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 다윗 묵상(아, 밧세바..), 2부: 간증 일기(아, 방심..), 3부: QT(아, 중심..)의 순서입니다. 1부 글은 2009년 9월 작성했던 것입니다. 너무 길어서 죄송.^^ 그래도 제게 주셨던 뜨거움을 그대로 나누기 원합니다. 앞의 창13장 롯과 연결해 읽으시면 제 마음의 흐름을 잘 알수 있을 것입니다.^^ 샬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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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다윗 묵상] 아, 밧세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성군 다윗의 일생 중 가장 오점이 되는 사건은 밧세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따라가며 다윗이 과연 무엇을 잘못했고 나는 이를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 하는 관점에서 묵상을 해봅니다.
때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취임한 지 8년째 되던 해 봄철이었지요. 13년간의 도피생활, 7년간의 유다왕국 왕을 거쳐 마침내 통일된 왕국 이스라엘의 왕으로 취임했던 것입니다. BC991년, 북방 땅에서는 아직도 암몬과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지만, 통일왕국의 태평성대가 이어졌던 이 시점에는 다윗 왕도 어느정도 정신을 추스리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시점이었을 것입니다.
왕궁에서의 어느 나른한 오후, 다윗은 자기 침실에서 낮잠을 즐겼습니다. 늘어지게 한잠 자고나서 왕궁 뒤뜰을 서성입니다. 왕궁에서 저멀리 보이는 민간인 집들의 여기저기를 바라봅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이 번쩍 띄어졌습니다. 웬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지요. 언뜻 보기에 팔등신의 아름다운 몸매가 적나라하게 보였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보다가 수하를 불러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자신의 충신 중 하나인 헷사람 우리야 장군의 아내인 밧세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략)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게 떠오른 단편적 질문들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왜 하필이면 그 때 밧세바가 목욕을 하고 있었을까?
2)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다윗이 어찌 이렇게 한순간 유혹의 사슬에 휘말릴 수 있었는가?
3) 밧세바와 간음한 것도 그랬는데, 어쩌자고 충직한 우리야를 죽이기까지 이르렀나?
4) 나단 선지자가 폭로하기 직전까지 다윗은 왜 스스로 돌이켜 회개하지 못했나?
여기서 저는 죄의 본질과 유혹자 사단의 전략을 봅니다. 사단은 다윗을 넘어뜨리기 위해 세심한 전략을 짭니다. 먼저, 다윗이 가장 편안할 때 밧세바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는 하와와 요셉에게 했던대로 유혹의 첫번째 트리거(방아쇠)를 당깁니다. 저 여인이 아름답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남성에게 있어서 자연스런(?) 욕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동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단은 두번째 트리거를 던집니다. 도대체 누구인지나 알아보자구.. 그냥 알아보는 거야 무슨 죄가 아니지 않는가? 혹시 가정을 가진 여인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는가? 일단 알아보고 다음 일을 결정하는 거야.. 알아본 신하가 보고했습니다. 충신 우리야의 아내라고? 아이구, 안되겠네. 이젠 포기해야겠구만..
그러나 사단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세번째 트리거입니다. 왜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그 여자 얼굴이나 한번 봐도 좋지 않을까? 멀리서 본 얼굴하고 틀릴 수도 있잖아? 데려와서 얼굴만 확인해 보면 어때? 남편 우리야가 고생하는 것 위로도 해 줄겸 말이야.. 아울러 사단은 다윗의 하나님 생각에 대한 분리를 시도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잠깐만(!) 잊어버리라구! 결국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불러 옵니다.
네번째 트리거는 시도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밧세바를 본 다윗은 하나님을 그렇게 갈망했던 원래의 다윗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마리 짐승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단의 유혹을 받은 예전의 하와와 같이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아, 밧세바.. 그녀는 다윗에게 금단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유혹자 사단의 단계별 전략이 보이시나요? 첫번째 트리거에서 두번째 트리거로, 두번째에서 세번째, 네번째로. 사단은 단계별로 올가미를 하나씩 준비하고 씌워갑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야금야금 마음을 파고 들어갑니다. 결코 서두르지 않습니다. 약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그러다가 일단 올가미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순간 가차없이 채버립니다. 당하는 사람은 어, 하는 순간에 죄의 수렁에 빠진 자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최초의 죄의 트리거는 욕심에서 나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또한 죄는 다른 죄를 낳습니다. 다윗의 경우 간음죄를 숨기려고 하다가 결국은 살인죄까지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도 밧세바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10개월의 긴 시간동안 다윗은 죄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한번 들어온 죄는 끊임없이 그를 사로잡으며 그의 마음 속에서 왕노릇 했던 것입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 - 다윗과 요셉의 경우 공통된 고백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관점인데, 두사람 다 죄는 사람에게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창39:9. 시51:4). 간음죄의 경우 그 남편들을 향한 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면전에 죄를 범하는 것이 더 중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그의 범죄가 ‘하나님께만’ 지은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국 관계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유일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59:2).
그러면 왜 다윗이 유혹에 넘어갔는가? 예전의 다윗 같으면 아무것도 아닌 유혹이었는데.. 무엇이 잘못돼서 그리 쉽게 밧세바에 빠져 버렸는가? 진정한 근본적 발단은 무엇인가? 이 질문이 지난 며칠간의 제 묵상 제목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시점에서 이전과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 많은 힌트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통일왕국의 전성기로서 다윗이 이전보다 마음의 여유가 있어졌다는 점,
2) 전쟁 중이었음에도 왕궁에 편안히 머물러 있었다는 점,
3) 대낮에 자신의 침상에서 낮잠을 잤다는 점
등을 들어 심적, 육적 안이함으로 인한 영적 나태를 거론합니다.
결국 심리적, 육체적인 편안함이 다윗을 망쳤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10:12)” 저는 이 장면에서 다윗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다윗은 이전처럼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었을까?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기도는 밤과 낮이 없었습니다. 그가 기도했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편히 낮잠을 자고 한가로이 산보했다는 것 이외에는..
관계의 느슨함,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전보다 훨씬 느슨해 진 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요셉의 경우에 있어 이것은 단정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든든한 시점에서 비슷한 유혹을 받은 요셉은 간단히(!) 이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같은 관점에서 하와의 실패 원인도 결국은 사단이 하나님과 그녀의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와의 말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는 대답은 하나님의 원래 말씀 “먹지말라.. 정녕 죽으리라”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했다면 원래의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변질시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의 느슨함은 왜 생겼을까? 하는 것이 또한 제 묵상의 제목이었습니다. 다윗이 끊임없이 추구했던 하나님과의 동행이 왜 이 시점에서 깨졌을까? 심리적, 육체적 안일함이 어떻게 관계의 느슨함으로 이어졌는가? 신실하신 하나님의 팔은 영원히 나를 붙들고 계신데, 나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향한 나의 팔을 느슨하게 쥐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 팔에 힘이 빠져 있을 때 유혹자의 트리거는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 상 관계의 느슨함은 여러가지에서 찾을 수 있지만, 다음 두 가지 원인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첫째, 마음이 높아질 때입니다.
다른 말로 교만해질 때입니다.
배가 부르고 현실에 만족할 때는
상대적으로 그만큼 영혼의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합니다.
현실에 안주함으로 하나님 자리에 ‘내’가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어지는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가 부족하고 약할 때 강해지지만,
내가 육신적 평안을 누리게 될 때 약해집니다.
내 마음이 높아질 때 유혹자는 사자처럼 달려 듭니다.
낮아지고 무릎 꿇는 마음 속에 하나님은 임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나의 기대치가 현실과 다를 때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법램프 정도로 오인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실 땐 좋은 하나님으로,
그렇지 않고 내 기대치에 못 미칠 땐 영적 느슨함으로 나타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9)
나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맞추기 보다는
초월의 하나님, 절대적 하나님을 그대로 바라보며
그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 목표이자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관계의 느슨함에 대한 근원적 원인은 마음의 높아짐(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내 기대치의 차이 (즉, 하나님에 대한 내 실망)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에 대처할 나의 대응방안은 무엇일까요?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있음이 핵심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조금 다른 각도로 조금더 근원적, 대안적 차원에서 묵상해 본다면 다음 세가지로 요약된다고 묵상합니다.
첫째, 나의 근원적 정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약함은 무엇이고 내 자랑은 무엇인가?
내가 가고자 하는 인생의 방향은 무엇인가?
내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말씀 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깨닫고 더 알아가는 만큼 나는 성장합니다.
시편51편이 내 정체성의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영적 싸움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듭나는 순간부터 나는 영적 싸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천로역정의 우화는 한갖 우화가 아닌 실제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실상들입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영적 전투를 치루고 있는가?
내가 싸우는 전투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들의 전략은 무엇이고, 나의 방어 수단과 공격 무기는 무엇인가?
유혹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만큼,
그들의 궤계를 방어하고 물리치는 방법을 더 배우는 만큼 나는 성장합니다.
에베소서 6장이 이에 대한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셋째, 주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입니다.
셋중에 이것이 내게 가장 필요하며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내 실망은 그분을 잘 알지못함으로 인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성경)을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내 속사람을 통하여 친히 가르쳐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길은 내 길과 근원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근원적으로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배우고 알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더 깨닫는 만큼 나는 성장합니다.
내 성장과정은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더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 가는데 내 시간을 드립니다.
그분을 알아 가는데 내 몸을 드립니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을 통해 저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또 중요한 것은, 혹시 사단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지었을 때에라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이킴은 빠르면 빠를 수록 좋습니다. 시편51편에 나타난 다윗의 회개 기도는 매일의 내 삶에서 거울이 되는 훌륭한 기도의 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2부: [간증 일기] 아, 방심(放心)..
2010년 5월 7일(금요일) 오후 뮌헨에서
뮌헨 출장 길은 평상시보다 조금 여유가 있었다. 만나는 손님들에 대한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한데다, 저녁과 아침에 시간적 여유가 있어 말씀 묵상에 대한 시간이 많아 좋았다. 제자반 숙제인 창세기13장 QT를 써 가면서, 롯과 함께 생각난 것은 이상하게도 가인이었다. 가인의 실패가 그날 따라 계속 내 가슴을 맴돌았다. 오후 돌아오는 길목의 내 머릿 속은 온통 가인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그것은 창세기 4장 초반에 펼쳐진 내용이었다.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느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5-7) 내 관심은 ‘죄의 소원’이라는 말씀에 있었다. 죄의 소원이라 함은 외적으로 죄를 짓기 이전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다 할 수 있겠다. 죄라는 외적 결과가 일어나기 전에 가인은 마음 속에 죄의 소원을 먼저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죄의 소원으로 인해 죄는 가인의 마음 문 앞에 엎드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가인에게 죄의 소원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 바로 그 시점부터가 아니었을까? 왜 죄의 소원이 생겨 났을까? 그는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다. 하나님이 동생의 제사만 받으시고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무어라 하셨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그렇다.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은 것이다. 선은 무엇인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는 것 말고 다른 선이 있겠는가? 아벨이 드린 제사가 바로 선이었지 않은가? 가인이 품은 죄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선포는 무엇이었나? 첫째, 선을 행함으로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지 않도록 하라! 둘째,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 그러니까, 가인의 잘못은 선하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것이 아닐까? 그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이다.(약4:17)
예수님은 죄의 소원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을까?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살인한다는 행위 자체 이전에, 살인하고자 하는 마음의 동기가 살인죄라는 말씀이 아닌가? 즉, 살인의 근원적 동기인 미워함은 살인죄와 같다. 미워함이 죄의 소원이며 살인을 불러오기 때문이지 않는가? 이 말씀을 가인에게 적용한다면? 가인이 동생을 미워함으로 분노했을 때, 그는 이미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 죄의 동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죄의 소원이자 죄 자체인 것이다. 살인이라는 행위는 죄의 결과 내지는 열매이지 않은가? 그러면 죄의 소원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일까? 죄를 지었는데 다스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 그래도 마지막 열매까지는 가지 말라는 말씀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선하신 하나님께로 돌이켜 회개하라는 말씀이 아니겠는가?
가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무엇일까? 죄는 외적 열매로 드러나기 전에 ‘죄의 소원’이 먼저 생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죄의 소원 조차도 심판받고 지옥불에 들어갈 엄청난 죄임을 가르쳐 주셨다. 그 해결책은 선하신 주님께 무릎꿇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다.
2010년 5월 8일(토요일) 오전 제자반에서
오랫만에 제자반에서 공부를 했다. QT 나눔 속에서 은혜가 있었고, 목사님의 열강이 가슴 깊숙이 들어왔다. 이 날 목사님의 강의 내용은 영과 육에 대한 것이었다. 아, 좋으신 주님.. 가인에 대한 묵상 후편으로 나는 받아 들였다.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는 지킬과 하이드가 같이 살고 있다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킬은 영이요, 하이드는 육을 표방한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지킬이냐, 하이드냐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킬과 하이드를 동시에 같이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도 영과 육을 같이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일 뿐입니다. 서로가 완전히 다른 두 차원의 세계입니다. 이것이 많은 이들의 오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영이면 영, 육이면 육이지, 영과 육이 같이 있는 법은 없습니다. 두 갈레 길입니다. 중간에 따로 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둘을 혼합하려고 합니다. 적당히 섞어서 중간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혼합주의는 위험합니다. 육신적 그리스도인의 표상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두가지가 뇌리에 스쳤다. 첫째, 중심(中心)이라는 단어였다. 영과 육을 택하는 나의 마음밭의 핵심, 그것은 나의 ‘중심‘이 아닐까?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아, 중심을 보시는 주님.. 중심은 나의 지정의가 나의 영과 합하여 만든 나의 내적 영역의 한복판이다. 당연히 나의 중심이 영을 택할 때, 주님께서는 이를 보시고 기뻐하신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매사에 중심을 잃지 않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중심이 흔들리지 않고 늘 바로 선다면? 중심이 요동치 않는 믿음.. 이것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수1:7, 잠4:27) 믿음이 아닐까? 언제, 어디서나, 어느 환경 하에서나 영만을 택할 수 있는 중심.. 이것이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닌가?
둘째, 발 씻기움이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베푸시기 직전에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 이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혔다. 마다했던 베드로도 주님의 이같은 설명을 듣고 발 씻겨 주시기를 간청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나의 중심이 영의 영역에 굳건히 서 있기 위해서는, 내 발이 항상 깨끗해야 하는 것이다. 삶의 찌듬과 어둠의 권세 속에서 내 발은 매일, 매 순간 더러워지고 있지 않은가? 그 발을 누가 씻겨 줄 것인가? 아, 나는 내 스스로 내 발을 씻겨서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으로 오인했었다. 내 알량한 마음과 의지를 모아서 더러워진 내 발을 스스로 씻을 수 있을까? 이건 말도 되지 않는다.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내 몸을 주님께서 깨끗케 해 주신 것처럼, 매일의 삶 가운데 내 발도 주님께 내어드려 깨끗함을 받아야 하겠다.
2010년 5월 9일 주일예배 때
예배 시작 20분전.. 성가대석에 앉아서 기도를 시작했다. 어제 제자반에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죄의 소원, 중심, 발씻김의 세 주제어를 중심으로 묵상과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내 심령 속에 한 단어가 스쳐왔다. 방심(放心)이라는 단어였다. 이제껏 내가 묵상해 온 키워드가 아니었다. 왜 이 단어가 지금 떠올랐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방심이 바로 중심의 반대 개념으로, 중심의 대립된 모습으로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마치 내 밖의 누군가가 내게 속삭이며 가르쳐 주고 간 느낌이었다. 그리곤 복받쳐 오르는 눈물.. 삽시간에 내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버렸다. 처음엔 내가 왜 울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영문을 몰랐다. 방심이라는 단어 때문인 것은 알겠으나, 왜 방심 때문에 이렇게 눈물을 흘려야 되는지 이해가 안됐다. 아무튼 내 안의 눈물샘이 터진 것이었다. 찬양팀의 찬양이 시작될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내 안에 계신 다른 이(성령님)의 눈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찬양 중에 떠올린 것은 다윗이었다. 아, 밧세바.. 영웅 다윗이 아닌 유혹의 사슬에 묶여버린 가엾은 다윗.. 그것은 다윗의 ‘방심’으로 시작된 사건으로 내 마음에 다가왔다. 이제껏 주님만을 향해있던 다윗의 중심이 한순간의 방심으로 무너진 모습.. 그리고, 그 속에 투영된 나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 아,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방심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사랑하는 자들아~ 서로 사랑하자~” 성가대의 찬양 중에서도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롯의 아내에 대한 “뒤를 돌아보았으므로”였다. 가인, 롯, 다윗의 3인이 롯의 아내와 겹쳐 보여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졌다. 한편으로 내 생각은, 어떻게 되었길래 (나를 포함한) 이들이 중심을 벗어나 방심의 상태로 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여러 깨달음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우선은, 이러한 방심이 한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방심의 모습은 죄의 소원 이전에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이미 생겨난 것이다. 방심이 죄의 소원으로, 이어 죄의 소원이 죄의 열매로 자라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는 것은 내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방심은 중심의 끈을 놓는 것이다.
주님을 향하여 굳게 잡았던 내 손을
어느 순간 놓아 버리는 것이다.
방심은 중심의 흔들림이다.
중심이 흐트러져 가는 모습이다.
순수한 영을 육과 혼합하려고 하는 이중적 자세이다.
방심은 중심 이동이다.
영으로부터 육으로의 이동이다.
선으로부터 악으로의 이동이다.
내 속 깊은 곳,
욕망의 아우성을 다스리지 못한 모습이다.
내 체질과 성질과 기질의 망나니 삼총사가
내 방심을 이용하여 몰래 만든 나의 바알..
그러기에, 방심의 열매는 바알이다.
바알의 다른 이름은 죄의 소원이다.
바알이 태어나면 곧바로 끊임없이 자란다.
자라서 거인이 되면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바알의 분출, 이것이 죄의 외적 결과이다.
이 모든 과정의 시초가 방심이다.
목사님의 후반부 말씀을 들으면서, 방심이 올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했다. 내게 주어진 해답으로 다가온 것은 베드로의 발 씻기움이었다. 이미 흐트러진 나의 중심, 그것을 되돌릴 힘이 내게는 조금도 없지 않은가? 내 속의 바알이 얼마나 강한지는 나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오 주님.. 주님만이 해답이거늘.. 그럼에도 나는 주님께 내 방심을 고쳐달라고 구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어떻게든 내 속의 시꺼먼 바알을 잘 숨겨 놓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쳐 왔던가? 설교 말미에 눈물이 또 시작되었다. 기도 시간에 계속 흐르는 눈물.. 내 한심하고 추한 모습이 너무도 서러워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국립합창단의 찬양 중에도 내 눈물은 멈추지 못했다. 성가대석이 온통 눈물로 전염되었나보다.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들이 들렸다. 오늘 예배는 눈물 바다였다.
아, 그랬었다..
나는 내 스스로 발 씻을 수 있다는 착각으로,
주님 앞에 내 발을 내밀지 않았지 않은가?
이깟 발 쯤이야..
뭐, 주님이 몸소 고생하실 필요가 있나?
내 스스로 알아서 하면 되지.
쓱싹 쓱싹.. 쓱싹 쓱싹 쓱싹..
아무리 아무리 닦아도,
씻겨지지 않는 내 발이여..
교만한 그대여,
네 중심은 이미 흐트러져 버렸단다.
네가 이러고도 방심 안했다고 말하려느냐?
주님께 네 발을 내밀거라!
네 더러움을 보여 드려라!
그동안 네 잘난 맛에 살아왔지 않느냐?
번드르한 네 허울과 가면을 벗어 버려라!
우매한 그대여,
그래야 주님께서 씻겨 주실 것 아니냐?
너는 보았느냐?
수건을 두르시고 무릎 꿇어 대야물에 푹 적신 주님의 손을..
주님, 이제사 알았습니다.
주님이 그리도 방심했던 나를 향해 얼마나 긍휼의 눈물을 흘리셨는지를..
주님이 내 발을 씻겨 주시기를 얼마나 그렇게도 즐거워 하셨는지를..
주님이 얼마나 내 발을 감싸서 매번 어루만져 주고 싶어 하셨는지를..
아, 그런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숨어 있었습니다.
방심이 올 때마다 내게는 고통이었습니다.
내 속의 바알 때문에 순간순간 한숨 지었습니다.
주님, 바뀐 제 기도를 들어 주옵소서.
주님, 이제부터 더러운 제 발도 드리겠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제 속의 바알, 제가 만든 못된 바알을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 내어 놓겠습니다.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말씀하신 주님,
제 신발을 벗고 양말도 벗겠습니다.
저를 감싸고 있는 가식의 틀을 모두 치우겠습니다.
맨발로 주님 앞에 서겠습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무릎 꿇겠습니다.
주님, 저를 고쳐 주옵소서.
방심으로부터 중심으로 다시 돌이키게 하옵소서. 아멘.
3부: [QT삼하11장] 아, 중심..
본문: 삼하 11:1-27
붙잡은 말씀:
2절 저녁 때에 다윗이..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지라
4절 더불어 동침하매
느낌 및 묵상
다윗의 실패는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2절의 말씀에서 그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이라는 화살을 맞았다. 하와가 맞은 화살과 비슷한 종류였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3:6) 평상시의 다윗이라면 이러한 사단의 화전이 겁날 것이 없었다.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으로 툭탁툭탁 쳐버리면 끝날 문제였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다. 백성과 군사들은 얼마나 바쁜지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같이 모두가 전쟁에 매달려 있는 상황에서, 다윗만은 망중한의 오수를 즐겼지 않은가? 오히려 심심하고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신나는 일이 없을까? 그동안 주로 내적 관심과 정치적 현안에 빠져 있던 다윗은 오랜만에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다. 그가 거니는 왕궁 뜰은 새로울 것이 없었다. 영적 피로감이라고나 할까? 그동안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깥 백성들은 뭘 하고 지낼까? 멀리 바라다 보이는 집들 사이.. 그의 눈이 갑자기 커진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본 것이었다. (이후 생략)
다윗의 문제는 바깥이 아니었다. 그의 문제는 그의 내부에 있었다. 중심이 요동하여 중심의 끈을 놓진 방심.. 중심에서 멀어져 흐트러진 방심.. 이것이 문제였다. 그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하고 세상을 향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다윗은 4절(더불어 동침하매..)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2절에서 실패한 것이다. 그의 간음죄는 동침이라는 결과에서 온 것이 아니라, 밧세바를 봄으로 인한 음욕으로부터 온 것이다. 동침은 음욕의 결과 내지는 음욕의 열매이다. 음욕이라는 죄의 소원이 진정한 문제였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에게 가르쳐 주신 죄의 본질이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28)
다윗은 이후 여러 단계에서 자신의 죄를 어떻게든 회복할 길이 있었던 것처럼 보여진다. 1) 사람을 보내어 누구인지 알아 봄, 2) 밧세바를 데려오게 함, 3) 밧세바와 동침함, 4)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앎, 5) 우리야를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임, 6) 우리야를 전장의 최전방에 서게 하여 전사시킴, 7) 우리야가 죽은 직후 밧세바를 아내로 삼음, 8) 밧세바가 아이를 낳음.. 아, 8단계나 되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도, 다윗은 사단의 올가미에서 탈출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그가 다윗이 아니었던가?
오호통재라, 죄의 능력이여.. 죄의 권세여..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나타날 때까지 죄의 올무에서 한시도 빠져 나오질 못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라고 묻지 말자. 이것이 죄의 권세요, 능력이다. 한번 죄가 왕노릇하면 헤어날 길이 없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자신으로서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다. 죄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 외에는 천하 세상에 다른 방법이 없다.
적용
두가지 관점에서 적용을 한다.
첫째, 중심에서 방심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둘째, 방심에서 중심으로 다시 복귀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먼저, 언제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방안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는 것이다.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언제나 꼭 붙어있는 가지가 되는 것이다. 방심은 말 그대로, 내가 잠깐 방심한 어느 한순간 닥쳐온다. 매일의 삶에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우선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이 내 삶의 최우선순위임을 잊지말자. 주님과의 교제가 매일의 삶에서 이어질 수 있도록 하자. 매일의 새벽기도를 시작한지 보름이 되어간다. 이곳에 있는 동안 새벽기도를 나의 영적 습관으로 삼기로 결단한다.
둘째, 방심이 생겼을 때는 최대한 빨리 돌이키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함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주님께 돌이킴의 은혜를 구하자. 내 더러운 마음의 발을 내어 놓자. 숨기지 말자. 내게는 두가지 길 밖에 없다. 내 안에서 은혜가 왕노릇하지 않으면 죄가 왕노릇한다. 그 중간은 없다. 선으로 악을 이기자.
기도
주 하나님, 감당할 수 없는 크나큰 은혜를 부어 주심에 감사, 감격합니다. 지난 며칠 간은 제게 특별한 은혜의 쓰나미 기간이었습니다. 중심과 방심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기름부음의 은혜가 제 마음 속에 평생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제 마음 중심 속 심비에 영원토록 새겨지기를 원하옵니다. 매일 아침의 기도를 통해, 방심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가장 먼저 주님을 찾겠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제 생의 최우선순위로 두겠습니다. 주님만이 나의 최고, 최선의 가치임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구하옵니다. 주님이 주신 선으로 악을 이기겠습니다. 주님의 통치하심이 제 모든 영역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성삼위 주 하나님의 은혜가 제 속에서 영원토록 왕노릇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