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지속 궁금하였고 한참 생각하다 보변 좀 어리둥절해지는 그런 표현이 아니였다 싶은 것이 있었다. 바로 '첫사랑'이란 표현이였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에도 난 예수님을 그렇게나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늘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살아왔노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늘 나의 편이 되시어 보호하시고 인도하여 오셨는데, 그 때의 그 사랑은 어떤사랑이였기에 이렇게 예수님을 만난 후에 '첫사랑'이라 말씀하심일까? 혹여 '더 깊은 사랑' '한층 심오해진 사랑' 뭐 이런 표현이라면 이해가 좀 쉬웠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오랜시간 동안 신앙생활을 했던 것들에 대해 도무지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정말 어리둥절했었다.
자신 스스로 어리둥절하고 어찌 생각하면 그렇게나 오랜시간의 신앙생활은 공수표였는가? 라는 생각에 조금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었다. 때문에 회심한 체험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는 분들 중 혹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분들은 오히려 나를 도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분들은 얼마나 또 어리둥절할까 싶은 그런 저런 생각이 참으로 오래도록 나의 생각을 놓아두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입술을 자꾸만 닫게 하였다.
연지곤지 찍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하얀 드레스며 면사포를 준비하며 맘 들떠버린 어린 신부, 사랑하는 신랑과 이제 곧 혼인하게 될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 아니였을까? 이제 곧 결혼하면 모든 아픔, 슬픔의 눈물을 그 손으로 닦아 주시며 그간 알면서, 또 모르면서 지었던 모든 죄악조차도 저 멀리, 저 깊은 바닷 속으로 풍더덩 빠뜨려 버리고, 그 넓디 넓고 푸근한 그 품으로 안아주시며 이제부터는 모든 아픔, 슬픔, 고통도 우린 함께 견디고 함께 감당할거라시며 손잡아 약속해주시는 그 분과의 혼인, 그 혼인을 기다리며 준비하였던 시간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랜시간의 기다림은 결코 헛된것만은 아니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삶이 고단하지 않았다면 과연 신랑되신 예수님을 그리도 손꼽아 기다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이 즐겁고 좋은만큼 그 분의 사랑을 기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삶의 고단함도, 삶속의 고통도, 여러 환난과 질고도 사실은 신랑되신 우리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맘으로 이끄심이였다. 샘물처럼 퐁퐁 올라오는 어떤 그리움의 맘, 그 사모함이 구체적으로 어떤 맘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지만 그 송글송글 솟아나는 그리움으로 하나님께 더욱 더 다가가게 하였던 것 같다. 나의 의로 무장된 옷을 입고서 그 옷이 멋있어 보였던 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이시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죄많은 시골처녀를, 태양빛에 그스려 새까맣게 되어진 술람미 여인을 사랑한 솔로몬처럼 만세전부터 사랑해 오신 것이였다. 그렇게 사랑하여 주신 방법은 내가 태어나서 이제껏 살아왔던 상황들, 환경들 속에 빼곡히 수놓아져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전의 신앙생활이 오랜 기다림이였다 생각되어진 것이였다. 그건 오히려 하나님의 따스한 배려의 시간들이였다. 오랜 기다림 속에 더더욱 애뜻한 그 사랑을 느끼도록 하신 그런 배려하심...
그렇게 오래도록 사랑해 오신 사랑은 바로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보증되어주시어 이렇게나 추악한 죄인이 우리 주님의 신부가 되는 영광스런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 그 보혈, 그 보배로운신 예수님의 피로서 구원해 주셨다. 그 구원해 주신 사랑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후 부터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운데로 콸콸 흐르는 폭포수가 생겨진 것 같다. 엄청이나 커다란 그런 폭포가 생겨졌다. 보혈로 이루어주신 그 구원은 폭포수에서 이곳 저곳으로 튕겨지는 물보라처럼 내 몸 구석 구석을 조금씩 적시어 나간다. 그 물보라들의 상큼함과 시원함은 바로 구원의 기쁨이다. 내 평생 점점 더 온몸에 적시어질 그 구원의 기쁨이다. 그러하기에 이제부턴 어떠한 고난도 신랑되신 우리주님이 곁에 계시기에 견디어 낼 수가 있다. 그렇게 함께 계시어 주시려 그 몸 가르시어 천국문이 되어주셨고 이 못난 자를 신부라, 감히 신부라 칭해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