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아버지와 자식 또는 결혼의 예를 드시는데 사실 그런 예는 저는 몹시 못마땅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정확히 그런 것이면 내 질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첫사랑이, 그리고 회심이 그것보다(아버지와 자식, 결혼) 더함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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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첫사랑이나 회심의 의미와 은혜와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결과는 제가 말씀 드린 내용보다 훨씬 더 엄청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각자에 적합한 고유한 방식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를 체험한 신자들의 감격 또한 각기 다릅니다. 단 하나, 자신이 이전의 자기와 전혀 달라졌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는 공통적인 체험과 인식을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영적 은혜를 어느 누구도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쉐익스피어 같은 문호, 존 뉴톤 같은 과학자, 임마누엘 칸트 같은 철학자, 어떤 달변가라도 부족합니다. 제 같은 눌변으로 어찌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에 분명한 것은 신자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세밀히 체험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래서 종교가 아니라 생명인 것입니다.
비유란 그런 은혜와 권능을 다른 이에게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일 뿐입니다. 비유 자체가 진리는 아닙니다. 예수님도 많은 비유를 사용했고 그 의미하는 바도 부연 설명해 주었습니다. 설교자도 주님의 선례를 따를 수 있고 따라야 합니다.
제 비유에서 부자관계, 결혼관계가 대변하는 정확한 대상은 회심, 첫사랑이 아니라 회심 후에 바뀐 하나님 안에서의 신자의 신분과 자격과 위치와 특권이었습니다. 님께선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정확히 그런 것이면 내 질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분명 옳습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 온전히 들어온 신자라면 저의 그런 비유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도리어 아주 적절함을 본인의 체험을 통해, 또 그 체험을 성경 진리에 비추어보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최초의 답변에서부터 계속해서 상호 논의의 범주가 다르다고 전제한 의미도 바로 그 뜻이었습니다.
2. 목사님의 요점 정리를 보다 문득 내가 처음 교회 다닐 때 생각이 났습니다.(그때 목사님도) 다음 글은 제 질문을 잘하기 위한 가정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으로 목사님에게 요점 정리 같은 말씀으로 첫사랑을 얻습니다. 그리고 한 15년 후에 목사님은 이단이 됩니다. 저는 그때도 그 후에도 별로 교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다시 30년 후에 저는 목사님에 대해 생각합니다. 요점정리처럼 분명한 목사님이 왜 이단이 되었을까?
1) 목사님은 처음부터 나를 속였을까?
2) 목사님은 스스로 온전한 믿음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온전한 믿음이 아니었을까?
3) 사람은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데 우리생각으로만 온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4) 성경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애플직원처럼 자신의 처지를 잘 모를 수 가 있지 않을까?
5) 요점정리가 잘 못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요점정리를 오해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이 떠오른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목사님이 이단으로 간 이유를 다 알지 못하고 내 질문을 멈출 수 없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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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은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기에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믿었고 또 그 믿음으로 인해 기꺼이 산 채로 맹수의 밥이 되면서 순교했던 바로 그 믿음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그들은 주님 부활 사건의 직접 목격자였기에 믿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과 진리를 안다고 해서 목숨을 바칠만한 온전한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그 자의 옛사람이 죽었다가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면서 그리스도를 자기 안에 온전한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후대인으로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직접 목격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만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방도는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애플 직원처럼 자신의 처지를 모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성경과 무관하면 아예 기독교가 아닙니다. 성경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자 진리로 믿지 않으면 아예 신자가 아닙니다.
최소한 성경을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말해선 안 됩니다. 성경에 묘사된 객관적 사실은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영적 진리에 대해선 함께 논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잘 봐주어서 성경으로 종교, 도덕, 역사, 철학에 관해 논할 수 있어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신앙은 논의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이 또한 논의의 범주에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아마도 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매달리는 것을 염려하시는 뜻으로 하신 말씀 같은데, 그래서 성령의 간섭으로 성경을 보아야한다고 누차 강조한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에만 매달리면 그 객관적 사실이나 역사성을 넘어서 논의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온전한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말씀을 읽는 자의 심령에 살아 역사해야만 예수님이 자신의 온전한 주인이 되며 자기의 모든 것을 그분께 의탁하는 신자가 됩니다.
솔직히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도 성령 안에서 거듭난 자만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목사님을 계속 거론하시는데 저로선 판단할 위치나 자격이 안 됩니다. 성경을 동의하고 믿고 가르치는 것과 예수님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것은 별개라는 원론적인 말씀 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3. 저와 아내는 가든을 한지 3년 되었습니다. 우리는 절대 겨울에 상추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겨울에 상추가 절대 싹을 트지 못한다는 조그마한 믿음 때문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나의 온전한 믿음이, 첫사랑이, 그리고 완전한 회심이 그보다 더한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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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러합니다. 겨울에 절대 상추가 싹을 트지 못하듯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과 그분이 나의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것은 성령의 간섭 없이는 절대 되지 않습니다. 님께서도 성령의 간섭으로 하루 속히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오시고 또 성경이 제대로 이해되도록 간절히 기도드리겠다고 이전에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4. 아마도 목사님께서 나의 질문을 이해 못하실 거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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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맨 처음부터 님께서 제 답변을 미처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전제 했듯이, 같은 주제를 님과 저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바라보고 논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6번 주셨던 질문이나, 제가 드린 답변이나 앵무새처럼 동일한 내용을 서로 되풀이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님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은 제가 불신자 시절에 갖고 있던 의문과 동일하므로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합니다. 절대 오해는 말아 주십시오. 제가 지성적 영적으로 더 깨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간섭이 있고서야 예수가 온전히 믿어지고 성경의 내용도 깨달아지더라는 것입니다. 제 사상과 철학으로가 절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가 잘 나서 스스로 깨달았다는 자랑밖에 더 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최고 엘리트였던 바울 또한 그랬습니다. 자신의 지혜로는 도무지 십자가 구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성령의 간섭이 있고난 후에야 그 비밀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자기가 깨달아 알고 믿었다고는 절대 자랑하지 말고, 대신에 십자가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오직 성령의 지혜에 감사해야 한다고 명한 것입니다. (고전1:18-31참조 바랍니다.)
제가 성령의 간섭으로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해서, 또 불신자 시절에 님과 동일한 의문들을 갖고 있었기에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해서, 나아가 아무리 말 재주가 있다고 해도 저로선 님을 온전히 납득시키지 못합니다. 성령의 간섭이 있어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지금껏 최선을 대해 복음을 말로 풀어 설명했던(비유를 사용하면서까지) 이유는 일차로는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더러 그 거듭남의 의미와 결과를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아가 기독교 밖의 있는 분들이 기독교의 신앙이 타 종교의 믿음과 다름을 납득시키고, 가능하다면 그런 과정 중에라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십자가의 광채가 그 영혼에 한 줄기라도 비취길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데 우리생각으로만 온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요점정리가 잘 못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요점정리를 오해할 수 있을까? 등의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결코 목사님이 이단으로 간 이유를 다 알지 못하고는 내 질문을 멈출 수 없다.” “저는 그때도 그 후에도 별로 교회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도 목사님께서 나의 질문을 이해 못하실 거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을 잘 살펴보십시오. 성경이나 예수님에 대해 궁금한 어떤 특정한 주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 전부가 성경, 믿음, 구원, 예수님에 대해 인간의 온전한 앎이나 믿음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혹은 가정만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미 온전한 답변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간주한 문제를 계속 묻고 또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실상 아무런 논의가 필요 없는 것 아닙니까?
님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그런 온전한 앎과 믿음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 안에 들어오고 나면 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일 하나뿐입니다. 더 이상의 논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꼴 밖에 안 됩니다. 제가 계속해서 서로 다른 범주에서 논의하고 있다고 말씀드렸고 또 일단 백지 상태에서 성경을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공부해 보시라고 권한 까닭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복음은 말로서 깨우쳐지고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그스틴도 “믿기 위해 아는 것(모든 타종교)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기독교의 신앙)”라고 묘사한 것입니다. 이 표현 자체도 언어표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단지 쉽게 함축적으로 비유한 것뿐입니다. 님의 심령에 십자가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복음은 오히려 황량한 겨울 같은 심령에 떨어져야 더 효과가 있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시길 간구하겠습니다.
5/18/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