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감을 갖고서 그 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그것을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그런 노랫가사가 있다. 난 그 노랫말이 생각나면 슬며시 웃게된다. 마치 그 철이 없는 아이가 하나님 앞에 앉아 장난감 갖고 놀고 있는 나라는 생각이 들기에 그러하다. 선물을 주셨으나 그 선물을 가지고 놀다가 부숴버리기 일수이고 그 선물을 주신 분을 잊기가 일수이기에 그러하다. 할아버지 무릎위에 철없이 앉아 수염만 만지는 어린아이, 그렇게 철드는 것이 느리디 느린 어린아이가 나임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예수님의 보혈로서 구원 해 주신 것은 거룩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어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다. 아직 사단의 권세 아래 짖눌려 하나님을 이론으로만 알고 종교적으로 거룩의 모양새를 갖춰입느라 낑낑거리며 애를 쓰고 있을 때 구원해 주셨다. 그 행위가 어여뻐서, 그 열심를 가상히 여기셔서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니다.
아무런 공로없는 자를 먼저 구원해 놓으심은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그리하신 것이다. 거룩한 나라가 되라고 그리하신 것이다. 그런데 구원의 감격이 폭포수 마냥 쏟아져 내리고 흘러 넘칠 때, 현실의 어려움도 어느사이 그렇게 시원하게 해결해 주시리라 여겼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여지길 원하시고 난 구원해 주셨으니 현실의 문제도 해결받길 원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지 못하였다. 그럴 때 마다 어린아이처럼 또 울어버리고...
오늘 말씀으로 배워본다.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심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만들어 가시려고 먼저 구원부터 해 주신 것이다. 이제 구원 받은 자는 여러모양의 훈련들을 통과하여 조금씩 조금씩 거룩으로 빚어져가야 한다. 당연히 환경적으로 그리고 인간관계로서 어려움이 다가올 수 밖엔 없음을 배운다. 그러한 환난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마냥 울어버리고, 선물을 주신 분을 잊어버리는 철없음에서 이젠 벗어나야함을 깨닫는다.
관계의 어려움이라는 것, 그것이 이렇게 힘이드는 줄 몰랐었다. 정말 철없던 시절, 관계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자들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조금만 양보하고 조금만 껴안으면 쉬운 것을 왜 그렇게 어려워하느냐고 제법 목소리도 높여 보았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씩 배워가고 있는 것은 나의 생각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사랑을 가로막는 행위에서 비롯됨을 배우게된다. 모든 것은 예수님의 보혈의 잣대로만 재어야하는데 난 너무도 오래도록 나의 생각의 잣대가 기준이였다. 오히려 예수님의 보혈의 잣대를 좀 비정한 모양이 아니냐며 하소연한 적이 많았다. 영적무지에서 비롯된 생각들, 말들, 행동들이였음을 되돌아보게된다.
이렇게 가르쳐 가시려니 성령님께서는 역시 여러모양의 환난을 재료로 사용하실 수 밖엔 없었음을 깨닫게된다. 관계의 어려움들을 통하여서 예수님의 보혈의 잣대의 어떠함을 조금 배우게된다. 현실의 아픔들을 통하여서 나의 죄악들을 보게 하신다. 꽤나 욕심이 많았으나 난 참 욕심이 없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꽤나 명예욕에 불타 있었으면서도 난 많이 겸손하여 뒷전에 머무는 것이 맘 편하다고 착각하였음을 깨닫는다. 이루 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죄악들을 이 모양 저 모양의 어려움들을 통하여서만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의 고달픔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준비하신 거룩한 나라가 되어가도록 하는 재료가 됨이 확실하다.
여러모양으로 다가오는 어려움들은 하나님의 거룩으로 빚어가시는 아주 따신 손길이심을 확실이 깨닫고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가길 소원해 본다. 이제부터는 다가오는 훈련들을 통과하며 조금씩 씻어가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더욱 예민히 느끼는 아이가 되고 싶다. 그 철없음에서 조금씩 자라나는 그런 아이가 되길 소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