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 창13장] 롯의 선택, 아브라함의 선택

조회 수 1174 추천 수 23 2010.05.13 15:26:18

본문: 창13:1-18

요약: 떠남과 바라봄에 대한 아브라함과 롯의 상이한 선택이 그들의 인생 경로를 각각 다르게 만들었다.

붙잡은 말씀:
9절 나를 떠나가라   11절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0절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14절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바라보라


묵상 및 느낀점

본문을 읽으면서 두가지 반복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떠남과 바라봄이었다. 그리고 이 두 단어 속에 나타난 미묘한 두 사람의 입장 차이.. 이것은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또한  아브라함과 롯의 향후 인생 경로가 각각 어떻게 달라짐을 예감하고 있지 않은가?

먼저 볼 것은 두 사람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모든 신자들의 모본이요, 믿음의 조상이요,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그릇이었다. 그렇다면 롯은? 롯은 그냥 아브라함만 졸졸 따라다녔던 사람이었을까? 베드로는 이에 대해 명확히 밝힌다. 롯은 의인이었다고. 그렇다, 롯은 의인이었고, 그래서 훗날 소돔성이 멸망되었을 때 그곳에서 구원을 받았던 것이다.(벧후2:6-8)

첫째, 떠남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인생에서 헤어짐은 불가피하다. 회자정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본문의 떠남은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제안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그가 롯에게 떠나라는 말을 꺼냈을 때의 비통한 심정이 느껴진다. 그에게 롯은 친자식과 다름없지 않았을까? 롯은 부친을 일찌감치 여의고, 백부인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따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향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롯도 기꺼이 아브라함을 따라 떠났을 것이다. 그렇게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가나안을 향한 여정을 늘 함께 했다. 애굽도 함께 올라갔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도 롯을 아들처럼 의지하기는 매 한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소유는 엄연히 서로간에 분리하여 운영해 왔다. 그 소유가 많아지다 보니 이제는 피차 헤어질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이 외적인 이유였다.

영적으로 보면 어떨까? 떠남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이지, 롯을 택하신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 택하심은 대를 따라 물림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롯은 아브라함의 후계자, 상속자 또는 후사가 아니었다. 아브라함의 후사는 그 자신의 ‘씨’여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결정사항이었다. 아브라함은 이 부분에 대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깨우쳐 알아야 했다. 그러기에 떠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사만이 아브라함과 함께 거하고, 그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후사라고 오인했던 1) 롯, 2) 그의 종(다메섹의 엘리에셀), 3)여종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 등을 차례차례 떠나 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것으로 끝일까?

떠남은 포기를 의미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자신의 후사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받은 아들 이삭마저 그는 떠나 보내야 했다. 이것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시험이었다. 그는 이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하였다. 그러함으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만이 그의 참 피난처요, 의지할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는 그제야말로 진정한 후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내가 떠나 보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주님 이외에 내가 의지하고 의뢰하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이 명하실 때, 나는 이것들을 떠나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주님 외에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포기는 나의 소유를 포함한다. 소유로 인한 분쟁이 얼마나 많은가? 개인 대 개인, 단체 대 단체, 국가 대 국가간의 셀 수 없는 소유 분쟁이 싸움과 전쟁의 원인이 되어왔지 않은가? 본문도 결국은 마찬가지 아닌가? 둘 사이의 소유가 많으므로 결국 분쟁이 일어나고, 종국적으로는 헤어질 수 밖에 없었지 않은가? 소유가 목적이 될 때는 의인들끼리라도 문제가 생긴다. 소유는 좋은 것이로되, 소유를 내것이라고 주장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문제가 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현재까지도 많은 식자들에게 회자가 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무소유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며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는 다름을 느낀다. 나는 무소유 보다는 비소유를 주장하고 싶다. 말장난 같지만, 무소유는 소유가 실제적으로 없음을 의미하며, 비소유는 소유가 있으되 그 소유를 내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본문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비소유 정신을 묵상한다. 그는 많은 소유를 가졌으되, 그 소유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땅에서 그가 나그네임을 자각했고, 땅의 소유가 아닌 진정한 하늘의 본향을 바랐다고 증언한다.(히11:8-10) 아브라함의 비소유 신앙을 배우자.

떠남의 진수는 별세신앙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별세신앙의 세계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죽음은 세상과의 최종적 이별이다. 매일의 삶에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별세하듯 살아가는 것이 별세신앙의 요체로 이해했었다.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생즉사(生卽死)의 철학, 에스더와 안이숙 여사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은 죽음을 넘어선 내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별세신앙을 화두로 삼았던 이중표 목사는 몇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분의 부음 소식을 듣고 남몰래 눈물 지은 적이 있다. 그분은 암과 뇌종양이라는 절대절명의 상황을 별세신앙으로 이기셨다. 이제 다시 별세신앙의 절절함이 내 가슴에 밀려온다. 떠남의 신앙, 즉 별세신앙을 회복하자. 별세신앙은 세상을 향한 나의 떠남이요, 나의 결별 선언이며, 나아가 주님을 향한 바라봄의 신앙이다.

둘째, 바라봄을 묵상한다.

롯의 바라봄과 아브라함의 바라봄은 근원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어느 것이 능동적 바라봄일까? 어느 쪽이 영적으로 올바른 것일까? 여기서 나는 바라봄의 법칙을 다시 한번 묵상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장 초두의 이 말씀에서 ‘바라는’ 주체는 주님이시라고 믿는다. 내가 바라는 것 또는 그가 바라는 것이 아닌, 바로 주님께서 바라는 것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내가 바라는 것이로되 내가 주님의 눈을 통하여 바라는 것, 이것이 진정한 바라봄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바라보는 것이 바라봄의 법칙이라고 묵상한다.

롯의 바라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 롯의 바라봄은 세상을 향한 바라봄이었지 않은가? 따라서 그의 바라봄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을 여지가 없지 않은가? 롯은 물론 의로운 사람이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만’을 의지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떠나라는 아브라함의 부탁에, 처음엔 그도 당황하고 고사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가 떠나지 않으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소유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의 소유를 완전히 포기하고 아브라함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비소유의 신앙으로 무장한 아브라함에게 그의 모든 소유권을 양도하고, 두 소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과 한 식구, 한 가족으로, 나아가 ‘양아들’로 남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아브라함의 요청대로 떠남의 결정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그의 첫번째 결정이었다. 그의 두번째 결정은 떠나되, 물 많고 살기좋은 요단 동편을 그의 땅으로 택한 것이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10절) 이 결정은 바라봄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바라보되, 세상을 향한 바라봄이었다. 그의 바라봄을 보면서, 나도 수없이 롯과 같은 바라봄을 택했음을 고백한다. 아니, 세상일은 롯처럼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강요받고 있지 않은가? 막말로, 이러한 롯의 결정에 큰 잘못은 없지 않은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판단하여 지혜롭게 결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주님께서 매사마다 일일히 내 결정에 관여하시고 결재하시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떠남이 어쩔 수 없다는 전제하에, 그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롯은 대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 이후의 사건을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다. 그는 요단 동편의 들판을 택했다. 그리고는 그의 가족과 소유를 끌고 점차 소돔을 향하여 다가갔음을 본다. 어느덧 그는 소돔이라는 죄악이 가득한 성내에 정착하여 살게 된다. 그의 본래 업인 목축을 도시 안에 살면서 할 수 있었을까? 결국 그는 성내에 편히 안주하기 위해 본업을 버렸을 것이다. 요단 동편을 택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본업을 버리고 죄악의 도성에 스스로 가서 안주한 것이 잘못이었다는 얘기다. 그는 이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경험했다. 그돌라오멜 동맹군에 포로로 잡혀가 갖은 고생을 하고, 백부 아브라함의 구출을 받아 구사일생 탈출한 것이다. 그리고나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아, 안타깝게도 그는 경고의 씨그널을 무시한 채 여전히 그대로 소돔성에 눌러앉아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베드로는 이러한 롯을 가리켜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벧후2:7)으로 표현했다. 아, 그의 목적마저도 진정 의로왔었다면... 죄악의 소굴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는 소돔에 살았을까? 그는 소돔에서 참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고 했을까? 왜 그는 의인이면서도 소돔을 떠나지 못하고 고통을 당했을까? 나도 롯과 같이 그러했지 않은가?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라는 말씀을 나는 얼마나 등한시해 왔는가? 한갖 조그마한 즐거움과 내 몸의 안락을 위해, 내가 버리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반면, 아브라함의 바라봄은 차원을 달리한다. 그의 첫번째 바라봄을 보자.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의 첫 바라봄은 세상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않은가? 사실 그는 롯에게 이렇게 얘기해야 마땅할 것이다. “롯아, 하나님이 내게 주신 땅은 가나안이야. 그러니 가나안만 빼고 너는 어디든지 가서 정착하거라. 나는 이곳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고 약속이기 때문이야.” 이 말 대신에 그가 한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지 않은가? “롯아, 그동안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얼마나 고생 많았니? 이제 너를 떠나보내야 하는 내 심정이 찢어질 듯 하구나.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네가 먼저 택하려므나. 가나안이라도 좋다. 네가 그곳을 원하면 내가 기꺼이 양보하마.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나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면 된단다.” 이것이 그의 속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무엇일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남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하나님이 어찌 기뻐 받으시지 않았겠는가? 이제 하나님의 명령으로, 아브라함은 비로소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두번째 바라봄이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은 축복의 땅으로 변모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이제 아브라함이 할 일은 그 위대한 약속을 주신 하나님께 단을 쌓고 그분만을 경배하는 일이었지 않겠는가?

바라봄에는 순서가 있다. 매사를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려면, 세상을 바라보기 전에 먼저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주님을 바라본 연후에, 주님이 주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적용

나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임을 잊지말자.
무소유가 아닌 비소유 신앙을 지향하자.
떠남과 바라봄을 내 기도에 적용하자.
떠남은 세상과의 떠남이요,
바라봄은 주님을 향한 바라봄이다.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자.
잠들기 전 저녁기도 시간은 떠남을 묵상하자.
세상과의 결별과 이에 대한 나의 별세를 선언하자.
잠든 동안은 나의 죽음을 경험하자.
그리고, 새벽을 기도로 열자.
기도함으로 주님을 향한 바라봄을 가장 먼저 시작하자.
이로써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주님,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주 하나님, 그동안 의인인 척 하면서 롯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 보았습니다. 세상을 주님의 눈으로 품지 못하고 안주할 대상으로 여겨 왔습니다. 떠남의 신앙과 바라봄의 신앙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게 하옵소서. 주님이 계신 그곳이 가나안임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이 계신 나의 가나안에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머물겠나이다. 주님을 먼저 바라보게 하옵소서. 세상을 바라보되,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이제부터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내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삼겠습니다. 저녁을 떠남의 기도로 마치고, 새벽을 바라봄의 기도로 열겠습니다. 그렇게 힘쓰겠나이다. 아멘.

김순희

2010.05.14 11:56:25
*.160.176.34

저 또한 저녁은 떠남의 기도로 마치고, 새벽은 바라봄의 기도로 열어보겠습니다.
넘 넘 좋네요~~

이스마엘, 롯...... 이삭까지
차근히 떠나보냄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솜씨.
그렇게 우리를 빚어가시는 섬세하신 손길이
넘 은혜롭네요~~

이선우님!
기도해 주셔서 우리의 공 성도님은 활기차게,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넘 감사요.
수시로 경과 보고 하겠슴다.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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