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열왕기상 18:41-46

내용 요약
은혜의 대표자 엘리야는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이를 응답해 주신다.

붙잡은 말씀
41절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42절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4절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46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느낌 및 묵상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능력의 예언자요 큰 믿음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중보자이기도 했던 것 같다. 본문도 중보하는 사람으로서의 엘리야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중간자로서, 대언자로서, 또한 중보자로서의 위치에 서 있었다. 이는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과 같은 것이 아닐까? 구약의 두 대표자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 상에 나타났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서 뽑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무엇의 대표자인가? 엘리야는 은혜의 대표자로서 선택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율법과 은혜를 동시에 완성하신 분이 아니신가?

엘리야가 은혜의 대표자라고 한다면, 그 주요 이유로서는 단연 그가 중보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는 비를 내리지 않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다. 기적이 무엇인가?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리지 않는 것이 기적이자 은혜이다. 왜 가뭄이 시작되었나? 후대 역사가들은 아합왕의 정치적 치적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만들었고 그 시대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다. 외국의 문물이 거침없이 들어왔고, 왕비를 이방여자 이세벨로 맞는 등 외교적 수완도 남달랐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 큰 해악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스레 이스라엘의 여호와 신앙이 위협받기 시작했다. 여호와와 바알이 동등한 경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영적으로 볼 때 통탄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어찌 이를 가만히 보고 계셨겠는가?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전역에 가뭄의 재앙을 선포한다. 여기에 주님께서 성도와 비성도 간에 다르게 대우하심을 본다. 비성도는 죄악 속에 뒹굴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롬1:24,28). 그것 자체가 주님의 형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도는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도록 때리고 연단하고 일깨우신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가뭄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기적이다.

3년반(눅4:25)의 가뭄 기간 동안은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진다. 전반기에 엘리야는 편한 마음으로 그릿 시냇가에 머물면서 까마귀가 물어오는 음식으로 공궤를 받았다. 가뭄의 후반기에 그는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 사르밧에 사는 이방여인, 그것도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며 그는 기나긴 중보의 씨름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전반기는 시냇물이 말라버릴 시간이므로 길게 잡아야 1년 이내일 것이다. 따라서, 후반기 그의 중보기도는 최소한 2년반 동안 지속되었으리라. 왜 엘리야가 은혜의 대표자인지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사르밧 과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엘리야를 만난 것이 전적인 은혜가 아닌가? 예수님이 수가성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처럼,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의 집에 들어가서 그 가정을 가뭄에서 건져 주었다.

엘리야의 중보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외적으로는 은혜의 단비를 하루속히 부어주십사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면의 실질적 기도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중보가 아니었을까? 갈멜산의 대결에서 이것은 확실해졌다. 이스라엘 백성의 근원적 죄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양다리 걸치기가 아닌가? 여호와도 믿고, 바알도 믿고.. 그들에게는 더 많은 신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돈과 재물의 신이다. 세속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신이지 않는가? 좋은게 좋은 거지.. 다다익선, 여호와도 좋고 바알도 좋고.. 그러나 진실은 무엇인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리라.” (마6:24)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엘리야에게도 옮아간다. 엘리야의 지리한 중보기도는 이렇게 시작되었으리라. 엘리야가 왜 낙타무릎이 되었을까? 본문의 반나절 짧은 기도로 그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의 기도는 사르밧에서 지내는 기나긴 가뭄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이어져 왔을 것이다. 아, 이스라엘을 위한 그의 눈물과 통곡이 들리는 듯 하다. 모세의 중보와 같이, 엘리야는 지난 2년반 동안 한결같이 이스라엘의 회개와 돌이킴을 위한 중보기도를 올려드리지 않았겠는가?

42절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라는 말씀.. 언젠가 들은 기억이 있다. 무릎 기도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면 낙타무릎이 된다. 낙타무릎의 특징은 양 무릎 사이가 오랜 기도로 자연스레 벌어져 얼굴이 그 사이로 들어가는 무릎이다. 이 낙타무릎이 엘리야의 무릎이다. 그의 무릎기도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19장에서 여러 차례 표현한 ‘여호와를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열심은 단순한 열정이나 열성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특심이었다! 오직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유별난 열심, 그것이 특심이 아닐까?

물론 이 특심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그에게 주어진 것이리라. 그러나 그 특심이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특심이 아니라 자가발전된 특심으로 변질되었다면?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 없이 자기만 열심을 낸 특심으로 바뀌었다면? 이것이 19장의 주제인 것 같다. 아무리 은혜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은혜의 원천인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변의 환경과 자신의 의만을 바라본다면, 은혜는 간곳 없고 절망과 시험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차원에서, 엘리야는 19장에서 새롭게 주님을 만나며 또 한 단계의 믿음의 도약을 하게 된다. 아무튼 지금은 하나님이 주신 특심으로 엘리야는 낙타무릎이 되기까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그의 낙타무릎을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 아합을 위한 중보기도를 하나님께서 어찌 들으시지 않으셨겠는가?

은혜의 대표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혜 주심을 갈구했다. 은혜의 단비를 온 이스라엘 땅에 촉촉히 내려 주시기를 간구한 것이다. 하나님은 18장1절에서 비의 응답을 엘리야에게 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갈멜산 대결을 통해서 승리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스라엘에 선포하셨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18:39) 아합을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이에 동의한 결과로, 엘리야는 450명이나 되는 바알 선지자들을 일거에 진멸할 수 있었다. 엘리야는 이 승리함을 통해서 이미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그의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 아닌가? 가뭄의 원인은 이미 해소되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유일신앙을 회복하였다. 이제 은혜의 단비를 내리시지 않을 이유는 모두 제거되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린 엘리야는 큰 비의 소리를 심령적으로 이미 들은 것이었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기도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은혜의 빗줄기 소리를 이미 믿음 가운데 확신한 엘리야는 단지 하나님의 때를 묻는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 이전까지 단비를 달라고 안타깝게 드렸던 부르짖음의 기도와는 달리, 이제는 고요히 비를 주실 하나님의 때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기도가 아니었을까? 그것은 사환이 계속해서(일곱번씩) 바다 쪽에 구름이 올라오고 있는가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리라.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급하게 응답 주시고 은혜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2년반을 기도해 왔던 엘리야의 지금 반나절 기도는 정말 식은 죽 먹기가 아니겠는가? 아, 믿음의 기도! 아, 은혜의 단비!

믿음이 무엇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11장에서 믿음을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가 아닌가? 엘리야의 기도에서 믿음의 증거는 단계적으로 나타남을 본다. 1단계는 듣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10:17) 심령적으로 주의 음성을 들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큰 비의 소리를 엘리야는 들었다. 2단계는 보는 것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11:1)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눈은 바라는 것들을 실제로 보이게 한다. 주님의 설계하심에 따른 최초의 씨그널(Signal).. 그 씨그널, 덧칠하기 전의 그 밑그림을 보는 것이다. 엘리야는 사환을 통해서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았다. 그리고 그 구름을 본 순간 그는 기도를 멈췄다. 하나님의 응답이 이루어졌고, 그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엘리야의 기도는 이것이 전부였는가? 아니다. 또 하나의 다른 기도 내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합을 위한 기도였다. 46절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이 얼마나 놀라운 기사인가? 엘리야가 마라토너가 되었다는 얘기다. 갈멜산에서 아합의 왕궁 이스르엘까지의 거리는 60km 정도라고 한다. 그 먼 거리를, 앞이 한치도 안 보이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씨 가운데서 엘리야는 달려갔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합 앞에서”, 즉 아합을 태운 마차 앞에서 그는 이스르엘로 가는 길을 앞서 달리며 가이드를 해 주었던 것이다.

왜 그가 갑자기 마라톤을 하며 아합의 가이드가 된 것일까? 하나님이 가만있는 엘리야를 느닷없이 강압적으로 시키신 일일까? 낙타무릎을 하고있는 엘리야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노쇠한 나이에 뜀박질 당하는(?) 엘리야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나는 이 사건 뒤에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힘과 능력을 주신다. 엘리야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그를 뛰게 하셨을까? 분명 이것은 엘리야가 자청해서 구했을 것이다. 기나긴 중보의 기도가 응답의 결실을 맺는 오늘, 엘리야는 지도자 아합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 아합의 일정은 오늘 왕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평상시 같으면 쉬운 길이지만, 극심한 폭우가 내리는 오늘은 자칫하면 길을 잃고 낭패를 보지 않겠는가?

그의 중보는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아합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보다도 아합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중보했던 것이리라. 그러기에, 그곳 지세와 형편을 잘 아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겠는가? 그의 기도 내용이 이렇지 않았을까? “주여, 은혜의 단비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한가지 더 간구하옵나니, 우리의 지도자 아합이 길을 잃지않고 수월히 그의 처소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필요하시다면 길을 잘 아는 저를 써 주소서. 제가 기꺼이 앞장 서겠나이다.” 아, 아름다운 엘리야의 마음을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않았겠는가? 어찌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겠는가?

마라토너 엘리야, 그는 위대한 중보자이자 은혜의 대표자였다. 주님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고, 그 주님의 마음을 따라 믿음의 무릎으로 기도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주님과 영적으로 교감하며 교제하는 ‘사귐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닐까? 그를 통해 중보신앙, 비젼신앙, 사귐신앙을 배우고 싶다.


적용 및 기도

엘리야의 중보신앙을 닮게 하옵소서
- 엘리야를 닮아 중보의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 엘리야에게 은혜로 주셨던 특심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 침상에서라도 무릎꿇는 기도를 시작하겠습니다.

엘리야의 비젼신앙을 닮게 하옵소서
- 엘리야가 가졌던 비젼의 믿음을 제게도 주시기 원합니다.
- 제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씨그널을 보기 원합니다.
- 날마다 허락해 주시는 기적의 삶을 누리고 체험해 가겠습니다.
  
엘리야의 사귐신앙을 닮게 하옵소서
- 엘리야가 체험했던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기 원합니다.
- 주님을 향한 사귐의 깊이와 영성이 더해가기 원합니다.
- 주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더 알아가겠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을 담아 기도합니다. 제 온맘을 얹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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