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이름이 촌 스럽다. 어려서부터 국어시간만 오면 왠지 긴장이 되었다. 혹시 철수 이야기가 나올까 보아서였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자기이름이 부끄러워 밤새 우는 벌레의 심정을 나는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문에 이 사이트에서 예쁜 이름으로 아이디를 바꾸고 싶었다 "사라의 웃음"이라는 예쁜 이름으로....
아니 정직하게 나를 들여다 보면 그 예쁜 이름이 탐이 나서 그런 것이 아니였다. 적나라하게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왠지 껄끄러웠다. 좀 멋 스럽게, 좀 우아해 보이게, 좀 고상해 보이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욕심이였다. 사기 당해서 거지중에 상거지가 되어버린 나의 형편과 처지가 뭐가 신난다고 떠들어 재끼고 싶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예쁜이름의 아이디를 열심히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실명이 아닌 "사라의 웃음"으로 나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막 아이디를 바꾸려하는 순간 불현듯 몇일 전의 일이 떠 올랐다. 얼마 전부터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어느 성도님께서 갑자가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이였다. 다시 나올 것을 권유하고 목사님 심방을 받기를 권유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이였다.
대화 중 그녀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 험난한 세월을 지내온 것도 상처였지만 그 고통을 통과하면서 이제 늙그막에 자신의 집 한채도 없는 것이 그리도 한이 되었던 모양이다. 가진 것이 있어야 어깨라도 펴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고착화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성도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모두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였다.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나의 모든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없는지를... 오죽하면 친정집에 얹혀 살아야하는지를... 오죽하면 아이들과 헤어져 있어야하는지를 가감없이 설명하였다.
갑자기 표정이 밝아지는 그녀, 목사님의 심방을 받음은 물론이며 자신이 식사준비도 하겠다고 대답을 한다. 나의 없음이 그녀에게 위로가 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의 힘의 원리가 교회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던 듯 싶다.
그 일을 생각하며 아이디 새로고침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의 적나라한 모습이 혹여라도 어느 분에게 위로가 될 수가 있다면 그 길을 택하고 싶었다. 촌 스런 이름이지만 혹시라도 기억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처럼 곤혹스런 현실 속에서 십자가의 사랑 하나로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 드리고 싶었다.
너무나도 보기 좋습니다
내 삶의 모습이 고통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길을 택하여
실명으로 하겠다는 말에 박수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