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14가 행위구원을 말하는지요?
[질문]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2-13) 신자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긍휼을 베풀지 못했다면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고 해석해야하나요? 본문의 말씀 뜻이 제겐 그렇게 다가옵니다. 게다가 저 구절 바로 뒤에 흔히 우리가 잘 아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약 2:14)가 나와서요. 인간의 선한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 구절들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습니다.
[답변]
성경해석의 치명적 오류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 가장 자주 저지르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오류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한 절씩 떼어서 해석하려 드는 것입니다. 비교적 길이가 짧은 신약의 서신서들은 더더욱 한 절씩 떼서 봐선 안 됩니다. 모든 구절을 반드시 그 서신의 주제와 전체 내용과 연결해서 따져봐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상기와 같은 의심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얻는 것으로 배워 왔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아무리 살펴도 마치 선한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성경 해석에서 가장 먼저 감안해야 할 요소는 저작 당시의 상황과 저자의 의도를 확인하여 그 책이 강조하려는 주제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 바탕에서 각 구절이 속해 있는 앞뒤 문맥의 내용과 연결 비교하여 본문을 해석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도출해낸 해석이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은 물론 그분이 계시해준 영적 진리와 부합되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바꿔 말해 이 구절들이 행위 구원으로 여겨지면 일단 잘못된 해석이라고 판단하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해석이 나오게 되었는지 역으로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즉,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당연히 믿음의 구원이므로 앞뒤 문맥에서 그것을 뒷받침하는 힌트나 부연설명이 있는지 잘 따져보면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의 주제와 내용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야고보서는 이미 예수를 믿은 즉, 구원을 얻은 신자를 대상으로 어떻게 성화를 이뤄나갈 수 있는지를 적은 책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구원 진리를 설명한 책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시작되자 유대인 중심(1:1 열두지파)의 교인들의 믿음이 시들해지고 사랑의 교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재림을 소망하면서 고난을 이기고 믿음을 삶에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사랑과 화평의 교제를 회복할 것을 권면하는 책입니다.
당시 교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오해하여 형식적인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1:22-27, 상기 질문한 구절 참조)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성도들 간에 사랑이 식었고(2:1-13) 심지어 서로 간의 말과 행동마저 추악해져 교회 안에 참 된 성도간의 교제가 사라졌습니다.(3:1-4:3)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어떻게 하면 믿음을 현실의 삶에 적용 실천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어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신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2,3)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미 구원 얻는 신자들로 외부의 핍박을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말하려고 서신을 작성했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1:6)는 권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라고 전제한 것입니다.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18) 서신을 읽는 독자를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자라고 설명합니다. 진리의 말씀은 당연히 예수님과 그 십자가 복음을 말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낳았다고 했으니 하나님의 중생케 하는 은혜를 입은 자들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용한 구절들이 적용되는 대상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야고보서 해석의 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5) 특별히 이 구절이 야고보서를 바르게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앞에서 말한 진리의 말씀을 받는 것으로 십자가 복음을 말합니다. 구약의 율법이 아닙니다. 서두에서 야고보서는 유대인 신자들을 대상으로(1:1-열두 지파) 작성한 서신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그들은 모세의 율법 외에도 장로들의 유전으로 만든 온갖 세부 규정들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율법이 그대로 준행하는 자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큰 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서기관들을 향해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눅11:46)있다고 꾸짖었습니다. 대신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고 약속하셨습니다.(참고로 여기서 짐은 현실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종교적 멍에였습니다.) 나아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가르침과 이신득의의 교리를 오해하고 교회 안에 반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으로 지난 모든 죄를 용서 받았고 천국 영생이 보장되었기에 구태여 선을 열심히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여기고 성화에 등한히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없다”(롬6:1,2)고 경고했듯이 말입니다.
상기 약 1:25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복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들여다본다는 것은 자세히 주의 깊게 따져 보는 것을 뜻합니다. 또 그런 자는 잊지 않고 실천하는 자라고 합니다. 복음의 진의를 잘 알면 죄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땅히 선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복을 받는다는것도 당연히 구원 받는 복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자가 성화를 이룸으로써 얻는 복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2:1도 분명히 선언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또 그래서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2:8)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서기관들의 질문에 율법의 최고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한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구원 얻은 성도가 삶에서 반드시 실현해야 할 최고의 법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의심스런 구절들
이제 질문하신 구절들을 살펴봅시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2-13)
성경해석의 원칙에 따라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에 비추어봐야 합니다. “자유의 율법”은 1:25와 2:8을 다시 받아서 말한 것으로 “십자가 복음”을 뜻합니다. 그 율법(복음)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라고 합니다. 우선 심판과 구원은 오직 예수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또 “~~ 자처럼”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복음의 진리를 정확히 아는 자답게 행하라는 뜻입니다. 정말 복음 안에 들어온 자라면 마땅히 또 자연스레 행해야 할 바를 말합니다. 문제의 13절도 바로 앞에서 전제한 이런 의미에 따라 해석해야만 합니다.
저자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웃 사랑을 강조하려 했음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6:14) 둘 다 긍휼하지 않는 사람을 심판을 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남을 용서하면 신자가 범한 잘못도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의신득의의 교리를 오해한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십자가 구원 안에 들어온 참 된 신자라면 이웃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긍휼을 베풀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긍휼이 없다면 자유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긍휼이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기겠다는 것도 팔복 강화에 포함된 말씀으로 이미 천국을 차지한 자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일관된 맥락에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아무 이익도 없다고 했고(2:14), 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2:17) 강조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2:18은 단순히 문자적으로만 따져도 이런 뜻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2:18)
사도는 두 종류의 ‘믿음’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서신을 읽는 신약 신자들이 이미 소지하고 있는 믿음으로 구원이라는 단어와 대체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구원과 행함이 없는 구원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함이 있으면 구원이 있고 행함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한 저자가 동일한 서신, 그것도 비교적 짧은 글 안에서 여러 주제로 그것도 서로 모순 상충되는 내용을 말할 리는 없습니다. 또 동일한 단어로 여러 뜻을 표현할 리도 없습니다. 자유의 율법을 오해한 유대인 신자를 대상으로 성화를 계속 강조하는 서신임을 알면 이런 의심들은 쉽게 풀립니다.
다른 성경이 말하는 바는?
마지막으로 이런 해석을 역으로 성경 전체가 말하는 영적 진리와도 비춰봐야 합니다. 특별히 가장 문제가 되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를 요한일서 2:1-6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그 의미에서 아무런 모순 상충이 없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1-6)
참고로 야고보서가 신약의 정경에 포함되는데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 두 가지만 들면 첫째는 질문하신 것처럼 마치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 같아서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첫째 문제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성경 전체와 앞뒤 문맥을 자세히 비교함으로써 해결됩니다. 둘째 문제는 십자가 은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자체가 오히려 성화를 강조하는 내용임을 서신서 자체가 입증하는 뜻이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을 절대로 한 절씩 따로 떼어서 이해하려 들지 말고 책 전체의 주제를 붙들고서 앞뒤 문맥과 비교해 가며 성경을 해석하는 습관을 꼭 들이시기 바랍니다.
5/16/2018
한국의 한 기독청년에게서 개인적으로 들어온 카톡 질문입니다.
모두가 궁금해 하는 내용이기에 함께 나누고자 올립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