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왜 다윗을 못 알아봤나요?
[질문]
1. 하나님께서 악령을 보내셔서 사울을 괴롭힌 이유는 무엇인지요? 2.16장 후반부에 보면 사울은 이미 다윗을 만나 그를 곁에 있게 하였는데, 왜 17장 후반에선 그의 이름을 다시 묻는지요? 16-17장은 딱히 연대 순서로 적힌 게 아니란 뜻인지요?
[답변]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삼상15:23) 사울이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기에 그를 버렸다고 사무엘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미 전했습니다. 소년 다윗으로 왕위를 계승케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을 떠난 것은 너무나 당연했으나 구태여 악령을 보내어 괴롭게 만든 것은 조금 과하게 여겨집니다.
구약성경을 볼 때에 항상 기억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범사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믿었기에 자기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행하셨다는 관점으로 기록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기에 여호와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이에 대한 질문도 밀려 있어서 조만간 답변 글을 올릴 것입니다.)
세상만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욥기 1-2장에서 보듯이 사탄을 비롯한 그 부리는 악령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에서만 행동합니다. 사울의 경우에도 그 악신은 여호와가 부려서 그를 번뇌케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삼상16:14)
그렇게 하신 첫째 이유는 여호와가 사울을 이스라엘 왕위에서 내렸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백성들에게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운 것은 국민이 전쟁을 잘 치르는 왕을 떼쓰듯이 원했기에 그들의 요구에 맞춰준 것뿐입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원하였거나 좋아했던 왕이 아니었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로 당신만을 왕으로 섬기는 신정국가를 세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로 왕정제도의 단점들을 백성들에게 미리 계도시킨 것입니다.(삼상8장) 그러나 백성들이 하도 원해서 마지못해(?) 허락해주었습니다. 실제로 사울은 전쟁은 잘해도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통치 말기에, 실은 다윗이 골리앗에게 이긴 이후로 하나님이 경고한 대로 백성과 신하들에게 독선적 강압적으로 대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심중에는 처음부터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악령으로 번뇌케 됨으로써 처음으로 다윗과 연관을 맺게 됩니다. 사울로 다윗과 끈질긴 애증(愛憎)의 관계를 맺게 하고 또 백성들로 두 왕을 정확히 비교해서 사무엘로 경고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회상 실현하게끔 하려는 뜻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과 계획을 항상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연결해서 읽고 유대인들처럼 하나님 그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원컨대 우리 주는 주의 앞에 모시는 신하에게 명하여 수금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구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그가 손으로 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16:16,23)
주목할 사항은 악령이 사울을 항상 사로잡아서 종으로 부린 것은 아니고 간헐적으로 그를 괴롭혔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행적은 왕이 되기 전부터도 또 왕이 된 후에도 항상 불안 초조했고 일관성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만 봤습니다. 하나님께 순종을 잘 하다가 급변하여 불순종합니다. 사람들에게도 친절하다가 갑자기 난폭해집니다. 무당을 다 죽여 종교개혁을 이루고는 다시 엔돌의 무당을 찾아갑니다. 아들 요나단과 사위 다윗을 대하는 태도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우울증 내지 조울증의 전형적인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수금을 타면 나았습니다. 따라서 귀신 들린 것처럼 사탄이 직접 조종 농락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범사를 영적으로 판단한다는 뜻도 됩니다. 거기다 당시로는 정신질환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없어서 악신이 조종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신하들이 먼저 수금을 타면 나을 것이라고 권했습니다. 정신질환도 귀신의 훼방으로 판단했지만 어쨌든 찬양요법(music therapy)이 효과가 있다는 점은 경험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그런 효과가 있으려면 믿음이 순전하여 여호와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수금 잘 타는 자를 찾아보라고 하니까 곧바로 신하 한명이 다윗을 추천한 말을 보십시오. “소년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을 본즉 탈 줄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이다.“(18절) 다윗의 찬양 실력은 물론 믿음마저 사람들이 알아줄 정도로 출중했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와서 수금을 탈 때마다 악신은 떠나고 사울의 정신이상 증세가 완치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안정되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은 물론 백성들로부터 소년 다윗의 순전한 믿음과 인품은 더욱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그 후에 골리앗과의 전투사건이 이어집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삼상17:33) 블레셋과 대치하는 현장에서 사울이 다윗을 만나 처음 던진 말입니다. 언뜻 다윗이 이전에 자기를 위해서 수금을 타주었는데도 잘 몰라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따져보면 못 알아봤다고 해석할만한 확증은 없습니다. 단지 “너는 소년이고 골리앗은 용사”라는 말만 했습니다.
아마도 사울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 발작이 났을 때만 다윗을 만났기에 몰라봤을 수 있습니다. 귀신이 갖고 놀았다 쳐도 기억 못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니면 당시의 관습대로 왕은 병상에 누웠고 다윗은 장막 뒤에서 혹은 멀리 떨어져서 수금을 탔을 수 있으므로 다윗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싸우러 나갈 때와 승리한 후에 다윗을 만났을 때에 사울이 말한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군장 아브넬에게 “이 소년이 뉘 아들이냐?”라고 물었고(17:55), 아브넬이 모르자 또 다른 이에게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17:56)고 명했습니다. 다윗이 드디어 사울 앞에 엎드리자 다시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뇨”(17:58)고 물었습니다.
다윗의 이름을 물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누구의 아들인지가 궁금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큰 공을 세운 소년의 출신과 성장배경 즉, 지파와 가문과 아버지 이름을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 세 질문에서도 다윗의 얼굴조차 못 알아봤다는 의미는 사실상 없습니다. 물론 정확한 사실은 아무도 모릅니다. 정신질환 내지 악령의 작용으로 발작 때만 봤기에 전혀 몰라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소년 다윗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는데 단순히 그 배경이 궁금했을 수 있습니다. 요컨대 사울이 아예 다윗을 몰라봤다고 성경은 확정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4/1/2019
미국에 유학 와있는 한 기독청년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받은 질문입니다. 간단한 주제이지만 성경을 앞뒤로 폭넓게 읽고 이해하는 습관을 들이셔야 한다는점을 또 다시 강조하려고 함게 나눕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