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에 멧시지로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카카오톡'이라는 메뉴가 있다. 기계치인 나는 잘 활용하지 못하는데 남편과 아이들은 '카카오톡'으로 대부분 대화를 한다. 몇일전 남편에게 모처럼 멧시지를 보냈다. 그런데 남편의 이미지를 글로 써놓은 것이 눈에 띄였다. 남편의 요즘 심경을 그렇게 간단하게 이미지로 써놓은 글이였다.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거다" 그 문귀를 보며 많은 생각을하게 되었다. 맞는 것 같았다. 나의 천적도 나였던게다.
오늘 '영성의 동산' 에서 읽은 글도 그러했다. 불신자 시절엔 거림낌없이, 아니 즐겨 찾았던 점쟁이집, 오늘의 운수... 등은 자신의 앞날이 불안하여서 찾게되는 이유임을 배웠다. 사실 그동안 불신자 시절엔 왜 그러헀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심심풀이로, 아니면 호기심으로 정도로만 이해했었다. 그러나 그건 불신앙인들의 심리적 불안에서 기인된 행동이였고 하나님을 전혀 의식치 않는 행동이며 자기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인생을 주장해 보겠다는 심산임을 배웠다. 정말이지 별 의미없이 지나쳤던, 그저 친구들과 함께 즐겼던 정도로만 여겼던 일들에 그런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신자가 되어서도 불신자의 불안에다가 신앙적 불안 하나를 더 붙인 경우가 있음을 뺴웠다. 나의 경우가 그러하지 않은가 싶다. 어쩌면 그동안 나는 신자이니간 이젠 불안치 않다. 때문에 요동치 않아야 한다. 요동하면서도 요동치 않아야한다며 구호처럼 외쳐왔기에 오히려 치유함 받아야함을 놓쳐버린 것 아닌가 싶다.
망설임, 후회, 자신없음, 연약함, 그래서 자주 휘청거림을 고백하며 지내왔지만 그것이 신앙적 불안에서 기인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성품이려니 그러하니 이해해 주시려니, 아니 이해해 주셔야만 하지 않은가? 이건 요동함이 아니니깐 하나님은 분명히 고개 끄떡이시며 넉넉히 이해하시고 계실거야, 주변사람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우리 하나님은 이해해 주실터이니 괜찮아~~라며 스스로에게 변명 내지는 합리화를 시키며 지냬왔던 것 같다. 사실은 신앙적 불안이였음을 인정치 않았던 것이다.
상황이 어두워지면 내 탓으로 돌리고 싶었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세심히 살피려하고, 혹여 이웃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가 또 살피고, 그러다가 나의 어떠한 행동이 기억나면서 이웃이 아팠겠다 싶으면 괜시리 내가 아파 절절매게 되고...그러다 보니 가장 좋은 말, 아름다운 말로만 대하고 싶어서 노력하게되는. 진리는 벗어나더라도 짐짓 외면하며 인간적인 장점만 찾아보려 애를 쓰게되는... 어쩌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애초부터 잘못 배워온 것도 하나의 이유가 아니였나 싶다. 신앙인들은 무조건 상냥해야하며 무조건 사랑해야함이란 배움속에 진리가 배제된 채 행동만을 가르침 받고 훈련되어진 이유인 듯 싶다. 거기다가 나의 타고난 성품도 보태져서 신앙적 불안임을 굳이 외면한 채로...
오늘 말씀으로 찬찬히 나를 돌아본다. 나의 천적은 결국 나였던게야~~ 남편의 고백처럼 나도 나의 신앙을 제대로 점검치 못한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우왕좌왕하며 뒤뚱이며 걷던 구불거렸던 길들은 불신자의 불안에다가 신앙적 불안을 하나 더 얹고 휘청이는 모습이였다.
그저 하나님이 하라시는 일만 하고 하나님이 가라시는대로만 가고 하나님 시키시는 말만 하는 순진한 모습이 되려면 조심 조심 헤아리며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힘들어하는 성품이라 이름하는 이 변명을 이젠 거두어 버려함을 배운다. 그 변명함이 하나님의 치유해 주시려는 손길을 굳이 사양하는 행위였음을 고백해 본다. 정말 턱허니 믿고 시키시는 일만 하는 신앙적 불안이 모두 사라져 버린 그런 신자가 되길 무릎꿇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