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차갑고 매서운 추위는 눈이 많이 내리는 날엔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는 것은
미끄러워서 사람들도 차들도 멈춰 서곤 했다. 트럭조차 눈길 언덕을 오르는 일은 힘든 일이었다.
예수원을 오르던 산등성이 좁은 언덕길을...
그 전엔 산에 가서 나무를 베서 장작을 피워 페치카로 연결해
여러방들을 따뜻하게 했지만 그래도 온돌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면서 연탄보일러를 놓고
연탄을 땔감으로 사용하였다. 겨울이 되면 그 미끄러운 언덕길을 간신히 성공적으로 연탄차가 들어올 때의 기쁨
두툼한 양말로도 발이 시려워 견딜 수 없는 차가운 바닥에 따뜻하게 해주는 연탄은 고마운 연료였다.
눈이 자주 오고 쌓일땐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 언덕길을 형제들이 연탄재를 깔았다.
잠시 그 곳에 머물었을 때 어떤 한 손님이 연탄 집게로 연탄을 나르고 있었다.
밤새 너무 추웠던지 움추리며 어디가 연탄을 버리는 곳이냐고 물으시며 여기 저기 연탄 흩어진 쓰레기를 청소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분이 옥한흠 목사님이라는 것을 알았다.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작업을 도와주었다.
그리곤 중보기도후에 바로 서울로 가셨는데 손수 연탄재를 나르던 모습이 잊어지지 않는다.
고향의 우리집 앞 긴 골목 언덕도 어머니가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엔 연탄재를 뿌리고 잔병치레 많은 막내를
업고 힘겹게 언덕길을 오르곤 했다. 부디 아프지 말라고 하시며.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까?.
잠시 있었던 태백은 탄광촌이라 빨래를 널어 놓으면 까맣게 연탄가루가 묻어 있어서 실내에 빨래를 널곤 했다.
1985년 그 해 가을 예수원의 요청으로 태백의 작은 마을 M에서 6개월동안 유치원을 맡아서 일을 도왔었다.
그 작은 교회의 성도들은 20여명이었는데 새로운 선생님이 온다고 큰 사택을 반짝 반짝 청소를 해놓아서 마룻바닥이 미끄러울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무척 천진난만 했다. 티없이 밝고 명랑하고…
남자성도들이 대부분 광부들이었다. 토레이 신부님은 그들을 귀히 여겨 주일날 오후 꼭 예배를 인도하러 오셨다. 그 해 겨울 기쁘고 열정적이며 감동적인 어린이 발표회를 마친 날, 제인 사모님은 어린이들의 귀엽고 밝은 노래와 연극에 반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토레이 신부님과 같이식사를 나누며 우리에게 두가지 당부를 들었다. 하나는 발표회에 너무 부모들 부담을 주지 말라는 것과 평상시에 어려운 말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 ,못 배운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진다는 말씀이었다.알록 달록한 한복과 색색갈 의상이 화려해 보였나보다.
그 때는 너무도 섭섭했다. 발표회 의상 .모두 천을 싸게 끊어서 입힌 것이고 내가 그리 유식한 척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였다. 우리가 유치원 세우기 위해 얼마나 연습하고 고생 했는데 그리고 은혜로웠고...
그래서 밤새 속상해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난다. 다음 날 토레이 선교사님이 실비아가 울어서 나도 밤새 못 잤다고 하셨다.
눈빛이 너무도 미안해 하셨고 가슴 아파하신 것 같았다.
사실은 깜박 연탄불도 꺼트려서 밤새 추웠고 연료가 없어 아침에 식사도 못하고 가셨다. 그 날, 농담으로 성령의 열매중에 자비가 있지 않습니까?하시며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에 대해 기도하시고 버스시간이 되어 돌아가셨다. 예수원에 가서는 세상에서 자신이 본 콘서트중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였다고 간증했다고 한다.
그 해 성탄절 성도들에게 선물을 포장하여 각 가정을 돌면서 깨닫게 되었다. 판잣집에서 홀로 놀고 있는 어린이들, 허름한 집들, 새까만 광산촌.과 새까만 시냇물. 험한 광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내가 보았던 겉모습 뒤에는 바람이 송송 들어오는 낡은 집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을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그들의 뒷모습을 .대신부님이 그들의 힘들고 아픔을 알기에 우리에게 여러가지로 훈계하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조금 철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토레이 부부의 한국인들을 섬기고 사랑과 순종의 모습은 어려운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영적인 부모님이셨다.
그곳은 너무도 춥고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새벽이면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같이 살던 할머니와 교회 앞길을 연탄재를 뿌렸다.
할머니는 허리가 아프신데도 추운 겨울에 꼭 연탄재를 나르셨다 .그리고 조심스레 저녁내내 만든 떡을 머리에 이고 넘어질 세라 연탄길을 걸어 팔러 다녔다.
눈이 자주오는 강원도 추운날씨엔 광부들의 수고로움으로 연탄 덕분에 우리는 따뜻한 겨울을 보냈고 지금은 모두들 기름 보일러로 바꾸어서 그 곳도 폐광이 되고 그 분들도 모두 떠났겠지만 그 짧은 기간이 기억이 생생한 것은 어린이들의 맑은 미소와 초롱초롱한 눈동자..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어려운 작업을 마치고 우리를 위해 먹을 것을 사들고 찾아오셨던 광부들의 맑은 미소가 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쯤 그곳에도 봄이 왔겠지.. 민들레도 찬바람속에 가파르던 들판에 피었겠지..
“우리에게 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세상과 하나님 )강조하던 토레이 선교사님말씀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눅 9:23 )
정말 시냇물이 까만색일 줄 알았었고 눈이 까만색인 줄만 알았었지요.
그런데 그 시절이 제일 좋았습니다. 여름이면 계곡에 가서 가재잡던
일... 언니 학교에 좆아가서 도시락 함께 먹던 일..
귀한 간증 넘 은혜롭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