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균형이 없는 것 같다. 난 정말 그러하다. 어느날은 버르장머리 없는 손주가 할아버지 수염을 끌어당기 듯 천방지축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맘이 어떠하신지는 아랑곳 않고 그저 나만 사랑해 달라고 떼를 쓰는 아기가 되기 일쑤다. 그래도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정말 미운짖만 골라하는 나를 사랑하여 오셨고 지속 사랑해 주신다. 하지만 죄악만은 말씀으로 또 환경을 통하여 지적하여 주신다.
죄악의 지적, 그 지적 앞에서 균형이 없는 난 또 죄책감에 어지러워진다.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죄를 너무도 싫어하심을 구분하지 못하고 뒤뚱거린다. 사랑하시기에 죄를 없이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시건만 죄의 지적앞에선 늘 나를 거절하신다는 생각이 먼저든다. 죄를 회개하기를 너무도 바라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나를 거절하신다고 자꾸만 느껴진다. 그래서 실망하고 죄송스럽고 그리고 어찌할바를 몰라 아파만하기만 한다.
죄인과 죄를 구분하는 능력부족이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 부족이다. 이런자를 하나님은 이미 사랑하여 주시려 택하시어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며 죄를 대속하여 주셨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철없는 자를, 마냥 죄의 진흙탕에서 분탕질을 하는 죄의 개구장이를 당신의 자녀라고 이미 정하여 놓으시고 사랑해 오셨다. 이미 택하여 놓으시고 사랑해 오셨다.
사는동안 철없이, 버릇없이 할아버지 무릎에만 그저 앉아있으려하는 어리석음과 또 죄악의 지적앞에서 그만 움츠려들어 숨어버리고 싶어지는 어리석은 간극을 없애시려 여러 모양의 환난도,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 같다. 그 고통들 앞에서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하나씩 하나씩 회개하며 고쳐나갈 때에 그 균형없음이, 그 철없음이, 버릇없음이 조금씩 고쳐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하기에 환난앞에서 조심히 자신을 살피는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 같다. 그걸 알면서도 인간은 채찍대신 당근만을 구한다. 다그침보다는 달콤한 속삭임만 원한다. 죄의지적 보다는 무조건적인 칭찬만을 원한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러하다. 그동안 영적지도자의 죄의 지적들 앞에서 나는 동일한 모습을 보여왔다. 하나님앞에서도 철닥서니 없이 사랑만 부어주세요~~라고 떼를 썻던 것처럼 영적지도자에게도 그렇게 떼를 썼다. 생긴모습 그대도 인정하고 사랑만 해주시라고... 그래서인지 죄의 지적앞에선 어느사이 자라목이 되어서 숨어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죄인이기에 거절하시나 보다 싶어 숨어버리기 바빴다.
역시 죄와 죄인의 구분이 불분명한 까닭이 아니였나 싶다. 죄를 회개하여 고침받아 하나님 자녀다웁게, 죄사함받는 자 답게 살기를 염원하는 그 맘을 전혀 헤아리질 못하였다. 그저 죄인으로 취급 당하는 것이 못내 억울한 듯, 속이 상한 듯, 그러하기에 떠나버리고만 싶었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하나님께선 죄를 거절하신다. 그러나 죄인된 우리는 너무도 사랑하시어서 그 아들을 죽이셨다. 그 아들을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앞에서 죄인이기에 나 자신을 거절하신다라는 생각만큼 커다란 착각은 없다. 아니, 십자가의 사랑을 정말로 거절하는 죄악이다. 그 무한하신 사랑의 크기와 무게와 너비 앞에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맘을 조금씩 조금씩 더 알아갈 때에 죄와 죄인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죄는 너무도 미워하시나 택하신 자녀는 이미 만세전부터 사랑해 오셨다. 그 사랑은 자잘한 죄, 커다란 죄, 말로 다 표현치 못할 죄들을 그 십자가 앞에 매일 매순간 내려놓고 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맘을 더더욱 알아가도록 도우신다. 여러모양의 환경으로 또 인간관계로 또 영적지도자의 따끔한 일침을 통하여 성령님은 도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