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받을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자를 구원해 주신 은혜를 우리 모두는 늘 감사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은혜라며 입으론, 머리론 얼마나 잘 생각하며 얼마나 잘 읊조리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 가슴으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얼마나 어리석어 늘 하나님의 맘을 아프게 해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지는 잊고 그저 구원받았노라 자랑하며 기뻐하기만 즐기고 있진 않는지 뒤돌아 보게된다.
십자가 사랑의 그 크기와 너비를 안다는 것이 사실 소경이 코끼리 다리 매만지며 이 곳이 코인지, 허리부분인지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엔 당연히 십자가의 예수님을 의지하여 난 천국백성이 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 싶었지만 정말 어느 구석하나 그럴만한 자격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놀라서 입을 다물 수 없을 때, 그 때 보게된 나의 죄는 나의 머리 끝, 나의 아구까지 그득 찬 죄악 덩어리가 나였음을 깨닫고 통곡할 수 밖엔 없었다. 도무지 이렇게 추하고 더러운 모양새를 가지고 이 더러운 입술로 그 십자가를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래서 통곡하며 우는 것 밖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어루만져주시며 맘을 또 만져 주시고, 맘을 또 매만져주시고... 너무도 부드럽고 포근히 감싸 안아주시며 매만져 주시는 그 손길을 느꼈을 때, 이젠 너무도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또 울 수밖엔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난 구원받은 기쁨만 오롯이 남겨져있는 모습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나 커다란 죄인인지를 자꾸만 잊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것이다. 어느사이 내가 구원받을만 했으니깐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닌가하는 맘의 교만이 채곡하게 쌓여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엔 말씀을 읽어도 특정부분, 십자가로 구원해 주신 그 사랑에만 온 시선이 집중되었었다. 맞다, 난 구원 받았다. 난 구원 받았다. 그런 외침속에서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의 크기와 너비는 헤아려 알려하지 않았다. 그저 장님이 코끼리 만지 듯 그렇게 만지기만 하면서 구원받았음만 외치고 있었던 것이였다.
이런 나를 성령님은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하여 기도하시고 계셨음을 말씀을 통해 깨달아 아는데까진 참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렇게나 어리석은 인간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결국 말씀으로 그 사실을 깨닫도록 도우셨던 것이다. 그 아구까지 그득찬 나의 죄를 보도록 말씀으로 지속 가르쳐 주시고 깨닫도록 도우시며 심령속에선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성령님께서는 지속 기도해 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십자가 사랑을 깨닫도록 말씀하여 주시는 그런 글들의 은혜는 결국 십자가로 방향을 제시하여 주는 방향표시제인 것이다. 세상 사람 그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에 앉지 않도록, 그런 죄악은 얼마나 커다란 죄악임을 지속 가르침 받아야한다. 그리고 말씀들은 지속 십자가로만 향하도록 방향을 제시하여 주어야만 한다. 이 곳의 글들이 너무 좋은 이유는 딱 한가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래서 이 더럽고 추한 죄인의 아구까지 그득한 죄악을 에수님이 골고다 십자가로 향하시며 대신 죽어주신 그 사랑앞에 무너져 내릴 수 밖엔 없는 인간임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기에 은혜로운 것이다.
매일 죄만 즐기는 이런 죄의 개구장이를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커다란 댓가를 지불하시고 구원해 주셨는지... 그래서 구원 받은 후에도 여전히 교만스럽고 여전히 사랑이 없고 여전히 흉물진 모습일진대 그래도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면 또 죄를 사해 주시기에... 나의 그 죄악의 크기만큼 십자가의 사랑의 크기가 보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