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로마서 8장 QT

본문 : 롬8:1~17

요약 : 주님의 은혜를 입어 정죄함으로부터 해방되고 새롭게 빚진 자 된 나는 육신대로 살지 않고 영으로 살게 된다.

붙잡은 말씀
1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느낌 및 묵상

로마서 8장 말씀은 작년 특새의 주제가 되었던 말씀으로 묵상할 때마다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여기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영이냐, 육이냐? 그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 적당히 눈치보며 중간에 설 수가 없다. 외통수라 피할 길도 없다. 금번 QT에서 내가 붙잡은 단어는 정죄함과 빚진 자이다. 왜 바울 사도가 정죄함이 없는 것에 대해 그렇게 강조했었고, 또한 빚진 자는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이번 묵상의 촛점을 맞추었다. 아, 무궁한 말씀의 창들이 열림을 본다. ㅋㅋ 빚쟁이 삼총사와의 진검승부를 위해 나도 말씀의 칼을 차자.

먼저 빚진 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12절의 문맥을 보면, 빚진 자가 여기에 처음 나오는 단어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전에 명시되어 있기에, “우리가 빚진 자로되..”라고 얘기한 것이다. 앞장을 찾고 또 찾아보니, 한참 앞에 드디어 그 단어가 나옴을 본다. 제일 앞장인 1장에서였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초두에서 바울은 자신이 빚진 자라고 선언하면서 로마서를 전개했음을 본다. 도대체 바울이 누구에게 빚진 자가 되었을까? 헬라인, 야만(인), 지혜있는 자, 어리석은 자-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결국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라는 얘기 아닌가? 왜 하나님께 빚졌다고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빚졌다고 했을까?

이런 의문을 염두에 두고 빚진 자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통상적 의미의 빚은 돈 거래를 함으로 발생한다. 돈을 빌려 받을 때 빚이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얘기하자면, 빌려 주는 자를 채권자(Creditor)라고 하고, 빌려 받은 자 또는 빚을 갚아야 할 자를 채무자(Debtor)라고 한다. 채권자와 채무자 간에 해결해야 할 것이 빚(Debt)이다. 빚진 자라는 말은 채무자가 되었다는 얘기다. 바울은 스스로 자신을 채무자라고 고백한다. 그것도 헬라인, 야만인, 지혜있는 자, 어리석은 자 모두에게 말이다. 빚이라는 성경적 개념과 바울의 말뜻을 알기 위해서는 결국 로마서 전체를 훑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빚은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문제임을 쉽게 알 수 있지 않은가? 복음서에 비춰본 빚은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에서 명확히 드러나 있다. 마태복음 18장과 누가복음 7장에 나온다. 마18장에서는 일만 달란트의 큰 빚을 탕감 받았음에도, 백 데나리온의 적은 빚진 동관을 용서해 주지 못한 악한 종이 나온다. 눅7장에서 예수님은 빚을 탕감받은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셨다. 어느 채권자가 500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50 데나리온 빚진 사람 모두에 대해 탕감해 주었다면,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당연히 많이 탕감받은 자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비유의 공통점은 ‘탕감 받음’에 있다. 그것도 채무자의 변제 능력이 없음에도, 채권자가 ‘임의로’ 거액의 빚을 탕감해 주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채무자와 채권자가 누구인지 확연해짐을 느낀다. 채무자는 나이고, 나의 채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당해야 할 것은 나의 죄로 인한 심판이다. 왜냐하면 죄는 하나님께 짓는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청산해야 할 나의 빚이다. 나의 죄가 크면 클수록, 나는 청산해야 할 빚이 그만큼 더 많아지게 된다. 아, 나는 죄라는 거대한 빚더미 위에 망연자실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채권자인 하나님 앞에 철저한 파산자요 금치산자이다. 나로서는 나의 죄를 변제할(깨끗케 할) 능력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이 얘기로 끝인가? 아니다. 복음은 쏠루션(Solution)이다. 채권자인 하나님께서 친히 나의 빚을 아무 조건없이 탕감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와 같이, 채무자인 나의 의지와 노력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내가 갚아야 할 죄값(빚)을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내가 아직 원수되었을 그 때에(롬5:10), 하나님 자신이 나를 대신하여 내 죄값을 완전히 치루시고 “이제 네가 갚을 빚은 없다.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예수 십자가의 의미가 아닌가?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채권자 하나님의 위대한 선언 앞에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냥 그 선언을 받아들이기만 했지 않았는가? 그 복음의 소식을 접하고 무릎꿇음으로, 감사 감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구세주로 인정하고 모셔들인 것이지 않은가? 내가 한 일은 그외에 더 없었지 않은가? 나의 능력, 의지, 노력은 내 빚 청산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전적으로 채권자의 일방적 선언과 배려하심에 의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은혜라고 말하지 않은가? 은혜이되, 99%의 은혜가 아니라 100%의 은혜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내가 더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십자가 복음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게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8장1절의 위대한 선언문을 체택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아, 채무자이자 파산자인 나에게 결코 한 톨의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다. 정죄는 무엇일까? 내게 있어 정죄는 내 죄값을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빚을 청산하는 절차이다. 정죄의 최후 일정이 바로 심판이 아닌가? 그런데, 십자가 복음의 은혜는 정죄를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빚에 대한 모든 청산이 십자가 상에서 이미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십자가 은혜로 나의 죄값, 즉 나를 향한 정죄는 완결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요체가 아닌가?

그런데 세상사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이미 완결된 빚 청산에 중간에 끼어들고 찝적거리는 제3자가 있음을 본다. 쩝.. 뭔가 중간에 서서 슬쩍 어부지리를 취하려는 심보가 아닐까? 다 끝나버린 나의 죄에 대한 정산을 다시 하자고 달겨드는 못된 선수들(!).. 이들은 최후 정산이 아직 남아 있으니, 자기하고 중간 정산이나 해 보자고 난리다. 그때그때 기회를 보아 나의 죄값을 두고 치근덕(?) 거리며, 내게 정죄의 화살을 쏘아 보낸다. 바울은 확신있게 이들의 음모(?)를 폭로한다. 나는 로마서에 나오는 이 못된 세 선수들이 율법과 양심과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단이야말로 진정 못된 원수이고, 율법과 양심은 일반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나를 정죄의 사슬로 몰아간다는 관점에서 (나에게!) 못된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들을 ‘빚쟁이 삼총사’라고 부르고 싶다. 채권자도 아니면서 채권자인양 행세하고, 내게 빚 독촉하고 눈 부릎뜨며, 독설과 으름장과 협박에.. 삼총사의 좌우 스트레이트와 훅, 어퍼컷으로 돌림빵을 당할지면, 내 몸은 어느새 만신창이 그로기 상태가 된다. 아, 그렇게도 나를 못살게 굴었던 지긋지긋한 빚쟁이 삼총사여..

빚쟁이 삼총사의 첫째, 율법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율법은 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정해 주신 도덕율이다. 그러기에 율법은 선한 것이며, 나를 비추이는 거울과 같다. 나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여과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율법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보면 내가 얼마나 비참하고 악독한 죄인인가를 금새 알 수 있다. 율법이라는 거울은 뽀샵 기능이 없다. 그러니까 율법의 사전에는 ‘봐주기’나 용서라는 단어가 없다.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율법은 준엄한 정죄함의 채찍으로 나를 사정없이 내려친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그러나, 죄성으로 가득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율법의 끝없는 정죄함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율법이라는 남편과 결혼한 나는 평생 그 지겨운 남편 등살에 편히 발뻗고 잘 날이 하루도 없었다.(롬6:1-2)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길이 내 스스로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나 그것은 나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몽학선생이었다.(갈3:24) 다른 말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는 율법이 더 이상의 역할을 내게 해 줄 것이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친히 육체로 오셔서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그분을 모셨기 때문이다. 율법의 완성자께서 내 주인 되시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율법이라는 남편에게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롬7: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율법은 더이상 나를 정죄할 수 없다.

삼총사의 둘째, 양심(良心)은 한자말 그대로 내 속에 있는 ‘어진 마음’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양심은 원래 ‘선한 마음’은 아니다. 본래부터 내 안에 선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롬3:12) 사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양심이 화인맞은 상태 그대로 있다.(딤전4:2) 하나님이 저희를 그 상실하고 더러운 상태대로 내어 버려두셨기 때문이다.(롬1:24,28) 그렇지만 양심을 가지고도 ‘어느 정도’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는 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롬2:15) 따라서 양심의 증거 자체는 선한 것이다. 양심의 가책 자체도 본질 상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양심은 나를 죄에서 깨끗케 해 줄 수도 없고 구원해 줄 수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양심도 율법과 마찬가지로 나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일 뿐이지 않은가? 구원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내 양심이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을 온전히 좇을 때에만이, 나는 그제서야 ‘선한 양심’(딤전1:5, 벧전3:16, 히13:18)을 소유할 수 있다. 양심만을 따르다 한많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가룟 유다가 대표적으로 이를 보여 주었지 않은가? 그의 후회스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27:4) 그러기에 양심은 좋은 것이로되, 그 정죄함 속에는 독이 있는 것이다. 아, 그는 양심의 정죄를 넘어, 돌이킴의 참회개를 해야 했었다. 스승을 팔아먹은 유다나, 스승을 모른다고 세번 부인한 베드로나, 주님 앞에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주님 앞에 무릎 꿇음.. 이것이야말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근원적 차이가 아닐까? 그러므로 내 양심의 소리에 기울이기 보다는, 성령님의 세미한 소리에 내 귀를 진정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삼총사의 총수이자 셋째, 사단은 정죄함의 최후 조종자이다. 사단의 다른 이름은 유혹자와 참소자이기 때문이다. 유혹자로서의 사단은 하와를 유혹함으로써 이 세상에 죄를 들여놓은 원흉이다. 그의 유혹은 오늘날 나에게도 동일하게 끊임없이 나의 약한 부분을 통해서 공격해 들어옴을 본다. 사단의 또 다른 역할은 참소하는 것이다. 욥에게 주어진 시련은 사단의 참소함으로 시작되었지 않은가? 사도 요한은 그러한 사단을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계12:10)라고 묘사하고 있다. 유혹의 패턴이 그러하듯이, 사단의 참소는 교묘하게 선을 가장하고 내게 다가온다. 앞에서 나온 율법과 양심은 그가 가지고 노는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나의 약한 곳과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찌름으로 정죄한다. 때론 율법의 준엄함을 무기로, 때론 내 양심의 찔림을 무기로, 그는 시시각각 야금야금 나를 물어뜯는다. 그의 권세는 이 세상을 사로잡을 만큼 거세다.(엡2:2) 우는 사자와 같이 맹렬하게 나를 삼키려고 달려든다.(벧전5:8) 이 사단의 집요하고 막강한 정죄를 이길 힘이 나 스스로에게는 없다. 나는 구원 이후로도 연약한 죄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몰래 절로 절망의 탄식이 나온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할렐루야.. 그러나 내게 사단이 주는 절망은 없다! 그 절망의 수렁에서 즉시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이 내게 주어져 있지 않은가?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참소자 사단의 최후(창3:15, 정수리가 박살나는..)를 내가 이미 보았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유일한 해답이시다. 주님께서 내게 이길 힘을 주신다. 사단의 정죄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십자가로 돌아가 방어하고 대적함으로 가능하다. 롬8장1절 말씀이 사단의 정죄를 대적할 수 있는 큰 무기라고 생각한다.

이제 빚진 자로 다시 돌아가 본다. 이같이 율법, 양심, 사단의 빚쟁이 삼총사들이 빚 청산하자고 시시때때로 보채지만, 내 빚은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다 지불하시고 청산해 주셨다. 이제 바울이 얘기한 빚진 자의 의미와 의도도 어느 정도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는 왜 자신을 헬라인, 야만인, 지혜있는 자,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라고 했을까? 그가 말한 빚진 자의 진의를 다시 한번 묵상해 본다. 그는 빚진 자의 여러 단계들을 거친 후 최후적으로 얘기한 것이 아닐까? 바울이나 나나 진정한 의미에서는 이제 더 이상 빚진 자가 아니다. 채권자인 주님께서 이미 내 빚을 다 탕감해 주셨으니, 나는 빚진 자가 아닌 참 ‘자유자’가 된 것이다. 그러기에 바울도 자신을 자유자(고전9:1)라고 선언했지 않은가?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바울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주님께서 빚을 탕감해 주심에 따라, 그는 또 다른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 안에서 빚진 자에게는 빚진 자의 새로운 단계가 있음을 본다.

1단계는 주님이 채권자인 빚진 자이다. 그런데 채권자인 주님이 내 빚을 다 탕감해 주셨다. 이제 나는 빚이 없는 자유자가 된 것이다. 반면에 나는 다른 의미의 빚을 졌다. 빚 탕감은 내 능력과 의지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주님께서 이루신 복음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자임에도 여전히 주님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2단계의 빚진자라고 생각한다. 1단계가 ‘법적으로’ 빚진 자라고 한다면, 2단계는 실제 자유자이지만 기꺼이 ‘마음으로’ 빚진 자가 되는 것이다.

2단계를 다시 세가지로 세분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2-1단계는 은혜가 채권자인 빚진 자이다. 물론 그 은혜의 주인은 여전히 주님이시고, 그런 의미에서 주님도 여전히 나의 채권자이시다. 채권자로서 은혜는 내 안에서 ‘왕노릇’하여, 죄와 사망이 내 안에서 다시는 왕노릇하지 못하도록 나를 다스리신다.(롬5;21) 2-2단계는 복음이 채권자인 빚진 자이다. 내게 주신 은혜의 핵심 멧시지는 복음이다. 따라서 나는 은혜의 복음에 빚을 진 것이다. 나아가, 복음의 원주인인 주님에게도 당연히 빚진 자가 되는 것이다. 복음은 채권자로서, 빚진 나에게 복음 전파를 명령한다. 이것이 2-3단계의 빚진 자이다. 그래서 바울은 최종적으로 선포한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나는 복음의 빚을 진 것이다. 즉, 채권자는 나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2-3단계 빚진 자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주님 안에서 나는 진정한 자유자일뿐 아니라, ‘새롭게’ 빚진 자이다. 바울과 같이..

(빚진 자의 단계적 구도를 표로 정리해 본다.)
.               채권자              채무자                   빚의 내용
1단계        성삼위하나님      죄인으로서의 나      나의 죄값을 치룸
2-1단계     은혜(주님)         자유자로서의 나      은혜가 내 안에서 왕노릇함
2-2단계     복음(주님)         구원받은 나            복음의 능력 안에서 삶
2-3단계     나의 이웃          중보자로서의 나      복음을 전파하는 삶


적용

그러면, 새롭게 빚진 자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해답은 본문에서 밝힌 대로, 영과 육의 대립에 있다고 생각한다. 육신을 좆지말고 영을 좇아야 한다. 이조차도 내가 스스로 하려고 한다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빚쟁이 삼총사는 지금도 호시탐탐 나를 노리고 있지 않은가? 나의 출발, 나의 노력, 나의 영광을 내려놓자.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순종함으로 무릎 꿇을 때, 나는 자연스레 영을 좇을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요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주님의 말씀이 내게 곧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할렐루야, 내게 성령님이 내주해 계심을 찬양한다. 자유자로서 나는 빚쟁이 삼총사로부터 자유해 졌고, 새롭게 빚진 자로서 나는 은혜와 복음의 빚(그리고 빛^^) 속에 거하며, 내 이웃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간다. 나의 적용- 주님, 이 고백대로 살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살겠나이다..


기도
주 하나님, 제가 성삼위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한 채무자임을 고백합니다. 빚쟁이 삼총사의 빚 독촉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정죄함이 없는 참자유를 주시니 감사합니다. 행복하기 때문에 제게 주신 자유를 누리지 않고, 바울처럼 계속 빚진자가 되겠습니다. 은혜와 복음에 새롭게 빚진 것이 제 기쁨과 소망이 됩니다. 아울러, 나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의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부: 빚쟁이 삼총사 관련 나의 간증

정죄함으로부터의 자유는, 1979년 제가 주님을 영접한 이후에 맛본 큰 기쁨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함의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때때로 내게 찾아오는 곁길로 감과 넘어짐이 있을 때마다, 나는 곤고한 자가 되어 바울과 같이 외쳤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이는 내 외적 죄의 행위라기 보다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이 살아나며 드러내어지는 내 육신의 추한 욕망으로 인한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빚쟁이 삼총사의 정죄에 치이고 고통받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에 워치만 니의 영성 책자에 몰두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감명깊게 읽었던 책이 “율법과 은혜”였습니다. 워치만 니에 의하면, 율법에서 은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뭔가 신비적 체험을 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한때 그 드라마틱한 체험을 하기 위해 기도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믿음의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신비적 체험이나 기적적인 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주님의 이루심을 바라보고, 감사 감격함으로 이를 믿고 받아드리는 고백이면 족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똑같은 경험을 체험했음을 봅니다. 로마서 7장 24절의 절망에서 8장 1절의 위대한 선언으로 이어짐을 봅니다. 그 중간에, 그가 발견한 해결책을 그는 숨김없이 드러냅니다. 7장 25절이 그 해결점이었습니다. 아, 주 예수 그리스도.. 그가 찾은 해답이었습니다. 그에 따라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 이어서 힘차게 쏟아져 나오는 정죄함이 없다는 8장의 선언.. 어디에도 신비한 구석은 없었습니다. 나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이리 쉬운 것을 그동안 얼마나 어렵게, 오랜 동안을 헤메었던지..

그것은 1995년 웨이브 4기 시절의 어느날,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제게 주신 단순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아래 두가지였습니다.

첫째, 주님을 영접한 이후의 내 삶의 실상과 허상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말씀이 내가 180도 바뀌어 ‘착한 사람’이 된 것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새것이 된 것은 맞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영접함으로 죽었던 내 영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 영의 중심에 성령님께서 또한 내주하시게 된 거지요. 그러나 한편으로, 내 마음, 특히 내 마음 중심에 있는 죄성은 사라지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사실! 이것을 제가 간과했던 것입니다. 내 죄성(Sinful nature)은 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나의 ‘연약함’ 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지저스 슈퍼스타’라는 그룹 안에 들어감으로, 나는 스스로 ‘선한’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내 속에 있는 그 연약함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 연약함을 애써 부인하고 잊어버리려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영과 육이 동시에 존재하며 싸우는 ‘영적 전쟁터’가 된 사실을 짐짓 모른체 한 것이지요. 나는 그저 무조건 선하며 또한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내 스스로 선함과 강함의 ‘슈퍼스타’가 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 주님 안에서는 본래부터 슈퍼스타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허상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된 노력과 믿음과 기도와 열심이었습니다. 그 주님조차 내 강함의 도구로 쓰고자 했던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도다..(전12:8) 아, 주님이 없는 내 모든 것은 헛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롬7장의 주제요, 크리스쳔의 삶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둘째, 이 영적 전쟁을 이길 수 있는 비결입니다. 바로 그것은 내 연약함의 대표자인 죄성, 즉 내 옛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옛사람이 짐짓 죽었다고 예전에도 생각했으나, 이것은 나의 착오였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만’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죽일 수 없습니다. 이같이 육(肉, 헬라어 Sarx, 영어 Flesh)으로 표현되는 나의 옛사람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례를 받았을 때, 이미 보여주신 표징이었습니다.(롬6:1-7) 법(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가 나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롬6:14) 저는 이것을 ‘마음의 죽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죄성이 활동하는 그 장소가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자아의 죽음이라고도 합니다. 예수 십자가에 내 마음(죄성)이 같이 죽을 때만이, 비로소 나는 영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순서는 바뀜이 없습니다. ‘나’의 죽음이 먼저고, 영적 삶이 나중입니다. 영적 시련과 분투의 롬6장과 7장이 먼저 나온 연후에, 승리의 8장이 이어집니다. 십자가가 먼저요, 부활이 그 뒤를 따릅니다.

롬7:24에서 표현한 그 절망의 바닥에서,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 바라 보았습니다. 십자가가 나의 유일한 해답이요 소망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게 있어서, 끝을 알 수 없는 절망의 바닥으로부터 헤어나오는 유일한 길은 예수 십자가, 그 십자가를 부여잡고 주님이 지고가신 골고다의 언덕을 나도 오르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 주님께로의 진정한 '회귀(回歸)'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내려 놓습니다. 내 모든 것을 속속들이 포기합니다. 내 마음 깊은 곳의 착한 소원까지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눈물의 고백이 나옵니다. 만물의 찌꺼기보다도 못한 나를 그럼에도 이토록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격합니다. 그토록 모질게 괴롭혀 왔던 내 마음 중심에 있는 나의 죄성을 십자가 앞에 내어 놓습니다. 못을 박습니다. 그리 씨름했던 마음이 십자가 앞에서 저항하지만, 주님의 십자가 능력으로 죽어갑니다. 승리의 선언을 하신 주님을 따라, 나는 '마음의 죽음'이라는 새로운 해방으로 비상합니다. 고운님, 하늘님(성령님)은 '마음이 없는' 나를 보듬으시사, 한무리 빛과 같이 내 속 깊은 곳(속사람)으로 오십니다..

빚쟁이 삼총사는 늘 제 뒤를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그들은 제가 잘못될 때마다 그 즉시 청구서를 가차없이 내밉니다. 중간정산, 즉 정죄의 청구서였습니다. 마음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로, 저는 빚쟁이(특히, 사단)의 청구서가 하나도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별것 아닌 휴지조각(!)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정죄의 화살을 쏘아대도 따갑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은 나무토막과 같기 때문이지요. ㅋㅋ 시체가 고통을 알까요?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마음의 죽음은 일회성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 일상 속에서 또한 매순간 일어나야 하는 일과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주님 안에서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해야 하겠습니다.(고전15:31) 마음의 죽음을 깨달음으로 제 삶의 질이 달라졌습니다. 나의 중심이 그리스도로 옮아감을 체험합니다. 때로 쓰러질 지라도, 마음의 죽음을 선언하며 나는 쉽게 일어섭니다.

이 경험을 노래한 것이 이전에 올렸던 아래 ‘마음의 죽음’이라는 시였습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지요? 제게 주신 은혜가 너무 많다보니, 제 글도 이렇게 길어졌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삭망의 밤,
나는 그렇게 절망의 나락에서 나옵니다.
휘이적 휘이적
내 등뒤 십자가는 왜 그리 무거운지
기나긴 언덕길 허덕이며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빛 한점 없는 민둥산의 산정에서
나 홀로 낮아짐으로
가로 세로 놓여진 그 십자가에
내 마음을 얹습니다.
꽝, 꽝, 꽝..
세 개의 대못이
양 손목과 발목에 박힙니다.

누운 십자가는 내 마음을 안고
하늘을 향해 일어섭니다.
한 분 십자가의 죽음을 따라
내 마음도 같이 죽어갑니다.

그리 씨름했던 마음이
살려달라 떼쓰듯 애걸합니다.
절규의 피를 흘립니다.
한없이 부서져 갑니다.
아스라한 여명의 빛이 스밀 때까지..

고요함 가운데 한 소리 들립니다.
다 이루었다..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했던 성전 휘장이
한순간 갈라짐같이
유혹자의 텃밭이었던 내 마음이
죽음에의 해방으로 비상합니다.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
마음의 죽음으로
나는 그렇게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씁니다.

그토록 한스런
마음의 죽음으로
이제사
고운 님 하늘 님
한무리 빛 되어
내 속 깊은데로
함박 오십니다..

김순희

2010.05.04 13:34:45
*.160.176.34

이선우님!
정말 받으신 은혜가 너무나 많으신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제 이곳에서 자주 만나 뵐 수 있는 것이지요?
그 은혜를 맘껏 쏟아내시고 우리는 더불어 은혜 받고요~~

그런데 어쩌면 글을 그렇게나 잘 쓰셔요?
에~~휴!! 부러버라^^

정순태

2010.05.05 02:21:15
*.75.152.133

이선우 형제님!
몇 편의 이어진 귀한 체험 고백, 잘 읽었습니다.
나날이 깊어지는 형제님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부럽기도 하고요...............
형제님의 깨달음을 보면
그간 배워왔던 종교적 허상들(지금도 기독교라 착각하는 행위들)이 자꾸 서글퍼집니다.
앞으로도 귀한 체험, 많이 나누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이선우

2010.05.05 20:30:04
*.222.242.101

두 분의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가 은혜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실수와 허물도 많답니다.
같은 평신도로서 앞으로도 좋은 교류와 교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글을 잘 쓰지 못하는 편이지만, 일단 끓어오르면(!) 할 수 없이 쓰는 편이지요.
한번 주제나 말씀을 붙들면 몇 주동안 붙들다가 심봤다! 하는 순간에 QT 형식의 글을 파팍 씁니다.
보시다시피, 제 글은 대부분 목사님(별칭 운영자ㅋㅋ)으로부터 사사받은 거라서요.
제 스승님으로 모신다고 했는데 정작 아직 스승님으로부터는 확답(?)을 받지 못했죠.^^
재밌으라고 몇 마디 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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