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진정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마음이 될까요?
[질문]
평소 나의 건강도 돈도 시간도 다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일을 하다가 경제적인 문제로 손실을 입으니 매우 화가 나고 세상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니 돈이 주님의 것이 아니라 내 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머리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데 마음으로는 아니었나봅니다. 이런 상태가 참으로 힘들고 평안하지 못합니다. 그토록 오래 주님과 교제했던 시간이 오히려 억울한 것 같아 힘듭니다. 지금 저의 기도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까지도 다 주님의 것이라는 깊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범사에 마음 깊게 까지 인정하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을까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곤혹스러워하고 궁금해 하는 주제입니다. 참으로 힘들고 민감한 문제라 딱 부러지는 해답은 없습니다. 무조건 말씀보고 기도하라는 것은 실제적인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다 그렇게 해보고도 해결이 안 되니 질문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모든 신앙 문제에 매뉴얼 식의 정답은 없지만 제가 그동안 체험하며 느꼈던 것에 바탕을 두고 나름 최선을 다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우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돈 때문에 속이 상한 것을 두고 믿음이 왜 이렇게 약한지, 왜 나는 평안을 얻지 못하지, 내가 돈을 밝히며 살았나보다, 식으로 자책감이나 죄책감에 휩싸이지 마십시오. 분명히 그 돈은 질문자님의 것이고 손해 입힌 것은 상대가 아주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감정이란 어떤 일에 대한 일차적 자연적 반응입니다. 상대가 미운 마음,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어떤 감정적 동요도 안 생기거나, 평안을 금방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좀 걸립니다. 조급하게 여기는 것이 오히려 더 영적으로 힘들게 만듭니다.
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온전히 그분께 의탁하고 평안을 얻으려면 사실은 이런 식의 어려움을 많이 겪어봐야 합니다. 돈이 결코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이 아님을 하나님이 그 문제를 통해 주시는 다른 차원의 기쁨 은혜 선하심 등을 실제 체험을 통해 자꾸 깨달아봐야 합니다.
이번 일만 해도 시일이 조금 경과한 후에는 그 정도 손해에서 그친 것이 너무나 다행인 것이 더 큰 손해나 또 다른 나쁜 일을 막게 해주었기 때문이라거나, 그 사람이나 사건으로 연관된 다른 일에서 더 선한 결과를 맛보았다는 간증이 반드시 생기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조급하게 여기지 말고 스스로 자책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자기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란 진리는 다 잘 압니다. 그래서 재물이나 세상의 것에 미련을 가지지 않고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신자도 세상에 속하지는 않아도 세상 안에 살기 때문에 돈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돈이 세상을 움직이기에 돈은 천국가지 전 까지는 세상 안에 살아야만하므로 신자에게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신자도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그분의 방식대로 벌어서 그분의 목적에 따라 그분의 방식대로 소비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지 돈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질문자님이 돈을 사랑하거나, 돈을 목표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죄책감에 싸일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대로 사는 것인데 그러려면 사실상 자기 것을 자꾸만 잃어봐야 합니다. 자기 것이 많이 없어져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 구태여 그것에 목매달고 염려 불안해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만큼 손해가 나도 다른 일에 큰 지장이 없지 않습니까?
자연적으로 생기는 감정적 동요는 물론 하나님에 대한 의심 불신도 많은 문제 고난 가장 좋기는 현실적 실패를 통해서 그분과 씨름하여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만 합니다. 자주 넘어지더라도 그분 주시는 힘으로 일어나서 그분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진전해야만 합니다. 결국 믿음의 승리에도 지름길은 없고 반드시 신앙 연륜이 쌓여야만 합니다.
인생은 어느 누구도 출생과 죽음을, 시작과 끝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럼 그 중간의 삶도 자기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무덤에 들어갈 때는 아무 것도 갖고 가지 못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꾸 잃어가는 체험을 쌓아야 내 것이 아니라는 실감이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또 출생과 죽음의 중간인 이 땅의 삶에 어떤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할지도 점차 뚜렷해집니다.
내가 통제를 못하기에 그 중간에 생기는 모든 것도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돈이 중요하지 않고 돈으로 생기는 감정적 동요가 죄라는 뜻이 아닙니다. 돈이 내 삶을 주관하지 않고 참 만족과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내 인생에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이가 누구인지, 최소한 누가 내 인생을 통제하는지 만이라도 분명하게 정립해 놓아야만 돈에 대한 미련이 (점진적으로 그것도 천천히) 줄어들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질문자님도 다 아시는 것을 다시 정리한 것뿐입니다. 당장에, 아니면 최대한 빨리 마음의 평안을 찾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보고 기도한다고 쉽게 분노가 없어지고 평강이 오고 믿음마저 굳건하게 영글지 않습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영적 현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건을 더 이상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로 치부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사건을 생각하면 자연히 잃어버린 돈이 생각나고 그러면 또 화가 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그렇습니다.
지금 단계에선 가해자인 그 사람과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반드시 먼저 결정해야 합니다. 아예 원수로 삼아 철처히 복수할 것인지, 절교하고 말 것인지, 있는 둥 없는 둥 무심하게 대할 것인지, 그래도 앞으로 계속 만날 것인지를 결정하고 각 경우에 따라 현실적 대응책을 마련해서 그대로 실행하시면 됩니다.
신자라고 무조건 손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도 인간인지라 자기 가치관 인생관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모든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가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었을 뿐입니다. 만약 그 사람과 계속 만나야 한다면 용서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모든 것이 신자로서 행할 바가 아니라고 여겨지면 그 때도 용서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을 먼저 용서 최소한 용납부터 하면 잃어버린 돈은 나중 문제가 되고 차츰 평안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어떻게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인 지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먼저 가서 사랑을 베풀며 용서해줄까, 솔직하게 가서 이야기하고 그 사람의 처분에 맡길 것인지 등등 발전적인 방향으로 대책이 섭니다.
요컨대 돈을 택하지 말고 사람을 택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사람을 택함에 도무지 기분이 내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는 주님 안에서 그 사람을 택해야 합니다. 불신자니까 성도인 내가 용서해야지, 혹은 같은 성도니까. 아니면 도덕적 종교적 의무를 실현해야 하니까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 사람도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억지로(?) 생각을 바꾸라는 뜻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의 형편을 살펴보거나 그 사람의 입장에서 먼저 살펴보십시오. 자의반 타의반으로 질문자님에게 손해를 입힐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선천적인 악인 사기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든 그는 주님의 긍휼이 절실한 죄인입니다. 쉽게 말해 그 사람을 용납하려면 그 사람이 정말로 불쌍해져야 합니다. 그에게 가장 시급하게 또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인간인 나의 용서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용서와 사랑이라는 확신이 서야 합니다. 그 사람 자체가 지극히 불쌍해져야만 비로소 그 사람이 손해 끼친 내 돈에 대한 미련과 묶임과 분노에서도 풀어집니다.
그러기 위해선 나 또한 주님 앞에 큰 죄인이며, 이번 일로 돈에 분노하고 평안을 갖지 못하는 이 사실 하나만 보아도 내게 필요한 것이 주님의 긍휼뿐이라는 철저한 깨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나도 겨우 이정 밖에 안 되니 나부터 참으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그럼 그 사람도 불쌍해 보입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도 주님의 긍휼뿐이요, 나에게는 그와 동일한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긍휼이 절실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서!”라는 고백까지 절로 나와야 합니다. 평소에 내가 그 사람보다 인격적 도덕적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것까지 주님 앞에서 꺼내놓고 철저히 반성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의 긍휼이 나에게 임하고 영적 평안도 회복되어집니다. 그래야만 돈보다 사람이 택해지고 용서 최소한 용납이 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6,27)
바울 사도는 이번 일처럼 피해를 입은 일에 대해 분을 내어도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을 통제하지 못해서 오히려 자기가 상대에게든 하나님에게든 잘못을 범하는 자리에까지 가지 말라고 합니다. 마귀에 틈을 주면 그렇게 되는데 해가 지도록 계속 그 사건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달력은 해가 지면 새 하루가 시작됩니다. 새 날은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분노가 왜 오래 갑니까? 그 사건을 자꾸 곰씹어서 그렇습니다. 사건을 오래 생각하지 마시고 그 상대와의 관계를 나도 죄인이고 그도 죄인이라는 관점에서 앞으로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이어나갈지를 반드시 먼저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 다음에 어떻게 풀어갈지는 질문자님 스스로도 얼마든지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7/4/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