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퍼옴)
-교회의 하나됨의 원리-
에베소서 4:1-13절까지는 하나되는 교회의 원리를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평강(ειρη?νη)?이 교회에 임한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하나가 될 때 교회는 평강과 복이 임하는 것이다.
하나되기 위한 덕목이 있다.
1-3절에서 교회가 하나되기 위한 덕목을 바울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덕목을 말하기 전에 먼저 바울은 자신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 있다.
그 당시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는 왜 감옥에 갇혔는가?
복음을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감옥에 갇힌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바울은 자기 몸이 감옥에 갇혀서 장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오직 걱정은 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것뿐이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옥중서신이란 것을 썼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이다.
사도는 자신의 몸을 돌보고 장래를 염려하는 것보다 더욱 복음을 받은 교회들이 진리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세속에 물들거나 세상의 미혹의 영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있다고 해서 교회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의 몸은 감옥에 갇혔지만 그의 마음과 영은 교회들과 함께 부르심을 받았으며 같은 부르심을 고유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혔는데 그 때 성도들은 베드로를 위해 한 마음으로 기도하여 하나님은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옥에서 구해주셨다.
이것이 모든 성도들의 같은 부르심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르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부르심( κλησι? calling.)은 무엇인가?
부르심은 교회(εκκλησι?α calling out)라는 말과 일치한다.
교회는 죄와 사망에서 생명과 거룩함으로 불러낸 자들을 의미한다.
당시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자주 옥에 갇히고 핍박을 받기 때문에 성도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실패했는가하는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비난과 의심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그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시고 예수님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비록 일시적으로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것같이보여 사망에 이르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부활하셔서 생명의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왜 바울이 자기는 주를 위해 갇힌 자라고 당당히 말하며 에베소교회를 향해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고했을까?
혹시 에베소 성도들이 바울의 갇힘으로 인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도록 함이었던 것이다.
어느 시대 교회든지 성도들이든지 많은 시험과 고난이 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끊임없는 시험과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결코 흔들리거나 불신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성도들을 향해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irrevocable )이 없느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나님은 우리를 생명과 영광을 주시고자 죄에서 사망에서 불러내신 일에 대해 결코 돌이키시거나 후회하시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도의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유효하며 성도의 평안함과 형통함에서도 유효하다.
성도의 변화무쌍한 삶의 변화속에서도 하나님이 성도를 부르셔서 그의 백성을 삼으시고 영광으로 인도하시는 일에는 결코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앙생활하다가 시험을 당한다든지 어려움을 당하면 스스로 생각하시기를 하나님이 나를 택하지 않으셨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가 취소하셨나하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마음이 약하여 하나님에 대한 소명이 흔들릴 수는 있지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또 알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만이 우리성도들이 파란만장한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자기가 감옥에 갇혀있어도 하나님의 뜻가운데 갇힌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살라고 성도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위로받을 사람이 오히려 위로해야 할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불쌍하기 여기고 안됐다고 해도 나는 오히려 믿음위에 흔들리지 않고 나를 염려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위해 염려하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이 능력이 사도바울에게 감옥에서도 교회들을 염려하며 믿음의 서신을 기록하게 한 것이다.
이 능력이 바로 엡3:7의 "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와 엡3:20의 "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인 것이다.
즉 믿는 자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무한대의 능력이다.
바울을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여기겼지만 하나님에게는 가장 능력있고 강한 사도였던 것이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하늘의 영광을 누릴 자답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답게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답게 살라는 뜻이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
고난중에서도 핍박중에서도 번영하는 중에서도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자의 신분을 잃어서는 안된다.
선비는 가난해도 품격을 지키며 의를 잃지 않고, 영달해도 도리에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다.
성도들은 가난해도 믿음을 지키며 영달해도 믿음의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능력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성공하고 유명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다.
착각하지 말라
바울처럼 옥에 갇혔어도 하나님의 소명을 잃지 않고 죽음이 와도 부르심의 소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나됨의 덕목은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이다
여기서 겸손과 온유는 한묶음이다.
겸손과 온유는 마치 형제같으며 맞잡은 두손과 같다.
겸손과 온유는 함께 행할 때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겸손은 말 그대로 자기를 낮추는 것이고 남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다.
겸손의 반대는 남을 나보다 더 못하게 여기며 깔보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끄집어내고 장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나보다 상대를 존중해주고 다른 성도들의 장점을 보고 칭찬해주고 단점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겸손이다.
왜 교회에서 겸손해야 하냐하면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다.
각각 다른 은사에 대해서 서로 인정해주지 않으면 교회에서 은사각축전이 벌어지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은사를 가지지 않았다고 비난하기보다는 남을 섬겨야 하고 내가 갖지 못한 은사를 가졌다고 시샘하고 질투하기보다는 인정해주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은사는 서로 돕고 도와주므로 교회를 세워주는 역할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온유는 상대방이 나에게 준 상처에 대처하는 능력이다.
사람과 사람관계는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사이라 해도 완벽하지 않으므로 상처가 있을 수 있다.
온유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부드러운 마음이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는 자기 백성들이 자신에게 준 상처를 다 보듬고 껴안으며 그것을 사랑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백성들에게 받은 수많은 상처를 인간성이 좋아서 다 용서하고 용납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모세의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다.
모세의 온유함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순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모세는 그의 백성들을 용서했던 것이다.
만일 모세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그의 백성들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비난과 돌팔매질을 받을 때마다 그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앞에 절대적 순복을 의미한다.
죽던 살던 하나님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절대복종이다.
이것이 온유함이다.
온유함은 나를 상처준 자를 진심으로 용서하되 하나님에게는 절대복종하는 것이다.
남에 대한 진정한 용서와 용납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복하지 않는 자는 누구도 용서하거나 용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겸손과 온유는 함께 가야 한다.
교회는 겸손과 온유의 덕목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오래참음의 덕목은 역시 성도들간의 잘못과 허물을 지켜보는 능력이다.
조금만 잘못하는 것을 보면 못참는 성도들이 있다.
그래서 그때 그때 지적해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상대의 잘못을 고치지 못한다.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오래 참아주는 미덕이 더 교회에 필요하다.
물론 잘못된 것을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오래참음의 미덕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둘 다 필요한 일이라면 더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젊었을 때는 고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던 것들이 나이가 들면 고쳐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인간의 결점은 마치 깊이 박힌 못같아서 그것을 빼내도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완전한 변화는 없다.
그저 변화되도록 몸부림칠 뿐이다.
성도가 완전해지는 방법은 죽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허물도 실수도 결점도 다 사라지고 거룩한 영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에게 올라간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오래 참아주어야 한다.
오래 참음은 바로 사랑안에서 가능하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주시고 우리를 죄악에서 살려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의 죄를 오래동안 참아주시고 봐주신 그 사랑이다.
하나님이 나를 참아주셨으니 나도 다른 성도들의 허물이나 잘못을 참아줄 수 있는 것이다.
겸손과 온유 그리고 오래참음과 사랑은 모두다 하나됨을 향해 가야 한다.
이 네가지 덕목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성도들에 의해 부지런히 실행되어져야 한다.
지상교회의 제일 중요한 특성은 하나됨이다.
이 하나됨이 바로 평강인 것이다.
이 네가지 덕목으로 하나님과 죄인을 하나되게 하시고 평강으로 묶으신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덕목과 하나됨을 실천함으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지 않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아무리 위용을 자랑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많은 선한 행위를 했더라도 네가지 덕목으로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첫사랑)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에베소교회는 주께 책망을 받았다.
첫사랑(그리스도)을 잃어버렸다고!
소아시아의 에베소교회는 행위 수고 인내 이단분별력등 경력이 화려했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잃어버린 교회요 평안( ειρη?νη)이 없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강이 떠난 교회는 단지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건물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