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삭개오

조회 수 1156 추천 수 37 2009.03.05 16:30:04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

이라는 누가복음 19장은 너무나 유명한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 관한 해석들이 의외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견해는 '잃어버린자를 찾아서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 이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과 '회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러나 또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이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다른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누가 공동체에서 일어난 편견과 오해에 대하여

삭개오를 변호하려는 것이 목적이라는 주장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으로 죄인인 삭개오가 부당하게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던 사회적인 폭력에

대하여 누가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여기에는 종교적인 기득권층에 의하여 무고하게 죄인취급을 당했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하여서 사실은 의로운 자였다는 입장을 예수께서 확인했다는

것으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번역의 오해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본문을 통해서 이런식으로까지 다양하게 접근을 하는 학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지식이 가져오는 불행과 오만이 진리를 가리우는 것을 보면서

진작에 신학에 대하여 발을 빼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한가지 공통적인 해석들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안에서 불고있는 번영복음과 깨끗한 부자 또는 청부론을 주장하는

성공하는 목회자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부분입니다. 또한 강남의 부자들에게

적잖은 위로를 주는 구실을 제공하는 좋은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8. 삭개오가 서서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쉬운 성경)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표준새번역)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이르되, [주]여, 보소서, 내가 내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내가 거짓 고소하여 어떤 사람에게서 무엇이든지 빼앗았으면 그에게 네 배로 갚겠나이다, 하매(흠정역)











  

삭개오가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재산의 절반이나 가난한자들에게 주겠다한것과 어떤 사람에게 억지로 빼앗았으면

네 배로 갚겠다는 것을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삭개오는 그렇게

억지로 탈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을 하는 것은 결국 깨끗하게 정당하게 돈을 벌은 부자들도 있다는

면죄부를 발급하는것이 깔려 있는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는 또한 이와 비교해서 다루는

부자 청년에 대한 것도 포함이 됩니다. 율법도 어릴때부터 잘 지켰다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돌아간것을 비교하면서

삭개오는 그렇지 않았기에 말하자면 양심선언을 한 것이고 주님이 그것을 입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를때에

꼭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주지 않아도 얼마든지 주님의 제자가 될수 있다는것을

은근히 역설하면서 교회안에서의 부자들에게 안심과 위로와 격려를 주는것으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부자들을 정죄하거나 악하다고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속해서 부자와 가난한자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난하니까 무조건 착하고 의롭다는것도 당연히 아니올시다.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돈에 대하여 부자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 까지 기록을

남겼다는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부자와 가난한자와 병든자와 권세자들을 편을 가르거나

구별해서 구원을 주시기도 하고 거절하시기도 하는 모습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본성인 외모로 판단하는 개념을 아주 처음부터 무시하십니다.



당장 생각나는것이 뭐예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을 비유로 하십니다.

이달리야대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혈루증으로 고통하는 여인(율법으로는 부정한 여인)을 치유하시고

모두들 더럽다고 피하는 문둥병자나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구원하시는 모습이나....



다시한번 정리하자면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죄 아래 팔렸다는것을 가르칩니다.

부자와 가난한자와 신분과 혈통과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리고를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관심을 끈 것은 모든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멸시하던 한 사람 '삭개오' 였습니다.



거기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만

예수님의 마음을 잡은사람은 삭개오라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런데 마침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표준새번역)



2. 보라, 거기에 삭개오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리들 중의 우두머리요 또 부자더라.


(흠정역)



삭개오는 세리장이며 부자라고 묘사합니다.

당시의 정황을 면밀하게 살피지 아니하여도 오늘날에도 세금을 다루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지 않습니다. 짧은 시간에 부를 얻는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확인할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기업에 세무조사를 하게 되면 우리는 얼마든지 유추할수 있지요.

국세청에 다니는 사람들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합니까?



세금에 대하여는

영세업자들역시 항상 골치가 아픈법입니다.

매번 챙겨야 하는 각종 세금 계산서때문에 회계사가 바쁘고 연말 정산때는

직원들이 밤샘 작업을해야 업무가 끝나지 않습니까?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돈이 얼마나 많습니까?

당연히 그런 직업에 종사하다보면 부당한 돈에 전혀 관여하지 않을수 있을까요?

마구 보이는데요? 검은 돈이 임자가 없이 돌아 다니는게 보이는데

못 본척 양심을 속이지 않는 대단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돈앞에 안무너지는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세리 마태역시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욕을 먹었는데

세리장이 삭개오가 과연 정당하게 부자가 되었다는 발상이 말이나 될까요?

예수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개오에게 교제의 손을 내미십니다.



5.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흠정역)







삭개오의 집을 찾아가시는 정도가 아니라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집에서 하루 신세를 져야겠다는 주님의 파격적인 요청을 들은

주위의 사람들의 반응과 삭개오의 반응은 엄청나게 다릅니다.



삭개오는

생각지도 못했던 주님의 말씀에 얼마나 기뻤는지 당장에 나무에서 내려와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만,

다른사람들은

오히려 주님을 원망하거나 야유하고 있는 반응이었습니다.



7.
  

그들이 그것을 보고 모두 수군거리며 이르되, 그가 죄인인 사람의 손님이 되려고

들어갔도다, 하더라.(흠정역)





죄인이라고 삭개오를 모두가 말합니다.

만일 어떤이들의 주장처럼 삭개오가 비록 세리장이였지만

가난한자들을 토색하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착취하지 않았다면

그를 가리켜서 죄인이라 하지 않을것입니다.



그런 예가 백부장 고넬료를 봐도 알수 있으며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 하고 감탄하셨던 백부장을 봐도 알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로들이 백부장을 위하여 주님께 저가 우리를 위하여 좋은일을 하였다고

적극적으로 추천한 것을 보듯이 삭개오를 향하여 죄인이라 하지 않았겠지요.



이런점에 의하여 삭개오가 깨끗한 세리장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삭개오를 죄인 만들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정확하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원 저작자이신 성령을 넘을수 없습니다.

누가라는 기록자를 통해서 성경을 남기신 성령의 의도를 무시하면 안됩니다.



많은 종교비평가들과

학자들이 자주 성경을 비평할 때 그런 선입견으로 시작을 합니다.

누가공동체로 한정하며서 누가의 개인적인 어떤 의도가 있는 저작이라는 식으로

접근을 시도하니까 복음이 이상하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차라리 단순하게

성령을 의지하여서 읽고 묵상하는 보통 사람들의 눈이 오히려 복음을 복음으로

들어나게 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분과 출신이 무엇인가를

보아서도 우리는 충분하게 알수 있습니다.

성경학자인 아볼로를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데려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하게 가르쳤다는것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오늘날 범람하는 신학박사들의 논문이나 성경 해석들에다가

너무나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과 믿음에 대하여 혼란이 가중되었고

역사적으로 한 사람의 저작에 의하여 교회가 엄청난 권위를 부여받게 되어서

오늘날과 같은 현대식 교회가 과거 중세의 교회의 타락처럼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지금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며

목회자의 권위가 개혁의 초점이 된것을 부인할 수 없는 이유가

사실은 과거의 한 신학자의 주장때문에 시발되었다는 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충분히 갖어야할 권위가 어쩌다가 교회라는 것에 집중이 되었는지요.

교회라는 우상을 부수지 않는 한 더이상 개혁은 불가할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선봉이었던 인물들이 결국은 중세 교회라는 우상을 철저하게

버리지 못한 결과가 지금 오늘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고서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는 자신이 그동안 섬기던 물질 신앙에서 벗어나 오직 예수를 믿는 참신앙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물질을 향한 집착과 물질에 대한 노예 에서 물질을 다루는 주인으로

바뀐것입니다.



돈에 대하여 갖고 있었던 환상을 깨버린 것입니다.

이전에는 돈만이 자기를 구원하고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참된 구원자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삭개오의 반응을

우리도 삭개오를 본받아서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자로 가는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반드시 교회를 통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삭개오가 바친 재물을 받았습니까?

그리고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언제 주님께 바친다고 했습니까?

분명히 가난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영생을 원하는 부자 청년에게 네 재산을 전부 나에게 바치고 따르라 하셨습니까?

주님은 돈을 요구하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혹은 제자들에게 주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서 제자들이 걱정하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지요.



주님은 우리가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것을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 하되 은밀하게 하라고 말입니다.



교회가 돈이 필요한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실 돈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건물이 너무 크기때문에 유지하려다 보니 돈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건물을 오늘날처럼 크게 지어야할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목회자도 그렇습니다.

목회자도 건강하거든 일을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자비량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목회 하지 말아야 지요.



왜 목회자가 거룩하게 설교 준비한다는 것으로 일을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성도들과 똑같이 생업 현장에서 일하십시오.

그런다고 성도들이 무시하지 않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믿음으로 일하셔야 합니다.

그리고도 그 마음에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거든 그때 설교해야 합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주시는 것이 가슴에 차고 넘칠 때

그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것이라면 관두셔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주님앞에 설때 책망받지 않을것입니다.



설교했다고 사례비를 왜 받습니까?

그것이 목회자의 설교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사례비를 받지 않고도 주님이 인도하시면

말씀을 전하시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굳이 건물을 짓느라 돈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자식에게 물려 주려고 애를 쓸 이유도 없지요.

그 자리를 얻으려고 힘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총회장 해보겠다고 부끄럽고 염치없는 짓을 왜하겠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일을 하다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전하였습니다.

동굴속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다가 그런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전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전합니다.



그에 비한다면 제사장들은 어떻습니까?

풍족한 삶을 누렸습니다.

백성들이 꼬박꼬박 바치는 것에서 십분 일을 취해서

먹을것 걱정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당시에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할 수 없는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매번 들이는 짐승들을 대신 잡아서 피를 보아야 했으며

불에 타는 짐승의 역겨운 냄새를 맡아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영적인 제사장들이라 주장하는 목회자들은

도대체 성도들을 위하여 어떤 수고를 하는지요?

이미 주님의 십자가로 폐하여진 제사제도를 계승할 이유도 명분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하~

성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전하신다고요?

정말로 그렇게 하시는 귀한 분들이 있겠습니다만

과연 오늘날의 교회안에 같혀계신 정통주의 목사님들이

얼마나 그러한 수고를 하는지...

주님은 아십니다.

배를 타면 그 배가 어디로 가든지 갈수 밖에 없지요.

이미 세속화된 교단주위와 교권에 목을 매단 현대교회가

타고가는 배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삭개오와 주님의 만남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기록을 보면서도 재산을 팔아서라도 교회에 헌금하자?

교회에 헌금하는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

지금도 어느곳에서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이러한 독을 가르치고 있겠지요.



삭개오는 주님이 여리고에 오시는것을 알고 보고자 하여 달려갔습니다.



3.
  

그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보고자 하되 키가 작으므로 밀려드는 무리로 인해

볼 수 없어서





4. 앞으로 달려가 그분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그분께서 그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기 때문이더라.





모든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삭개오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도 마음을 열고 대화할 친구가 없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상태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던 부를 얻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그는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그를 위로할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는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을 보인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입장이 그렇습니다.

스스로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것을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구원이란 예수를 만나는 사건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자 달려간것처럼....

사람들 때문에 혹은 사회적인 통념때문에

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어서 사람들 앞에 나설수 없는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앞에 달려 갔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한번만이라도 가까이서 보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보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재산을 바친다고 할까 하거나

남의것을 빼앗은 것을 네 배나 돌려준다고 할까를

생각하거나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보고 싶었습니다.

자기는 명백한 죄인이었기에

주님앞에 당당하게 나설수는 없었지만

이번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를 구하거나 긍휼을 구하거나 한것이 아닙니다.

그를 보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놀림이 될줄 뻔히 알지만....



사람들에게 죄인이라고 욕 먹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사람들의 판단이 삭개오를 막지 못한것입니다.

그래서 뽕나무까지 달려가서 올라간 것이며....

주님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미 주님을 삭개오는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주님께서 삭개오를 올려다 보셨습니다.

삭개오가 주님을 부른것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주님을 보고자 한것이며....

주님은 그런 삭개오를 친히 올려다 보셨고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모두가 더럽다고 욕하며

죄인이라 불렀을 삭개오의 이름을 예수님이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사 위를 보시고 그를 보며 그에게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반드시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노라, 하시니



삭개오야



주님이 부르시는 이름입니다.

삭개오야



베드로를 부르시듯이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삭개오야



얼마나 불리워 지기를 원했던 이름입니까...



아무도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습니다만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자기 집에 오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에 (필자 생각-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뻔 했습니다.)

그 순간에 모든 어두움이 물러가 버렸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임하면

거기에 아무것도 버틸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더러움을 재거하십니다.

주님 말씀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죽은자를 살리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각색병이 고쳐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상한 심령을 고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심입니다.



거기 모인 수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이 들린 것이 아닙니다.

오직 나무 위에서 주님을 보기를 갈망했던 단 한사람,

삭개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글을 읽는 모두에게 주님의 말씀이 임하기를 원합니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 교회는 주님의 이러한 말씀이 들려져야 합니다.

진정으로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져서 삭개오처럼 주님을 만나도록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목적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닮아가는것이

교회가 되어서는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쫒아내고

능력도 행하고 병도 고치고 많은 권능을 행하였어도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도록

각성해야 합니다.



지금이 그럴 때입니다.

성도들이 깨어서 정말 간절함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갈망한 삭개오처럼 즉각적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거듭남의 결과인 새로운 삶의 변화가 없이

교회만 다니고 주일성수만 하고

직분때문에 기도하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만

정말로 그의 삶속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없다면 심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내적인 성령의 열매가

인격적으로 나와야 합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이

부당함으로 이룬것을 고백하였습니다.

변명한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면 어둠에 있던 옛 모습들이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면에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언어가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지는것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의 제일가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되묻습니다.



결국은

율법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이웃은 없다는 스스로의 증거입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스토리를 들려 줍니다.

선한 유대인이 아니라

선한 제사장이 아니라

선한 레위인이 아니라

이방인이며 죄인으로 멸시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선하다고

주님이 깨우쳐 주십니다.



오늘날

종교적인 모습과 전통에 숨어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사처럼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통해서 우리를 돌아보라고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2009/03/05.ⓒ사랑그리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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