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에 심취하는 것이 영적으로 옳은 것인지요?
[질문]
클래식 음악을 너무 좋아하는 24살 크리스천 대학생입니다. 전공은 음악과 관련 없지만 베토벤에 특히 심취해 있습니다. 그의 제9번 교향곡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장엄한 1악장, 명랑하면서 섬뜩한 2악장, 유유자적하고 여유로운 3악장, 기쁨이 넘치는 4악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 그리고 신성함까지 느껴지기에 매일매일 즐겨듣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이 신앙적으로는 거리가 멀고 대단히 교만한 인간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음악에 지나치게 매료되는 저의 그런 느낌이 이단적인 것은 아닌지, 영적으로 바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음악을 좋아하는 자답게 아주 예민하신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전혀 이단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성탄절은 로마제국에서 거행했던 동지절 중에 태양 축제일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봅니다. 로마 주교가 인간에게 유일한 참 빛은 예수님이고 그분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날을 정복했다는 뜻으로 즉, 이단 축제를 대체하려고 제정했다고 전해집니다. 질문하신 대로 따지자면 기독교는 성탄절을 지내선 안 됩니다. 실제로 초대교부인 오리겐 클레멘스 등은 이날을 지키길 거부했고 지금도 일부 보수적인 교회에선 성탄절을 지내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빌1:15-18) 알다시피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 말기에 로마 시위대의 한 가옥에 2년간 연금되었습니다.
그러자 로마 교인들 중에 사도의 선교 사역에 제한이 가해졌으니 자기라도 대신 열심히 복음을 증거해야겠다는 순수한 자가 있는 반면에, 바울이 차지하고 있던 사도적 위치를 이참에 대신 차지하려는 이기적인 시기 욕심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어쨌든 복음만 순전히 전해지면 그런 경쟁적 전도는 크게 기쁜 일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눅9:49-50)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도 귀신을 쫒아내었습니다.(마12:27) 인용한 누가복음 본문의 귀신을 쫓은 사람이 순전한 믿음을 가졌는지, 성령의 역사였는지에 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즉, 당신을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그대로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예수님 외에는 어떤 신자도 완벽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바울, 베드로, 아브라함, 모세, 다윗 다 포함해서 과거에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신앙 위인도 믿음의 약점 뿐 아니라, 성격적인 단점도 있고, 심지어 수시로 죄를 짓고, 아주 드물게는 하나님을 부인 거역하기도 합니다. 당장 저부터 주일에 설교하려고 강단에 설 때마다 너무나 부끄럽고 자격 없음을 절감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 그 삼사십 분 동안은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베토벤이 완전히 이단 종교를 믿어서 그 신을 위해서 작곡했고 지금도 그 종교에서 그 곡을 예배 중에 사용하고 있다면 아무리 음악적으로 아름답고 정서적으로 감흥을 준다고 해도 신자라면 학술적 연구나 단순히 참조하려는 목적 외에는 절대 들어선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기독교 신앙을 갖고서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작곡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격적 신앙적 결함을 갖고 있더라도 자기 은사를 주님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결심 실행한 그 순간만은 진실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갖 예수 믿은 초보신자의 경우는 세상 죄와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거의 벗지 못했고 신학적으로도 많은 오류를 갖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도 모르게 전도를 하고자 하는 순전한 열정이 생깁니다. 처음 믿었을 때에 주님을 가장 사랑하고 또 주위에 전도할 불신자가 많기에 하나님이 심어주는 열정입니다. 그렇게 전도한 것을 두고 하나님은 당연히 또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베토벤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그런 단계는 벌써 넘었을 것입니다.
최근 신자들이 아주 좋아하는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 곡의 작곡가인 롤프 뢰브란은 뉴 에이지 신앙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또 가사에서 “You”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나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을 뜻한다고 많은 비평과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You를 하나님이라고 간주하고 그 가사와 곡조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마치 태양 축제가 어느듯 성탄절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은혜를 끼치듯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오랜 세월을 걸쳐 어떤 사안과 사물에 대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는 의미가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고유의 가치가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가치에 완전히 반대되는 이유와 근거가 확정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를 부인 배척하지 않는 한에는 그러합니다.
지금 와서 “You raise me up”은 거의 찬송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판국에 교회마다 찾아다니며 일일이 그 유래와 문제점을 설명해서 더 이상 부르지 말자고 결의할 수도 없습니다. 나아가 최근의 가스펠은 물론 정통 찬송가 중에도 그 가사가 하나님을 찬양하기보다는 인간의 공로를 높이거나 인간의 감정적 치유에 치중하는 곡들이 많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찬양인도자나 교회가 구체적으로 검증해서 선별하여 불러야 하나 그럴만한 전문지식을 갖춘 자도 시간적 여유도 사실은 없습니다.
찬송가와 CCM이나 ‘You raise me up” 같이 가사가 붙은 노래는 가사 내용으로 분명한 잘못을 가릴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문적 지식이 없는 일반 신자 각자에게 오히려 때에 따라 적합한 은혜를 끼칩니다. 성경 말씀조차 "내가 복음" 식으로 큐티를 해도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반면에 베토벤 교향곡은 가사가 없고 곡조 뿐입니다. 마치 아무 설명이 없는 미술작품과 같습니다. 저자의 저작 의도와 달리 그것을 대하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그 의미를 받아들여도 되는 예술 장르인 셈입니다. 심지어 저작 의도와 완전히 상충되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그것도 순전히 상상만으로 유추했어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지어 불신자들마저, 질문자님과 비슷한 맥락의 감동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작곡할 그 순간만은 순전한 믿음과 열정으로 가득 찼고 나아가 성령의 역사까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모든 이들에게 그런 공통적인 감흥을 줄 수는 없습니다.
가룟 유다도 하나님이 당신만의 목적에 따라 십자가 사건의 가장 중요한 조연으로 들어 사용했습니다. 광대하고 완벽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좀더 폭 넓은 시각과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분은 심지어 악한 것조차 신자를 위해선 궁극적으로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요컨대 베토벤의 믿음이 어떤 수준이었던 그의 가사 없는 교향곡도 미술작품처럼 청취자가 개인적으로 감동한 내용 안에 성경적으로 틀린 것이 없다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1/2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