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 (3)
예수님의 비유와 그 해석법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절씩 살펴보기 전에 먼저 비유해석법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은 당시 랍비들의 교육방식이기도 했지만 당신만의 고유하고도 적절하면서 아주 예리한 비유(parables)를 많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13:34,35) 창세로부터 감춰진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경륜에 관해서 정확히 계시하기 위해서 특유의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비유를 들은 자들에겐 두 가지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13:10-13)
같은 비유를 들어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이 택하여 은혜를 베푼 순전한 믿음의 소유자들은 정확히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구원 안에 들어올 수 있으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주님에 대한 거부 적대감을 갖고 들으면 전혀 깨닫지 못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주님이 말씀하신 이 원리가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한쪽은 그 내용이 선행을 독려한 것이기에 행위 구원을 강조한 비유라고, 다른 쪽은 오히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구원을 계시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는 실화나 예화나 간증과는 다릅니다. 전하고자 하는 어떤 진리를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익숙한 사물, 사안, 관습 등에 비추어서 그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따라서 비유 자체는 전하고자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정작 진리는 따로 있고 비유는 그 진리를 정확하고도 실감나게 이해시키는 보조수단에 불과합니다. 비유를 통해 진리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기에 전해질 진리도 아주 단순 명확한 한두 가지로 제한됩니다.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른다.”는 한국 속담으로 비유의 기능을 설명해보겠습니다. 기억 자의 모습은 바로 낫과 같습니다. 낫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사물로 한글 철자법을 몰라도 낫을 보면 기억 자도 쉽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낫이라는 비유의 역할은 사람들로 기억 자의 형상만 알게 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낫이 칼날과 나무자루로 구성되었고 칼과 나무의 소재는 어떤 것이라는 등을 설명하려는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비유를 해석할 때는 비유가 밝히 드러내고자 하는 한두 개의 진리에만 주목해야 합니다. 비유 자체의 구체적인 설명에 묶이면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전에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모든 구절과 단어와 숫자 하나하나에까지 영적인 의미를 부여한 해석법이 성행했습니다. 전문용어로 우의적(寓意的 allegorical) 해석법이라고 하는데, 화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한두 개의 진리에 주목해야 하는 비유에 그런 해석법을 적용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눅16:1-13)에서 청지기가 행한 일은 분명히 잘못된 것으로 주인의 재물을 훔친 죄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비유에서 그 청지기가 지혜롭다고 인정하고 주인도 그를 칭찬했다고 말합니다. 마치 주님이 신자더러 그렇게 따라하라고 권면하는 것처럼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주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진리는 “장래의 심판을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장래를 잘 대비한 자의, 또 신자의 재물관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반의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뿐입니다. 그 청지기가 행한 일이 선하고 지혜로우니 그대로 본받으라는 의미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비유해석법을 잘 몰라 한두 가지 진리에 주목하지 않고 각 구절 하나씩 세부적으로 이해하려 했기에 그런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의한 청지기가 행한 일은 그 비유를 듣는 사람들로선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아주 익숙한 관습이었습니다. 당시 부재지주(不在地主)들이 많았는데 그런 부자들이 청지기에게 자기 재산 관리업무를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쉽게 말해 주인의 인감도장을 갖고 상업적 계약을 자기 임의로 체결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비유는 당시의 관습과 문화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서 화자가 강조하려는 한두 가지 주제에 주목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오래 동안 각 단어마다 신령한 의미를 부여하는 우의적 해석이 주를 이뤄왔지만 그래선 주님이 강조하고자 하는 초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과 율법사가 나눈 대화를 앞에서 살펴보면서 내린 결론이 바로 주님이 이 비유로 강조하려는 주제입니다. 그대로 다시 인용하자면 - “이웃이 누구인지, 진정한 이웃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아가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가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추적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벌어진 상황 (30절)
주님은 먼저 세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되는 기본 상황을 설정했습니다. 비유는 다시 강조하지만 실화, 예화, 간증이 아니라 실제로 흔히 일어나는 사안을 바탕으로 지어낸(fiction) 이야기입니다. 생활권이 같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들으면 너무나 익숙하여서 금방 머리에 그림으로 그려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반죽음의 상태로 길가에 버려져 있다고 말합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인적 정보는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에서 두 가지 거의 확실한 사항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일단 성전에서 제사나 절기를 지내고 거주지인 여리고로 내려가는 자입니다. 그럼 유대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를 도운 사람을 주님이 구태여 사마리아인이라고 밝혔으니 그와 대조되는 유대인이라고 봐야 합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때에 철저히 진멸하였고(수6장) 하나님이 다시는 도시를 건축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린(수6:26)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폐허가 된 구 성읍과 별도로 신시가지를 건설하여 아주 번창한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에서 약 36킬로 떨어져서 제사장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강도당한 사람이 유대 제사장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고지대이고 여리고는 저지대인데다 남쪽에 위치했기에 내려가는 길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가파르고 길가에 바위들이 많아 강도들이 자주 출몰했다고 합니다. 강도가 노렸다면 피해자가 종교 권력으로 부를 축적한 자일 수도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입니다.
어쨌든 주님은 그의 민족적 사회적 경제적 신분을 전혀 밝히지 않았습니다. 영생의 길 즉, 주님이 구원을 베푸심에는 그런 차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그를 도와준 이는 사마리아인이라고 강조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방족속과 혼혈인데다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유대인들이 상종도 않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에게 이웃일 수 없으므로 지금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문고 있는 율법사가 사랑을 전혀 베풀지 않았던 자이기도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반응 (31.32절)
강도가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다”고 말합니다. 길가에 버려진 시체나 방불합니다. 율법이 부정한 것을 접촉하지 말라고 명하기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더더욱 그래야합니다. 그 둘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하니까 언뜻 잘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장도 당연히 레위 지파인데 구태여 둘을 구분한 이유도 둘일 것입니다. 제사장은 제사직무를 맡는 반차가 되어서 예루살렘에서 제사를 지내고 온 자를, 레위인은 반차가 아니라 쉬고 있는 제사장을 뜻할 수 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제사장은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자를, 레위인은 성소의 일반 봉사를 맡은 자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둘 다 율법에 능통하고 방금 성전 안팎에서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시체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반 죽은 것”이라고 즉, 아직은 완전히 죽지 않은 자라고 말합니다. 그럼 만지지는 않더라도 가까이 가서 생사여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완전히 죽지 않았다면 만져도 괜찮을 뿐 아니라 마땅히 만지면서 응급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
설령 완전히 죽었다 쳐도 최소한 신분을 확인하여서 가족이나 친척을 수소문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 제사장과 레위인이라면 아무 연고가 없는 시체라도 유대인이기에 더더욱 다른 이들을 시켜서 정식으로 매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고 그냥 슬쩍 보고는 현장을 피해버렸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33.34절) 응급조치를 해주고 성심껏 도와주었습니다. 동일한 맥락의 비유이므로 이 두 사람은 “그를 보고 전혀 불쌍히 여기지도 않고 자신의 시간과 경비가 들어갈 것이 귀찮고 싫어서 아예 멀리 떨어져 피해 가버렸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만약 피해자가 유대인, 그것도 혹시라도 제사장인데도 피해버렸다면 그들은 도무지 비할 데 없는 위선자들입니다. 율법에 능통하고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열심히 잘 한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 상황을 지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에게만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자기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로 주님이 저주한 대로 회칠한 무덤 같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아직도 강도들이 근처에 숨어 있을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는 변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사마리아인의 반응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미 주변에는 인기척이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오직 귀찮고 자기가 희생하는 것이 싫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아무도 보지 않으니까 큰 고난을 겪고 있는 동족을, 그것도 자기들이 반드시 사랑해야 할 이웃으로 여기는 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장례는 치르도록 해주어야 함에도 인간으로써의 기본 도의도 전혀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비유를 들은 율법사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바보가 아닌 이상 바로 자기를 빗대어 말한다고 금방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네가 이웃 사랑에 자신 있다고 큰소리치는데 과연 그런지 잘 따져 보라?”는 주님의 음성이 가슴을 파고 들었을 것입니다. 율법사는 제사장과 레위 출신은 아니라도 율법을 잘 알고 그대로 가르치는 유대교 지도자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비유에서 율법사라고 지칭 안한 것만도 그의 얄팍한 자존심을 배려해준 셈입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눅6:32)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유대인들이 동족들만, 특별히 자기들 동료들끼리만 유별난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행할 참 사랑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정도의 사랑은 죄인 즉, 이방인들도 잘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당한 자에게 보인 반응은 동족조차, 그것도 같은 직분의 동료일 수도 있음에도, 전혀 사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뜻은 이웃을 같은 동족으로 한정 짓는 것도 틀렸으며, 자기들을 사랑해주는 동족과 동료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지만 그 정도 사랑을 하고선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고 제발 착각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사마리아 인이 행한 이웃 사랑과 잘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 계속 이어집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아주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