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곳은 미국의 소도시인지라 한인교회가 많질 않았다. 교회가 은혜롭지 못할 때 다른 교회를 가고 싶어 두루 살펴보아도 목회자의 자기배 불리기로 인한 성도들의 아픔의 하소연만 산처럼 쌓인 교회들뿐이였다. 어느곳을 보나 다 똑같았다.
그 때, 정말 귀한 목사님을 모시고 교회를 개척할 기회가 생겼다. 성도들의 한숨소리, 성도들의 교회의 지도자로 말미암은 상처의 환부를 하나님께선 다 보시고 계셨기에 이런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하며 맘이 벅차 터질 듯한 기쁨으로 개척을 하였다. 이젠 우리 모두가 숨을 쉴 수가 있는 그런 교회가 생겨날 수 있다는 가슴벅찬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라..
모시고자한 목사님은 지역교회들의 방해로 그만 포기해아만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훼방이 있었다. 결국 교단에서 보내주신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이 되시었다. 얼마되지 않은 성도들이지만 같은 맘으로 모인 무리였기에 예배가 기다려졌고 공동체안에서의 성도지간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온 몸으로 느끼며 서로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숱가락이 몇개인지 서로 알고 있을 정도로 성도들과는 아픔, 슬픔, 기쁨들을 항상 함께 나누며 항상 서로 기도해주며 그렇게 사랑하는, 참으로 꿈에도 그리던 그런 사랑의 모임이되어져 갔다.
담임목사님은 그렇지 못했다. 우리가 보아왔던, 그래서 불만스러웠던 그런 지도자의 모습을 똑같이 지니고 계셨다. 축복을 받으려면 감사헌금을 많이 바쳐야한다는 것이다. 바친만큼 주시는 하나님이시니 가능하면 일가친지들에게 빚을 얻어서라도 헌금을 많이하라는 것이였다. 얼마나 실망스럽던지... 목회자들에 대한 불신은 점점 더 진하여져 갔다. 어느 목회자여도 이젠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상처위의 또 상처는 너무도 깊숙히 패여져버렸다.
운영자님께 자주 상담을 드렸다. 은혜가 되지 않으면 다른교회로 떠나고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며 인내하라셨다. 다른교회? 그 다른교회가 없어서 여기까지 온 것인데.... 그래서 성당으로 가겠다고 답변을 드렸다. 어찌나 말리시던지, 그렇게 말리시는 운영자님이 미웠다. 그간 목회자로 말미암아 생겨진 상처들을 같은 목회자라는 이유로 운영자님께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런 구태의연한 대답을 들으려 상담한 것은 아닌데,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은 다 똑같아,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내 속에서 울분은 마구 마구 쏟아져 나오고, 지속 성당으로 가겠다며 심술을 부리고 심통을 부리고..
난, 이 곳의 성경강해를 매일 차례대로 읽고 있던 중이였다. 신기하게도 그 때 읽는 말씀들은 모두 다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뿐이였다. 성령님은 정말 오묘하시다. 하필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꾸지람하시는 글이 그 무렵 계속 읽혀졌다. 그 말씀앞에 무릎을 꿇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억울한 것 같기 때문이였다. 너무도 속이 상했다. 그 속상함을 그렇게 모두 운영자님께 쏟아 붓고, 또 붓고.. 난, 말씀 앞에 순종함을 그렇게도 모르고 있었다. 내면의 고통만 서늘하게 느껴질 뿐, 그 서늘한 아픔은 이 땅의 복음을 미끼로 자기배나 채우는 모든 목회자들 때문에 느껴야하는 고통으로만 이해하고 싶었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지만 너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얼굴이 붉어진다. 난, 말씀 앞에서도 순종치 못했고 운영자님의 사랑의 권면앞에서도 거절과 심술과 심통만 지속 부렸었다. 그리고 제 풀에 토라져 잠수하고...
회심을 하였지만 옛본성은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자기 가고 싶은 길로만 가려고했다. 그렇게 엉클러져 도무지 풀어낼 수 없는 실타래를 우리 성령님은 포기하시지 않으시고 지속 풀어내시어 실패에 채곡이 감아가시었다. 그 감아가심에 난 아프다고요, 슬프 다고요 하며 떼만 쓰고, 성령님은 그래도 보듬어 주시며 한발자욱씩 걷게하셨다. 비록 말씀앞에서 순종하기 싫어 아프고 시림을 느낄지라도 잠시 후 뒤돌아보면 나의 잘못이 보여지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우셨기에 아주 조금씩 조금씩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렇게나 억세고 거친 자아를 우리 성령님께서는 곁에서 지속 설득하시며 걷도록 도우셨다.
후안무치한 시대를 사는 요즈음 주님을 향한 나의 부끄러움을 느끼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