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제가 성화 이야기를 8개의 시리즈로 우리 카페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뒤로도 종종 성화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그런데 성화는 될까요?”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성화는 기독교 핵심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의 신실한 크리스찬을 보더라도 원래 가진 성품이 좀 좋은데다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는 그 이전보다 쪼끔 더 나아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크리스찬은 여전히 한 성질하는 크리스찬으로 남아 있는 크리스찬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 보다 나이 사십이면 불혹이라고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 대부분 웬만해선 원래 성격이 바뀌지 않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죠. 나이 40이 아니더라도 벌써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웬만큼 굳어졌기 때문에 변화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십여 년 전 이야기 입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성화이야기가 정립이 되어 있지 않은 때 이었습니다.
저희 부친께서는 장로님이셨는데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수개월 동안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다가 견디다 못하여 한마디 하셨습니다.
‘니는 변하더나?’ 갑작스런 말씀에 저는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다시 한 번 그 느낌이 오네요.)
이십여 년이 지나 곰곰이 생각 해 보면 부족하지만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저에게 적합하도록 계속 성화를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저의 부족한 부분(모가 남)은 저를 고통 속으로 몰아 넣으셨고 그 고통 속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도 느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가 난 저를 발견할 수 있고 앞으로도 고통 속에서 계속 모가 난 부분을 꺽어 나가시겠지요.
어쩌면 성화되지 못한 중직자의 모델을 저희 부친 속에서 발견하였을 지라도 얼마나 많은 중직자들이(저를 비롯해서) 성화되지 못하여 자기가 시뻘겋게 살아 있는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화가 되지 않는 사람은 그 단계에서 그 단계에 맞는 고통을 계속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성화되지 않음에 기인해서 오는 것임을 깨닫고 성화에로의 부름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강제하시기 때문에 계속 그 고통 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많은 사람들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성내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 정도면 참을 수 있다고 그냥 버티고 있지요.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전에도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쇠미한 경고의 음성에 즉각적인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경고의 소리(고통)가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화를 가만히 생각 해 보면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심성이 좋아서 4 혹은 5에서 출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6이나 7쯤 되는 경우와 어떤 사람이 1부터 시작하여 5정도에 도달한 사람이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보면 6이나 7정도 된 사람이 더 많이 성화가 된 것처럼 보이나, 상대적으로 보면 5정도에 달한 사람이 더 많은 성화를 겪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겉모습만 보고 성화의 정도를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겠죠.
어떤 사람은 단기간에 확 변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기적으로 성화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보면 구약의 인물들은 주로 장기적인 성화의 단계를 거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인물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로 갑자기 변화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성화라는 것이 연세가 있으신 주변 인물들을 볼 때 꼭 모두가 다 10의 단계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맞는 성화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어떤 상태를 보고 구원 여부를 속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성화의 단계를 적게 거친다고 좋은 것도 아니며, 더 많이 경험한다고 더 나쁜 것도 아니지요.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역사에 의하여 필요한 만큼 성화를 이루어 나가시겠지요.
그러면 누구에게는 성화의 단계를 10까지 가고 누구에게는 3밖에 가지 않을까요.
속단하기 어렵지만 하나님 나라에 큰 그릇, 작은 그릇, 귀히 쓰는 그릇, 그렇지 않은 그릇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단계를 몇 단계 밟았느냐에 따라서 그에 합당하게 쓰임 받게 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깊이 성화의 단계를 밟은 사람은 더 크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이며, 얕게 성화의 단계를 밟은 사람은 그에 맞게 하나님께 쓰임 받지 않을까 싶네요.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쓰임받을 수만 있다면...)
극단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성화를 이룰수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그러워 지시는 것이 아니라 더 엄격하여 지심을 느낍니다.
모세에게 그렇게 했고, 다윗에게, 요셉에게, 믿음의 지도자에게 그러했습니다.
‘믿는 자이기 때문에 핍박이나 고난이 더 심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성화의 두 번째 모델에 속하겠지요. 초등학생에게는 초등학생 정도의 책임을 요구하시지만 대학생에게는 대학생에게 맞는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저는 한 번씩 그런 것을 느끼는 데 남들이 나쁜 일 다 해서 그것도 자주하고 있어서 저도 혹하여 넘어가서 어쩌다가 한 번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벌이 임하지 않는 것 같은 데 저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벌이 반드시 따르게 되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억울하다고 느껴지지만 가만히 생각 해 보면 믿는 자에게 더욱 엄격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9)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렇게 하신 후에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고통은 발을 씻는 고통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대신 십자가에서 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미 목욕을 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발을 씻는 고통만으로도 우리의 성화를 이루는 데는 충분한 고통이며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 데 충분한 고통입니다.
이러한 고통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진 것은 눈물 근심 없는 천국의 소중함, 하나님 자녀 됨의 소중함을 더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에게는 반드시 성화를 강제하신다는 것입니다.(어느 단계까지 인지는 몰라도)
성화는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것으로 성화이야기는 진짜 끝을 맺습니다.
그 동안 두서없는 글들을 많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른 방향에서 문제제기를 해 주셔서 성화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신 사라의 웃음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종교적 모습으로 1, 2, 3, 4......점수를 매긴다면, 전 몇점인가 한번 생각해 봅니다.
1점은 면할런지요...초딩은 아닐런지...
영적으로 빵점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보혈만을 의지합니다.
영적으로 빵점이기에 십자가 사랑 이야기에만 머물고 싶습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 품 속이기에...
바쁘신 가운데서도 예수님 안에서 자주 뵙게되길 또 소원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