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뜻은?
[질문]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야 주님께서 우리에게 길을 밝히 열어주실 것이다" "모두 다 내려놓고 주님께 나아가야 우리를 들어 쓰신다." "완전히 주님께 맡겨라. 그래야 기도의 응답이 될 것이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흔히들 하는 상기의 말들에 어느 날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 없고 죄 없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속으로 놀랐습니다. 제가 믿음이 부족한 것일까요? 저는 우리의 상태가 어떻든 주님께서 쓰시려거든 다 쓴다고 믿어왔습니다. 설령 완전히 믿기지 못해 근심할지라도 주님 뜻이면 기도가 이루어지고 안 이루어졌다 할지라도 그것을 뜻으로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게 재정적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운 환경에 처해지면 주님 앞에 나를 온전히 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제대로 일어서더라도 교만을 없애기 위해 주님께서 치신다는 등의 말을 덧붙입니다. 하나라도 못 맡기면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선포하니까 이런 말들을 자꾸 들으면 혹시 그 사람의 욕심이 아닌가 오히려 시험에 듭니다. 이런 말들에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저는 죄가 많은 사람인지라 온전하려고 노력해도 온전할 수가 없네요.
[답변]
질문하신 내용에 의하면 그런 말을 하시는 주변 분들이 그 뜻도 모르면서 틀리게 적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껏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나 성경 공부 모임에서 배워왔고 들었던 그대로 다른 이에게 종교적 격언 내지 계명의 형태로 앵무새처럼 문자적으로만 옮겨 전한 것입니다.
거기다 자신들도 온전히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다른 이에게는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식으로 너무나 가볍게 권면했습니다. 걱정 염려해주는 모습을 보였으나, 어느 정도는 진심일지 몰라도, 실은 그런 쉬운 계명조차 지키지 못한다는 비난 내지 정죄의 뜻이 내포되었습니다. 그런 진술들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한지 제대로 알았다면 제 삼자에게 쉽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충고입니다.
그럼에도 인용하신 말씀들만 따로 객관적으로 따지면 분명히 성경적인 진리입니다. 저도 설교나 글에서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질문하신 것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면 이 말씀들에 대한 성경적인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질문에 맞추어 세 가지 결론부터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상기 말씀대로 신자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신자가 평생을 노력해도 온전한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칠 때 신자가 100% 완전하게 될 수 있다고 전제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셋을 차례대로 살펴본 후에 “주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말의 온전한 의미를 추적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
하나님은 구약시대부터 당신의 백성들이 온전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되라고 명령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레위기 전체의 주제가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당신의 백성들더러 거룩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드리는 번제(燔祭)도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모든 부분을 각을 떠서 제단에 벌여놓고 불로 완전히 다 태워 없애라고 명한 것입니다.(레1장) 신자는 매일 자신의 악과 욕심을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제거해야한다는 뜻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하나님을 최고의 열성과 온전한 진심으로 사랑하려면 그렇게 되는데 방해되는 것들은 모두 다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후에 시내 산에서 제사장 백성의 언약을 맺었습니다.(출19:3-6) 율법을 수여한 후에 온 백성더러 그 율법을 온전히 준행하겠다는 약속으로 피 뿌림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출24:6-8)
그대로 준행하지 못하면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 준행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말씀을 성실히 순종해야 하고 그것이 제사장 나라가 감당할 소명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피의 제사를 요구했으므로 그렇게 당신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면 당신의 온전한 은혜를 받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도 됩니다.
실제로 그런 뜻이 실현된 케이스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민32:11,12)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동일한 계명을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에는 임박한 박해로 인해 실제로 죽음을 당할 것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순교를 담대하게 감내할 수 있을 만큼 자기를 온전히 버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또 말로 형제를 욕해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손과 눈이 실족케 하면 찍어 내버리라고까지 명했습니다. 형제에게 빚진 것 있으면 호리라도(일원까지) 갚지 않으면 옥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도 용서하고 원수도 사랑하라고 했으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고 가르쳤습니다. 강조하려고 과장된 비유를 했지만 주님의 뜻은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당신께서 온전히 거룩하니 신자들더러도 온전하여 거룩해지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4:8)
어느 누구도 성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신자들이 완전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기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으므로 그렇게 실족하게 하는 눈을 빼버리는 것이 간음하여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 차라리 좋다는 극단적인 가르침을 주었습니다.(마27:30) 그리고 나서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덧붙였습니다.
여자를 재산이나 종으로 취급하던 당시의 관습에 익숙했던 제자들이 주님의 이런 가르침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럼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반문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19:11,12)라고 답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는 음욕을 없애려고 스스로 고자가 된 자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율법의 문자적 준행으로 천국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는 조건을 단 뜻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천국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현장에서 간음한 여자도,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다가 또 새로운 남자와 혼인도 하지 않고 사는 사마리아 여인이나, 십자가의 오른 편 강도들 모두 그들이 거룩해지기 전에 구원을 베풀었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결코 선해질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그랬습니다. 또 인간을 율법대로 실천하라고 명한다고 해서 그대로 될 것 같으면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없는 자신을 두고 크게 한탄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3,24)
그래서 신자가 된 이후에도 육신의 법에 지지 말라고 독려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여기서 구원은 예수를 처음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칭의가 아니라 성도가 된 후에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것인데 농부가 땅을 경작하며 가꿔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cultivate)과 같은 의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12:4,5) 모든 성도는 피 흘리기까지 최선을 다해서 성화를 이뤄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러지 못할 때에 특별히 죄를 회개치 않고 계속 범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징계는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징계는 자식더러 거룩하게 자라라고 때리는 부모의 사랑의 매와 같으므로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고백을 보십시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2-14) 신자는 온전한 성화가 불가능해도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면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하신 최종 목적지에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언어의 표현의 한계
이 땅에서 어느 성도도 불가능한 일인데도 왜 성경이나 목사님 설교나 성도들의 권면에서 자기 뜻을 온전히 버리고 온전히 헌신하라고 가르칩니까? 또 그래야만 하나님의 기도가 응답이 되고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 이유가 있습니다.
비유컨대 여러 자식을 둔 아버지로선 모두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형제들 중에 성적이 좋지 않은 아들이 있어도 반드시 그렇게 말해야만 합니다. 더 이상 공부 안 해도 좋으니까 현재 네 성적에 맞추어서 아무 대학이나 네가 편한 대로 골라서 진학하라고 말하면 부모가 아닙니다. 아들들도 서울대학교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하고 공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공부를 최대한 잘 해서 최대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옳고 또 그래야만 자신의 유익과 성장이 되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형제가 일흔 번씩 일곱 번 잘못해도 용서해주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했을 때에 모두 다 온전하고도 쉽게 지킬 것을 믿고 당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계명에 담긴 당신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그대로 따르면 신자들의 성숙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기에 성경 말씀은 그 언어가 갖는 한계에 갇힐 수밖에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문장 안에 전체 의미를 다 담을 수 없으며 한두 가지 강조하려는 뜻만 담아내야 합니다. 그래서 특정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선 상징 생략 과장 비유 같은 문학적 수사법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알기 쉬운 비유를 들자면 “밤잠 아껴가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한 아버지가 그와 동시에 “쉬어가며 천천히 공부하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서로 상충되게 잘못 말한 것은 아닙니다.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끔 가끔 휴식도 취하면서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율법으로 명령하면서 그와 동시에 “율법으로는 모든 인간이 죄의 저주 아래 있음을 깨닫는 효과 밖에 없다”는 진리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런다고 서로 모순된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 믿음의 선각자들이 성경전체를 종합해서 체계적으로 교리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질문하신 말씀들은 신앙 진리에 틀림이 없고 살펴본 대로 성경적 근거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전할 때에 따로 떼어서 그것만 강조한 것인지, 아니면 앞뒤에 보완하는 말을 함께 말했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서두에 저도 자주 사용하는 진술이라고 했는데 저는 반드시 그 전후에 부연 설명을 붙입니다. 저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온전히 이룰 수 없고 오히려 쓰러질 때가 더 많으니까 그럴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절실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고 전제합니다.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이 내면에서 싸우기에 도무지 자신이 온전해질 수 없다고 한탄한 바울도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7:25,8:1) 스스로는 도무지 온전해질 수 없기에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에 져서 넘어져도 다시는 정죄함이 없기에 다시 힘을 얻고 얻고 성화를 이뤄나간다고 말합니다.
복을 받고 싶은 욕심이라면?
인용하신 것 같은 말씀들을 전해들을 때는 가장 먼저 그 사람이 어떤 뜻으로 말했는지 앞뒤 문맥에 따라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자주 넘어지는 것을 잘 알고 인정했다면 복을 받거나 기도 응답 받을 욕심이 앞선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뜻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한다는 의미를 교회생활에 충성하는 것으로 착각했거나,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나 기도 응답의 성경적인 의미를 모르거나, 스스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평소 많이 듣던 종교적 구호를 그냥 되풀이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온전히 가르치지 않은 목회자들의 잘못입니다.
최악의 경우 정말로 기도 응답과 복을 받을 욕심이 앞서서 자기는 실천하지 못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하나님이 우선 그에게 응답도 하지 않고 복도 내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쳐선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입니다. 설령 동기가 잘못되었어도 일단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따르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면 하나님 쪽에서 당신만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끔 성령이 역사해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무리 신앙연륜이 깊어도 자신이 수시로 넘어지고 결코 온전해질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만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신자보다는, 신앙에 대해 오해한 측면이 있고 말씀을 문자적 표피적으로 이해했어도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하는 신자를 하나님은 더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어주십니다.
온전한 헌신을 이룬 자들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온전한 헌신을 이룬 자들이 많습니다. 바울의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8:13)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으므로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자유롭게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변에 아직 그런 믿음에 도달하지 못한 연약한 형제가 신자가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는다고 오해한다면 바울은 평생 고기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했다면 바울은 틀림없이 그렇게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고후6:3)라고 담대히 선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음에 처해질 줄 알고도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기들을 지켜줄 수 있는 분이지만 “그리 아니할지라도” 우상에게는 절대 고개 숙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단3:18) 자기 생명까지 완전히 내려놨더니 하나님은 극렬한 풀무 불에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게 구원해주었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신약시대 최초로 순교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었습니다.(행7:60) 이 처형을 주도했던 바울이 예수의 극렬한 반대자였으나 성령의 은혜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자기도 순교를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수많은 초대 신자들이 자신의 생명까지 주님을 위해 바쳤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라, 온전히 내려놓아라, 온전히 맡겨라 등의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아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성자가 되라거나, 종교적으로 세상을 초월해서 득도한 자가 되라는 것도, 교회활동에 자기 가진 모든 것을 바치라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뜻과 계획과 심지어 현실적인 욕심마저 다 버리라는 뜻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제거하고 자기만 높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은 타락으로 이끈 바로 그 죄입니다. 세상만사는 반드시 자기 뜻과 계획대로 자신을 최고 높은 중심에 두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져야만 한다는 끈질긴 고집을 완전히 죽여야 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나가고 온전히 맡기면 기도 응답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자기 고집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역사하는 대로 모든 일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분의 길이 자신이 소원했던 방식과 상황과 선호도와 완전히 상반되어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했지만 내 뜻이 아니면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말씀하셨던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를 든 다니엘 세 친구들과 스데반과 바울 같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평소에 죄를 전혀 안 지었거나 자기 계획이나 욕심을 완전히 버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루 24시간 하나님만 바라본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따라 염려 불안해했고 아직도 남은 죄의 본성에 영향을 받아서 수시로 흔들렸습니다. 그러니까 살펴본 대로 바울이 그런 탄식을 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 뜻을 끝까지 고집하려는 욕심은 완전히 버렸습니다. 범사를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이끄는 대로 따랐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각자가 자기에게 맡겨준 하나님의 일에 평생을 두고 충성했습니다. 그 소명을 실현하는 일에만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 등 모든 것을 집중하니까 다른 일들에 욕심이나 고집을 부리지 않아도 되어서 온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전해지라고 명하는 진짜 이유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 모든 신자를 세상에서 불러내어 주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구원해주신 이유입니다. 그럼 모든 신자는 구원 이후에 당연히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고 종교적으로 경건해지는 데에 주력해선 안 됩니다. 기도하여서 하나님께 자기 문제를 해결 받아서 형통케 되는 복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해 모든 이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 앞에 엎드리게 하고 그분만을 머리로 모시고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실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자기를 높이는 본성이 많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니까 자기부터 완전히 죽이고 그분만 완전히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런 신자를 통해서 그분께서 반드시 이루시고야 맙니다. 연약하여 세상과 죄의 시험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나를 대신해 죽으신 십자가 예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 분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음을 재확인하고 위로를 얻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만 바라고 내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법에 의지하면서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며 지금껏 걸어온 것은 다 잊고 한걸음씩 그 목표를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빌3:12)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바로 천국에서의 영원한 부활 생명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는 정말로 사도로서 하나님의 큰일을 최고로 많이 했지만 그 본질은 오직 천국을 향해서 걸어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붙잡혔던 삶을 마친 후에 즉, 순교당하기 직전에 로마의 감옥에서 고백한 내용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이 땅에서의 신자의 삶은 오직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준비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더러 천국을 향해 걸어 가야하므로 천국에 들어가야 할 자답게 온전히 거룩해지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맛보며 천국 시민으로써 사는 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유혹에 넘어갈 것 같으면 손과 눈을 잘라버리라고 상징적으로 강조하신 산상수훈의 내용도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는 가르침으로 시작하여서(마5:3),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을 살아야만 갈 수 있다는 말씀으로 마쳤습니다.(마5:22-27)
“주여 주여”라고 부르기만 하는 자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까?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 풍부한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으로 다른 이를 잘 가르치는 자입니다. 또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도 – 기도하여 성령의 능력을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말씀과 기도에 능통해도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바꿔 말해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는 일생을 살지 못하면 천국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행위구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거듭난 신자라면 반드시 그 삶이 거룩하게 바뀐다는 것입니다. 부득이 함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영원한 참 생명이신 성령님이 좌정해 계시기에 순전히 온전히 그분을 따르면 반드시 하늘의 신령한 복과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이 충만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그 진리에 대해서 정확히 가르치지 않고 단순히 뜨겁게 기도해서 온갖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면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흔한 종교기관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바울처럼 목회자들이 현실적으로 아무리 궁핍하고 이름과 빛이 없더라도 주님께 받은 소명을 목숨을 걸고 신실하게 실천하면서 담대하게 자신을 본 받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하신 말씀들도 위에서 설명 드린 맥락과 의미로 말했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입니다.
1/9/2020
아멘...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