습니다.^^;; 길지만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는 분들께 감사와 샬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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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마가야, 지난번 내가 해주었던 물 위를 걸었던 얘기 아직도 기억나지? 그래, 일치의 법칙 말이야. 일치의 법칙이란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 주님과 나와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지.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완전히 붙어있어, 주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아 나의 믿음과 삶의 전체가 주님 안에서 자라가는 것이야.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가지인 나도 그분을 닮아 조금씩 자라가는 거지.

오늘은 말이야. 어떤 사건에 대한 얘기 보다는, 일치의 법칙에 이어 우리가 배워야 할 또 하나의 법칙을 얘기해 주마. 그것은 나눔의 법칙이야. 순서적으로 볼 때, 바라봄의 법칙이 먼저고 일치의 법칙이 그다음, 나눔의 법칙은 맨 마지막의 신앙원리라고 생각해도 좋을거야. 처음에 내 자신을 성찰하고 주님을 바라볼 때는 바라봄의 법칙이 중요했어. 주님을 바라볼 때에 비로소 성령을 통한 거듭남과 중생의 씻음을 깨닫게 되었지 않았느냐? 이후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질 수록 바라봄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지. 지난번 물위를 걷는 사건에서 설명한 대로야. 이와같이 일치의 법칙으로 나의 믿음과 영적 깊이가 자라 가면서 이제 나는 주위를 돌아보게 돼. 내 주위에 있는 이웃들 말이야. 그들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주고 싶은 거야. 그게 나눔의 법칙이지.

지난번 들려줬던 오병이어의 기적 얘기부터 하면 어떨까? 주님께서 베푸신 엄청난 기적 중의 하나지. 네가 잘 알고있는 얘기지만, 이번엔 촛점을 오병이어의 원주인인 어린아이에게 맞춰 보자꾸나. 그 꼬마가 내 동생 안드레를 통해 자기가 갖고있던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자기만 배부르게 먹어버리고 입 싹 닦았다면? 그렇게 됐다면 오병이어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거야. 물론 주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무리를 먹이셨겠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오병이어 기적의 주인공은 단연 그 어린아이가 되어야겠지.

그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드렸을까? 동생한테 들으니 그 아이는 그날 혼자서 그 빈들에 왔다더군. 부모님한테 보채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구경삼아 좇아왔다는 거야. 부모님은 걱정이 되어 마침 평상시 조금 안면이 있는 맘씨좋은 안드레에게 부탁하며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보살펴 달라고 했다는 거야. 물론 도시락을 푸짐하게 싸 주면서 말이야. 마침 그 도시락 생각이 나서 안드레가 아이에게 물어보았대. 그랬더니 꼬마의 생각이 얼마나 기특한지.. 도시락 아직도 안먹고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자기는 배가 아직 안고프다면서, 예수님은 장시간 저렇게 얘기를 하셨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느냐는 거야. 사람들 몰래 예수님한테 드려 예수님이라도 시장기를 없애면 좋겠다는 게야. 그러면서 선뜻 자기 도시락을 안드레에게 줘 버렸어.

그 후의 얘기는 너도 알지? 그 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통해 장정 오천명을 먹이고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했었지. 그 오병이어는 주님을 통해 몇천 배로 커져 빈들에서 굶주리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씨앗이 된 거야. 씨 뿌리는 비유에서와 같이 한 알의 작은 씨앗이 좋은 밭에 떨어지면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셈이지. 이것이 나눔의 법칙이야. 나눔에는 자기 희생이 먼저 따르지. 일치의 법칙에서와 같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나눌 수가 없어. 하지만 진정한 나눔의 결과와 파급효과는 언제나 나와 나눔을 받는 이들 모두에게 기쁨과 결실을 가져다 준단다.

엘리야를 공궤했던 사렙다 과부 얘기도 마찬가지야. 그 과부는 자기와 아들이 먹으려고 남겨 두었던 마지막 여분의 기름과 가루를 엘리야에게 주어 버렸지. 자신보다 선지자인 엘리야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희생의 나눔으로 실천한 그 과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니? 결과적으로 그 집에서는 가뭄의 기간동안 병속의 기름과 통속의 가루가 끊이지 않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았던 거야. 극심한 가뭄의 궁핍을 이겨내는 방안과 지혜는 다른게 아니었어. 단순한 나눔의 법칙이었지. 어쩌면 말이야. 사렙다 과부의 경우처럼, 일치의 법칙 이전에 나눔의 법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거야. 나도 채워져야 하지만, 나 이전에 먼저 남이 채워져야 하는 거지. 이것이 진정한 나눔의 정신이야.

우리 공동체 (훗날 초대교회라 불리웠죠^^)는 이같이 주님이 가르치신 나눔의 법칙과 정신을 완전히 실현했다고 할 수 있어.  우리는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쳤어. 누가 먼저라 할것 없이 가진 것을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 자기가 가진 재산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지. 우리는 단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고, 언제나 풍성한 은혜가 넘쳐났어. 매일의 삶이 오병이어의 기적이었다고나 할까? 우리 가운데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 이따금씩 땅이나 집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면, 우리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때그때 나눠주는 거야. 이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을 수 밖에 없었을까? 진정한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재산의 일부를 사욕으로 몰래 숨김으로써, 자기 자신과 공동체와 이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속였기 때문이야. 그러기에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나눔은 죽은 나눔이야.

주님께서 주신 달란트 비유에서도 나눔의 법칙을 배울 수가 있지.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왜 책망 받았는지 아니? 나눔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야. 주인의 엄함이 무서워서 쓰지않고 수건에 쌓아 두었지. 적어도 영적 세계에서는 달란트를 그대로 두면 안된단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달란트, 아니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썩히지 말고 쓰라는 거야. 나아가, 아낌없이 내 이웃에게 나눠주라는 거야. 욥이 말한대로 우리 인간 모두는 적신으로부터 와서 적신으로 돌아가는 거야. 공짜로 받았으니 공짜로 나눠줘야 하지 않겠니? 달란트는 내것이 아니고 내가 잠시 맡아 쓰고 있는 거지. 나는 달란트를 관리하고 나눠주는 청지기일 뿐이야. 그런데 이 달란트는 나눠주는 만큼 더 생기게 되지.  왜냐면 나눔의 법칙은 나눈 만큼, 아니 내가 나눈 것보다 더 만큼, 나에게 더 돌아오기 때문이야.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단순히, 아낌없이 주라는 말씀이야. 주님께서 주신 나눔의 법칙이지.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점이 하나 있어. 주님이 말씀하신 '헤아림'의 뜻을 알겠니? 무조건 많이 주라는 말씀이 아냐. 주되, 헤아리지 말고 주라는 말씀이시지. 사람은 일단 헤아리기 시작하면 이해타산을 따지게 된단다. 나의 헤아림으로, 즉 이해타산 또는 보상을 바라고 내가 준다면, 그 보상을 바라는 기대심리로 인해 이미 나눔의 법칙은 성립이 될 수 없는 거야. 내가 헤아리는 순간 나는 그 헤아림을 도로 받기 때문이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말이야.

탕자의 비유는 어떨까? 첫째 아들의 실패점은 무엇일까? 그는 아버지의 재산이 유한한 것으로 생각했지. 아버지가 동생에게 주신 재산의 분깃만큼 그에게 돌아올 분깃은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오해했던 거야. 그러나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셔. 온 우주만물의 주인되신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실 보따리가 유한할까? 다른 사람에게 더 나눠 주셨다고 나한테 돌아오는 분깃이 상대적으로 적을까? 큰 아들의 착각이 바로 그거였어. 분깃은 나하기 나름이야. 분깃이라는 말뜻에 있는 것처럼 분깃은 나누라고 있는거야. 내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분깃의 비밀이지.

"내것이 다 네것이로되.."라고 하신 아버지의 말씀 속에는 여러가지 함축적 의미가 있지만, 그 무궁무진한 아버지의 재산이 큰 아들, 작은 아들 가릴 것 없이 다 이들의 분깃이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되는거야. 오병이어와 사렙다 과부 얘기는 이런 분깃의 원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야. 무한한 원천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분깃, 그 분깃을 받은 내가 그대로 나눈다면 분깃은 고갈됨이 없이, 나눌 때마다 계속 다시 채워지는 거야. 그래서 주님께서도 말씀하셨잖니?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것이 나눔의 시발이 되는 분깃신앙이야.

나눔의 법칙은 정말 신비하지? 나눔은 샘물과 같단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복의 근원은 믿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 아니냐? 이 복의 샘물은 주님께로부터 흘러나와 나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인데, 내 임무는 내 안에 충만히 차있는 샘물을 끊임없이 밖으로 흘려 보내는 거야. 바로 내 이웃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거지. 이 샘물은 나누면 나눌수록, 그 근원은 더 새롭게, 더 많은 것으로 채워지는 거야. 나눔은 또한 파이프와 같아. 파이프의 역할은 다른 불순물이 섞이지 않게 잘 흘려보내는 거야. 내 자존심, 명예, 욕심, 교만 같은 불순물 말이야. 파이프는 또한 흐름의 길이 막히지 않도록 늘 뚫려 있어야 해. 파이프의 한쪽은 원천이신 주님께, 나머지 한쪽은 나눠줄 이웃에게 통해 있는거야. 어느 쪽 막힘이 없이 뚫려 있어야 잘 흘러가지. 그래서 나는 단순히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여과없이 통과시키는 파이프와 같단다.

오늘도 조금 길어졌지? 그치만 한가지만 더.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으로 마무리 겸 정리를 해 보자꾸나. 팔복의 말씀은 너무나 깊고 오묘하여, 나로서도 묵상할 때마다 여러가지 다른 각도에서 다양한 은혜를 체험하게 된단다. 지금까지 얘기했던 바라봄의 법칙, 일치의 법칙, 나눔의 법칙과도 팔복을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지. 그것은 바로 팔복을 관계에 대한 차원으로 묵상해 보는거야. 세 가지 각각 다른 관계에 대한 점진적, 순차적 전개라고나 할까?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로 출발하여, 나와 주님과의 관계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 종결되는 거야. 물론 내가 얘기한 세가지 신앙의 원리와 같이 연계가 되는거지.

처음 두 복은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시작이 된단다. 심령이 가난한 것(1복)과 애통하는 것(2복) 말이야. 죄와 허물로 가득찬 나 자신을 돌아볼 때 나의 심령은 가난해지고 애통하지 않을 수 밖에 없지. 이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라봄의 법칙이야. 내 죄와 죄성이라는 장애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을 먼저 바라보게 되고, 이에 내 마음은 가난해지며 애통해 하는 것이지. 또한 가난하고 애통한 마음을 따라 이제는 구원의 유일한 해결자이자 내 영혼의 주인되신 주님을 바라보게 된단다. 이것이 구원과 중생의 관문이야. 물론 내 스스로 이렇게 한다기 보다는 성령님의 크나큰 은혜와 도움을 통해서지.

이후 나는 주님과의 관계에서 주님을 향해 자라가야 해. 주님의 뜻을 살피고 순종함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어가고 (3복), 오로지 의이신 주님만을 목말라하고 갈망하며 (4복), 종국적으로는 순전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주님과 교제하게 되는거야 (6복). 이 시점에서 나는 일치의 법칙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나 자신을 주님 안에 붙들어 매는거지.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가 되었듯이 나도 주님과의 일치를 향하여, 주님 안에서,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매일의 삶 속에서 정진하는 거야.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말이야. 이와같이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6복의 말씀대로 일치된 나의 영안으로,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을 보게 되는 거야.

나머지 세 복은 이웃과의 관계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와 같이 나의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5복), 그 이웃을 향하여 주님께서 이루신 화평을 전하고 (7복), 어떤 때는 주님으로 인하여 오해와 핍박을 세상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지 (8복).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나눔의 법칙으로 나는 내속에 있는 주님을 나의 이웃들에게 나눠주어야 하는거야. 나눔의 대상은 물질이나 깨달음이나 지식만이 아니야. 더 귀한 나눔은 정과 사랑을 나누는 거야. 나아가, 주님께서 내게 주신 긍휼과 화평을 나누는 것이지.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의 원천이신 주님을 내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눔이야.

진정한 나눔이 일어날 때, 세상은 나를 싫어하고 배척하려고 한단다. 왜냐면 긍휼과 화평, 그리고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은 사단이 헛되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의 악한 부정적 연대와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놓았기 때문이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미 사단의 정수리가 박살났지 않느냐? 그러니까 나눔이 있는 곳에는 자연적으로 세상의 핍박이 오게되지. 그러나, 핍박이 올 때 나는 오히려 더 기뻐하게 된단다. 왜냐고? 이 싸움의 승리는 내것임을 이미 내가 확실히 알고있기 때문이야. 더 나아가, 홀로 의이시며 나의 유일한 공급자 되시는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세상의 핍박보다 더,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위대하기 때문이지.

그 축복은 여러가지가 있겠지. 그러나, 내게 주시는 축복 중의 축복, 진정한 축복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바로 주님 자신이야. 다시 말해, 그 축복은 나와 그 주님과의 더 가까와짐이지. 내가 주님과 더 가까와짐이야말로 나눔에 대한 종국적 보상이라고 생각해. 그래, 주님과의 하나됨을 더욱더 경험하는 거야. 나눔의 법칙을 통해, 나는 주님과의 화평과 일치를 더 누리게 되는거지. 이같이 이웃과의 나눔은 자동으로 내 안에서 주님과의 나눔으로 이어지게 되는거야. 이러한 하늘의 축복이 어디 있겠니? 주님과 함께함의 축복으로 나는 내 현재적 삶 가운데 이 세상에서 천국을 경험하며 누리게 되는 것이지.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눔의 법칙의 최종점이야.

아들 마가야,
너는 바라봄의 법칙을 넘어 일치의 법칙으로 나아가야 하느니라.
또한 이에 더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나눔의 법칙을 실천하거라.
그러나 네가 해야 할 일은 그리 별로 없단다.
네 안에 계신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시도록
주님께 너를 온전히 드리려므나.
아들아, 사랑한다..

********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이렇게 나눔의 노래를 부르렵니다.

나눔은 분깃신앙입니다.
그 분만이 유일한 나의 분깃입니다.
그 분만이 내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적신으로부터 와서 적신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청지기 인생입니다.
내 가진것은 본래 내것이 아니므로,
분깃으로 맡겨주신 그것을
오늘도 나누며 살아 갑니다.

나눔은 '내가 먼저'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속눈치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진정한 우러나옴으로 내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자기 포기이자 희생입니다.
나를 죽임으로,
나를 비움으로,
나눔의 꽃은 피기 시작합니다.

나눔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입니다.
다섯 달란트가 열 달란트 되고,
열 달란트는 이십 달란트가 됩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뻥튀기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나눔은 헤아리지 않습니다.
나눔은 속이지 않습니다.
나눔은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종국적 보상은 단지 그 분과의 가까와짐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일방통행입니다.
나눔은 나로부터 남에게로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남으로부터 나에게 다시 오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의 공급자는 오직 그 분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눔은 샘물입니다.
멈추어 고여있지 않습니다.
나눔은 쉴새없이 흘려 보내는 것입니다.
움켜쥠이 없이 훨훨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파이프입니다.
파이프의 한쪽은 원천이신 그 분에게,
나머지 한쪽은 나눠줄 이웃에게 통해 있습니다.
어느 쪽 막힘이 없이 뚫려 있어 잘 흘러갑니다.

나눔은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 분께 받은 긍휼을 그대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눔은 화평케 하는 것입니다.
그 분께서 이루신 화평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눔은 핍박을 두려워 않습니다.
긍휼과 화평을 나눌 때 세상은 나를 싫어 하지만,
나눔의 근원이신 그 분을 전할 때 그들은 나를 핍박하지만,
나는 의되신 그 분만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 주여!
부족한 저로 바라보게 하옵소서..
부족한 저로 일치되게 하옵소서..
부족한 저로 나누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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