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들은 상처가 생기면 그저 내리쬐는 태양아래 자신의 상처부위를 노출시키는 것 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유일한 치료방법이 햇빛아래 아픈 곳을 드러내고 그 빛을 받음이 치료방법인 것이다.
오랜시간 동안 내적인 부분을 너무 아파하기만 했다. 내 맘의 생채기는 늘 아물었다가 어떤 상황이 생기면 다시 피가 나고 또 아픔을 하소연하고... 반복, 반복되어지는 아픔들로 인해 이젠 스스로 지쳐가기까지 한다 . 십자가 앞에 벌거벗음이 치료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말씀은 자주 접하고 나름 노력한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잠시뿐 다시 누군가의 어떠한 한 마디에 또 쓰러지고 넘어지고 만다.
이웃나라의 전쟁통에 어린아이들의 다리가 절단되고 굶주려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 눈물이 난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다. 그러나 내 손톱밑에 가시가 끼여있으면 그것이 저들의 아픔보다 더 아픈 것 같다. 남의 아픔은 잠시 감상뿐이지 나의 아픔만이 실체가 되어 다가온다. 이 모습의 진정한 나의 모습임을 바라보게 된다.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두 손을 든다는 것, 그것은 마치 다쳐서 어쩔 줄을 모르는 동물들처럼 태양아래 상처부위를 드러내고 눕 듯, 하나님께 아픔, 슬픔, 고통, 자존심, 체면.... 그 모든 것을 드러내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철저히 무능한 존재인 자신임을 고백함인 것 같다.
그렇게나 나약하고 그렇게나 자기중심적인 자신이 또 사람들 앞에서는 얼마나 도덕적이고 싶어하며 또 얼마나 종교적이고 싶어하는지를 가르쳐 주실 때, 그 허울쓰고 가면쓰고 무도회를 즐기길 너무도 좋아하는 자신임을 깨닫게 될 때, 그 부끄러움이란. 그 수치스러움이란...
그러나 가시면류관 쓰시고 나 대신 수치스런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예수님의 사랑이 햇빛처럼 쏟아져서 치료하는 광선이 되시어 어둡고 침침한 내면을 환하게 비추어 주신다. 우리 예수님 밖엔 이 비참한 자아의 실체를 치료해 주실 분이 없다. 정말 우리 예수님 밖엔 아무런 소망이 없다. 나의 아픔만 바라보다가 다른 아픈 이웃들을 헤아리지 못한 이 죄송스런 맘과 더불어 오늘도 십자가 아래 벌거벗고 두 손을 들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