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생전에 제자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질문]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바울의 복음:
제가 계속 의문을 가지는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 기간 동안 전파하신 복음의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직 알리지 말라고 하신 가운데 제자들을 각 지역으로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복음은 예수님의 성육신하심과 십자가 희생이 핵심인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의 상황에서 전파하신 복음은 정확히 무엇인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민중들에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했다면 민중들은 “하늘나라가 어디에 어떻게 가까이 왔단 말이오?”라고 물었을 것이고 이에 대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무엇이라 대답하였을까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아주 난해하고 복잡한 주제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제자들이 십자가 대속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주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 제자들을 몇 차례 전도 여행으로 내보내셨는데 그 때 그들이 전한 복음에 과연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가 포함되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럼 또 질문의 제목처럼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는 바울이 창안한 것으로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연관이 없다고 하는 일부 신학자들의 주장도 과연 옳은지 궁금해집니다. 바울 신학과 예수님의 관계에 대해 학자들 간의 논의가 지금도 끊이지 않기에 일일이 다루자면 끝이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고 언제 어떻게 어디에 임했는지에 대한 질문도 많은 설명을 요합니다. 따라서 이 셋을 다 연결해서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접근해보겠습니다.
복음(福音, Good News)은 무엇인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성경이, 특별히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정의(定意) 내지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사도들도 그와 같은 내용을 전했는지 따져보면 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가(‘하늘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옳은 표현임) 무엇인지도 알아봐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1-14)
바울은 자기를 복음을 전하라고 택함 받은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이 일관되게 약속한 내용은 죄에 찌든 인간을 구원하러 메시아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헬라 원어 ‘유안겔리온’은 좋은 소식을 말합니다. 다윗 가문에 나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가 정말로 이 땅에 오셨으니 그야말로 좋은 소식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셔서 마땅히 죽었어야 할 우리의 심판을 면하게 하신 대속의 은혜는 구원의 방안입니다. 복음이 복음 되는 이유이자 복음이 이 땅에서 이뤄낸 열매입니다. 또 그래서 주님의 대속죽음은 십자가 이후의 신자에겐 가장 좋은 소식이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전의 제자들에겐 주님께서 그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 이 땅에 오심 자체가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왜 좋은 소식이었는가?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도 포함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좋은 소식(복음)이 된 특별한 까닭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나 생생히 깨달아 알 수 있는 체험적 은혜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신학적 교리적 성경적 부연 설명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전혀 몰라도, 질문에서 지적했듯이 아직 형성되기도 전임, 복음으로 들렸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오신 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눅2:1) “때가 차매” 즉, 하나님이 사전에 마련된 완벽한 일정표에 따라 그리스도를 보냈는데 바로 가이사 아구스도가 통치할 때였다고 합니다.
아구스도는 사방의 대적을 평정하여 로마제국의 황금기를 연 초대황제입니다. 더 이상 전쟁은 없어졌고 사방으로 도로가 뚫려 경제가 활성화 되고 각 식민지에서 노예를 데려와서 로마 시민들은 아주 평온하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승전과 평화와 풍요의 좋은 소식을 갖다 주었다는 뜻으로 아구스도 황제를 실제로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런 때에 그리스도가 온 것이 온 인류에게 복음이라고 선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실적 안락과 풍요를 보장해준 로마 황제가 복음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복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부족함이 없어도 죄에 찌들어 하나님과 등지고 있는 영혼은 안식은커녕 평생토록 갈급하고 허망할 따름입니다. 흑암의 세력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데서 구원 받아서 참 평강과 기쁨과 안식과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진짜 좋은 소식입니다.
이왕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율법을 성실히 준행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겐 더더욱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의 어떤 고상하고 경건하고 심오한 철학 도덕 종교도 인간을 죄에서 절대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의롭고 합리적이었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의 길을 물은 것이 그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당신 대신에 보내실 진리의 영인 성령이 오시어 한 죄인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간섭을 해야만 십자가 대속 은혜를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해한 복음
바울이 극적으로 구원 받은 체험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는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다”(빌3:6)고 자부했습니다. 나면서부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지 않는 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철두철미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예수 십자가의 은혜만 믿어야 한다는 기독교 신자들을 이단으로 치부하고 박해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일대일로 만나 삼일 간 죽음과 방불한 장님이 되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동안 자기가 쌓아온 육신적인 의는 한 순간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아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복음이며,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신자들의 믿음과 가르침이 옳았음을 체험적으로 철두철미 깨달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자입니다. 그의 신학이 바로 기독교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사상은 바로 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중생의 체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이 대면이 없었으면 그는 죽을 때까지 율법에 의한 행위구원자이자 히브리 선민주의만 옳다는 유대교도로 지냈을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생전의 가르침을 자세히 전해 들었습니다. 또 성령의 조명으로 구약성경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새롭고도 정확하게 해석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부활 예수를 만난 체험을 그런 새로운 깨우침에 적용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영감을 받아 의신칭의의 교리를 체계화 시켜 교리 서신들을 저작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전해 준 것이었지 그가 각성 창안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대로 삼위 하나님이 십자가 복음을 바르게 풀어서 성경을 저작하라고 예비 훈련시켜 놓은 종이었습니다. 또 그래서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라는 정의부터 내렸습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이유를 자신의 실패했던 유대교 체험과 대조하여 체계적으로 설파한 것이 로마서입니다. 의신칭의의 교리도 제자들이 예수님께 계시 받아 전하고 있던 복음을 그가 정리한 것뿐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한 내용은?
복음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로 제한하고 또 전도할 때에도 그 교리를 설명하는 일에만 주력해선 안 됩니다. 또 그랬기에 예수님 당대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은 지금과 다를 것처럼 혹은 달라야 한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오시기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자기 민족의 역사에 개입하시는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마저 그분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택한 백성으로 율법을 소유하고 그대로 준행하는 자기들은 구원 받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방 족속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할례로 맹세하고 유대교로 개종하면 구원 받았다고 인정해주었습니다. 반면에 자기 민족이라도 율법을 어기면 죄인으로 구원 밖에 있다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준행이 구원의 기준이요 절대적인 방안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죄 중에 있는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에 대해 무지 내지 곡해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대해 자기 민족 중심으로 편리하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율법을 독점하고 있던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의 구체적 시행방안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민중을 온갖 종교적 계명으로 묶어서 현실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7,18)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그분의 구원 계획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사항을 바로 잡아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바로 잡았습니까? 그들의 기준인 율법으로는 부정하기에 하나님 구원 밖에 있는 자들 예컨대 세리, 창녀, 이방인, 불구자 등을 만나 교제를 나눴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율법을 잘 지키는 의인이 아니라 율법으로는 죄인 취급 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선행과 의는 썩어 없어질 것이라 구원과 심판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을뿐더러 성별 신분 혈통 종족 같은 외모로도 구원에 전혀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총을 실현하는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로 믿고 따르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합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5-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요14:6,7)
요한복음은 주님과 유대인들의 논쟁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 밝혀 놓은 책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을 향해 당신을 믿고 따라야만 구원 얻는다고 계속 선포했습니다. 주님의 그런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라고 재확인했습니다. 당신을 구주가 아닌 인간 랍비로만 보면 실족한다는 즉, 구원 밖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첫 구절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막1:1)고 선언합니다. 앞으로 전할 이야기 전체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복음이요, 그분의 가르침이 복음이요, 그분의 사역이 복음이요,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님의 강림 모두가 복음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려고 어린 양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성자 하나님이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죄인들에게 어찌 복음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음에도...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십자가 사건까지 비밀로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전파한 것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당시로선 아주 민감한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메시아가 이미 오셨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사실부터 전했습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그리스도가 이 땅에 이미 왔다는 좋은 소식 하나입니다. 예수가 자기들만의 랍비를 넘어서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종교적 규정, 특별히 장로들의 유전에 묶여서 구원의 확신도 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필요 없이 예수만 믿고 따르라고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부는 전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당부한 이유도 앞으로의 사역에 방해가 되는 일을 막겠다는 뜻이었을 뿐입니다. 자꾸만 질병 치료나 현실적 기적만 바라고 몰려들면 천국 복음을 가르칠 여유와 시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막1:34에서 많은 이들을 고쳐주었고 귀신이 당신에 대해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새벽에 다시 병을 고치고자 많은 이들이 찾아왔으나 38절에서 그들을 만나주지 않고 전도하러 다른 마을로 옮겼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막7:36) 또 귀가 먹어 혀가 어눌한 자를 고쳐준 기적을 비밀로 지키라고 당부했으나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이 더욱 전파되었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직접 맛보았거나 옆에서 눈으로 본 자들이 어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최소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는 사실은 제자들이 부인하려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으니 회개하라는 뜻도 실은 복음을 순전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특정 장소 시간으로 제한된 물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한 통치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예수님 이전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여 현실적 화복을 주관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타락한 영혼을 구원해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개인적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가능케 하고 그분의 일꾼으로 세우는 일은 예수님이 온 이후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성도들이 마지막 날에 부활하여 주님과 세세토록 왕 노릇할 것을 이 땅에서부터 미리 맛보고 훈련시키려는 뜻입니다. 또 예수 이후의 이 땅의 인간들은 오직 그분의 십자가 구원진리에만 의거해 다스려질 것이라는 뜻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이 구원의 원리는 태초부터 영원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죽기까지 저주하시고 죄에 찌든 인간은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 앞에 겸손히 자기 전부를 내려놓고 엎드리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참 생명으로만 다스려지는 영적인 나라가 이 땅에 예수님 이후에 임한 것입니다.
교리를 전하는 대신에 복음의 삶을 살라.
예수님 당시와 초대 교회에서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아주 간단하고 쉬웠습니다. 생전에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왔다는 것이고 사후에도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또 삼일 만에 부활했기에 그분만 믿고 따르는 자도 그분처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주로 모신 이후의 이 땅의 삶도 천국보좌에 좌정하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통치를 받아 당신을 닮게 자라가게 하여서 반드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전부를 동원해서 복음을 선포 증거 실현하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이 전한 복음이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과 동일하게 살아서 복음을 현재화 가시화시켰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4-47)
복음을 전도할 때 흔히 제시하는 사영리(四靈理)나 이신칭의 교리 등과 혼동하거나 일치시키면 안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이 가르치고 행하신 모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복음으로만 다스리는 그분의 영적 통치이자 그런 다스림을 받는 성도들의 공동체입니다. 오늘날에도 전도하려면 초대교회처럼 삶에서부터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신자들이 그분의 진정한 제자 됨을 불신자들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 구원을 체계화시킨 바울 본인도 전도할 때에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그 이유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전1:18)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십자가의 도가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은 말로 전해지기 이전에 신자의 변화된 삶으로 먼저 전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제로 그랬기에 복음이 염병처럼 온 천하에 번진 것입니다. 오늘날 삶은 전혀 따르지 않은 채 신학적 성경적으로 정제된 교리만 전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장사한 것에 불과하며 엄밀히 말해 복음의 껍데기입니다.
6/4/2018
* “하느님과 하나님의 차이”(출20:7, 출애굽기 강해 #44)도 참고로 읽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