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뜻은? (4/완) - 사마리아인의 선행과 영생의 길
불쌍히 여기다. (33절)
주님은 비유의 주역을 “어떤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합니다. 강도당한 자는 물론 제사장과 레위인의 신분과 대조시키려고 주님은 사랑을 베푼 자를 분명히 사마리아인이라고 지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동족인 유대인만 이웃으로 삼아서 사랑하는 잘못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또 율법사가 율법을 잘 알고 그대로 따르기에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얼마나 큰 교만이자 죄이기까지 한지 깨우쳐주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죄인으로 취급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알다시피 그들은 사마리아 지역 근처를 여행할 때에 그 지역을 통과하는 것이 지름길일지라도 일부러 우회할 정도였습니다. 주님과 대화 하고 있는 율법사의 이웃 사랑에선 아예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율법사와 같은 신분과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사실상 주님이 율법사를 지칭한 것임, 강도당한 유대인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도 자신들이 천국에 일등으로 입장한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들 생각에는 천국의 반대편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야 마땅한 사마리아인이 참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님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멸시 천대 상종도 않는 그 유대인을 말입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불쌍히 여겼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간” 것과 정반대입니다. 그의 근본 심성이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봐도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던 것이 확실했다는 뜻입니다. 다른 이를 향한 긍휼한 마음이 있었기에 잠시 멈춰 서서 주의 깊게 관찰했더니 죽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 종교인들은 아예 귀찮았거나, 시체라고 미리 단정 지은 것입니다. 첫째 이유라면 다른 이에 대한 긍휼한 심성은 물론 관심도 없었다는 뜻이며, 둘째 이유라면 장사 치러주어야 한다는 일말의 양심도 없이 오직 종교적 문자적 계명에만 묶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종교 계명을 형식적으로라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소지한 탓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이웃은 가장 사랑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가까이 가서 밤새 돌봐줌 (34절)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에게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사마리아에선 비록 다른 성전에서 우상에 제사하긴 했어도 여전히 모세 오경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대로 실천하려 했습니다.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 유대 제사장이나 율법사와 다를 바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가까이 간 것은 거반 죽었을 뿐이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고 합니다. 시체는 짐승에 태울 수 없습니다. 시신을 짐승에 완전히 묶던지 다른 탈 것에 태워서 짐승이 끌어주어야 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맸습니다.” 당시는 올리브유와 포도주가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응급조치를 했습니다. 자기 겉옷을 찢어 싸매어서 상처에서 더 이상 출혈되지 않도록 했습니다. 겉옷은 알다시피 아주 비싼 것입니다.
나귀나 말을 타고 여행하며 기름과 포도주를 상비할 정도면 상당한 재력과 신분의 사람입니다. 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멸시 천대를 받기에 아무래도 유대 지역 여행을 꺼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행 중이라는 것은 아주 위급하거나 중요한 용무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기 몸처럼 피해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이튿날에서야 볼일 보러 떠났습니다. 밤새도록 곁에서 돌보며 간호했다는 뜻입니다. 피해자가 거반 죽었을 정도로 중상을 입었으니까 생명에는 완전히 지장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일로 여행 중이었기에 만약 그가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지나쳤더라면 구태여 주막에 묵을 필요 없이 목적지로 바로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자기 시간과 경비를 아낌없이 희생하며 사랑한 것입니다.
비유의 초점은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유대인을 모든 것 희생하며 사랑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사에게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라는 뜻을 비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당해 거반 죽은 것처럼 길가에 버려져 있을 때에 과연 네도 비유의 사마리아인처럼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그런 식의 사랑을 해왔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전혀 아끼지 않음 (35절)
자기 시간과 돈을 써가며 밤새 강도당한 자를 돌본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이튿날”에도 동일한 모습으로 실현됩니다. 참 사랑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가감 수정 왜곡 포기가 없는 사랑입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럼 스스로 혹은 주막 주인에게 부탁해 가족이나 지인에게 연락하여서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만도 칭찬 받아 마땅한 선행이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처음 여행하려 했던 목적지에 가서 그 업무를 다 마치고 다시 그 주막으로 돌아오겠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주인더러 계속해서 그 사람을 돌봐달라고 말합니다. “데나리온 둘”을 그 비용으로 우선 지불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일일 품삯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돌아온다면 비용의 두 배를 지불한 셈이고, 혹시 그날 안에 못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면 미리 2일치 품삯을 다 지불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비가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고 약속합니다. 더 늦어질 수 있다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은 걱정하지 말고 그 사람을 최선을 다해 정성껏 돌봐 달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주막 주인도 사마리아인이 밤새 간호하는 모습이나, 이일분의 품삯을 미리 주는 것이나, 옷을 입은 모습과 짐승을 타고 여행하는 등등 모든 말투 행색에서 아주 신뢰가 가고 존경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예사 인물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돌아올 때까지 경비에 상관 말고 최대한으로 간호해주라는 것은 사마리아인이 끝까지 그 자를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사랑이란 다른 이를 단순히 궁핍에서 구해주고 위급한 상황에서 건져내주는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응급조치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행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가축도 건지는데 같은 인간이 죽어 가는데 인간이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안식일이라도 반드시 살려주어야 합니다.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라 안식일일 가능성도 다분합니다. 율법사가 주님을 시험하려는 항목 중에 하나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잘못이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것까지 감안하여 비유를 풀어가는 중입니다.
참 사랑이란 단순히 응급조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을 완전하게 살려내는 데까지 가야합니다. 최소한 이전과 동일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시간 경비 모든 것을 희생 수고하면서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자기는 죽고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 땅에서 행했던 사랑과 동일한 모습의 사랑을 하라고 합니다. 이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정확하게 그대로 행하고 있음을 봅니다. 당신께서 가르치신 계명을 생생한 그림 언어로 보여주고 있는 중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라고 해서 손쉬운 사랑을 말하지 않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19:18) 당시는 원수를 갚는 것이 최선의 정의였음에도 갚지 말라고 말합니다. 또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위해선 죽도록 사랑합니다.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어떤 희생과 수고도 감수합니다. 이웃을 그렇게 사랑하라고 율법은 명하고 있습니다. 자기 시간과 돈이 없어질 것 같으니 멀리서 피해버린 제사장과 레위인이 율법을 어긴 셈이고, 사마리아인은 율벌대로 그들과는 정반대의 사랑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웃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意) (36, 37절)
율법사는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도 사랑하라고 답했고,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물은 숨은 의도는 당연히 “예수와 그 제자를 그르게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입니다. 자기는 참 이웃인 유대인들을 사랑하지 죄인인 이방인과 율법을 어긴 자들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가 하는 사랑은 사랑축에도 들지 않고 누구나, 그중에는 이방인이나 세리도 일상적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며(마5:46-48),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참 사랑이라고 산상수훈에서 이미 가르쳤습니다.(마5:44)
그리고 지금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이 얼마나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큰 죄인지 생생하게 밝히는 중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웃은커녕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마리아인이, 자기들에게 원수가 되는 유대인을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고 살려주었습니다. 율법사에게 적용하면 자기의 원수인 자가 도리어 그의 원수인 자기를 사랑해준 셈입니다.
반드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지금 율법사가 던졌던 질문의 형식을 완전히 반대로 바꾸어 그에게 던졌다는 점입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는데, 주님은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이웃을 네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너를 좋아하는 자만 이웃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셋 중에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일 수밖에 없으며 나머지 둘은 아예 이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 사랑의 섬김이 필요한 자는 강도당한 자인데 유대인들은 그를 피해갔으니 아예 사랑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은 것입니다. 감히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 앞에 사랑을 논할 자격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는 자를 멀리 했으니 역으로 따지면 죽음으로 몰아넣는 살인자요 피해자인 유대인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이 얼마나 정성껏 질적 양적으로 섬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그것도 제사장 레위인 율법사 같은 영적지도자와의 극명한 대비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그 두 부류의 사람들의 사랑을 하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상대가 어떤 인종 나라 종교 문화 언어 등을 지녔든지 즉, 인간세상의 객관적인 기준에 전혀 구애 받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자신을 희생하며 충분한 도움을 끝까지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웃 사랑일 뿐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 그의 이웃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유대 지도자들은 오직 율법을 소지한 동족으로써 그것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는 자만 이웃이라고 여기고 그들만 사랑하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또 그것이 진리이고 영생의 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당한 유대인의 이웃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외모로 차별하는 것은 자기의 인간적 공로와 의를 내세워 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뜻일 뿐 아니라 그에 못 미치는 자들을 멸시 비방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단순히 우열만 가린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은 물론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고 인간이 인간을 정죄까지 했습니다. 그 중에는 안식일에 일하고 먹고 마시며 죄인과 교제하는 예수와 제자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악한 생각을 가진 자야말로 하나님의 구원 밖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율법사의 악한 생각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선언하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의 그런 점을 인정하고 또 칭송했습니다.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눅20:21) 대제사장이 보낸 정탐꾼이 예수를 모함하려고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눅20:20) 찾아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한지 물었습니다.(22절)
사람을 외모로 취해선 안 된다는 것도 이미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신10:17) 먼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전제합니다. 그리고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신16:19) 당신의 백성들도 그렇게 하되 특별히 재판관이나 지도자들이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재판관을 겸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관원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보고 차별 대우하며 뇌물을 받아 치부했습니다. 성전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강도의 굴혈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율법에서 이미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잊고 눈이 어두워졌고 그들의 말도 굽어졌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으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신자들은 외모에 차별 없이 은혜로 불려 나온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 하노라.”(고후5:16) 신자들은 본문의 사마리아인처럼 외모에 차별하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얻는 길 (37절)
율법사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너무나 쉬운 예수님의 질문에 사마리아인이라고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권하는 것으로 이 사건은 종결됩니다.
그가 그 후에 어떻게 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완전히 쇼크 먹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을 믿거나 인정했을 리는 없습니다. 성경이 침묵한다는 것은 그도 침묵했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선 도무지 대꾸할 말도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틀렸을 수 있다고 잠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도리어 주님에 대한 분노 적개심이 더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의 가장 큰 특성은 자기는 의롭다는 믿음인지라 자신의 잘못을 정죄 받아서 고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말로 타이르고 진리를 가르쳐서 사람이 변하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항복할 것이면, 주님이 구태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완전한 대속 제물로 죽을 필요나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무 말씀 않으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신 것 자체가 인간은 말로 알아먹을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과 이웃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본문에선 아예 그런 사랑을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제했고 결론으로도 그렇다고 말합니다. 영생의 길을 물어온 율법사에게 마지막에도 너도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비유에선 두 부류의 사람으로, 또 이웃의 종류와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까지 둘로 나누었습니다. 그럼 단순히 이웃을 사랑한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이웃 사랑에도 영생을 얻는 길과 그렇지 못한 길 둘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해야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최고 정성의 사랑이 아니라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원수까지 자기를 다 바쳐서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관건은 얼마나 희생적이냐를 떠나서 무엇보다 상대를 전혀 차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웃의 범위를 정해선 안 됩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를 무조건 섬기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사랑을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즉, 여전히 행위구원도 옳을 것이라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 받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은 아담의 타락으로 원죄 하에 태어난 자연인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사랑입니다. 불신 세상에선 원수를 갚는 것이 아주 고급한 정의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쳐서 나라의, 개인적이지 않는, 원수를 갚는 일이 최고의 선이 됩니다.
비유의 사마리아인의 사랑을 제가 다시 비유하자면 원수인 나라와 한창 전쟁 중에 상대 군사를 살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사이가 그랬습니다. 한국인이 곤경에 처한 일본인을 요즘 같은 평화 시기가 아닌 강점기에 엄청난 핍박을 받으면서 자기 모든 것을 희생하며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셈입니다.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거꾸로 이또히로부미가 안중근을 자기 목숨까지 바치며 사랑한 셈인데 인간 세상에선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아가페 사랑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전 인류를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대속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으로서 모든 이를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모두가 당신께서 지으신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당신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마저 저들이 자기가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인간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합격할 수는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는 정죄만 있지 구원이 가능한 것이 아님을 율법을 제정한 분으로써 너무나 잘 아시기에 당신의 생명과 맞바꾸는 은혜를 베풀어 구원을 주시려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주님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이미 전제해놓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원수까지 사랑하여 율법의 의를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그분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면 비로소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스데반이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고 초대 교회 안에는 자유자와 노예, 남녀귀천의 구분이 없이 모두가 형제 자매였습니다.
결론과 첨언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추적해야 할 과제는 셋이라고 서두에서 밝혔습니다. “1) 이웃이 누구인지, 2) 진정한 이웃 사랑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3) 나아가 구원을 얻는 길은 무엇인지” 이제 그 답은 밝혀졌습니다.
1) 이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자들입니다. 특별히 어떤 객관적 조건에도 구애 받으면 안 됩니다. 2) 외모로 차별하지 않기에 원수까지 자기 전부를 바쳐서 끝까지 책임지며 섬겨서 내가 죽더라도 상대를 살리는 것이 신자가 행할 참 사랑입니다. 3) 구원을 얻는 길은 율법을 지켜서 이웃 사랑 같은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서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또 그런 자만이 비로소 참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소망을 갖게 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조금씩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읽는 모든 신자들은 단순히 최대한 이웃을 사랑해야지 다짐 실천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진지하고도 엄밀하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봐야 합니다. “나도 이웃을 내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정한 후에 내 방식으로만 사랑하고 있지는 않는지? 또 그러면서 어쨌든 성의껏 그 이웃을 섬기고 있으니 나도 믿음이 좋은 신자라고, 천국 가기 합당한 자라고 자랑 내지 자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심각하고도 철저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나아가 과연 주변의 이웃들, 아니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 있는지를 더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이해타산을 따지거나, 자기 의를 앞세우거나, 신자라는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섬기지는 않는지, 대신에 모든 이를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정말로 순전한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나를 어느 때나 아무 부담 없이 주저하지 않고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최소한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자가 되어 있는지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위에서 잠간 언급했지만 동일한 비유를 두고 구원과 심판으로 나뉜다는 주님의 경고에 주목해야 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어려울 것 하나 없습니다. 율법사도 정확히 이해하고 주님의 질문에 정답을 댔습니다. 오늘날도 비유에서의 사건의 전개와 주님의 마지막 질문을 이해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이는 행위구원을, 어떤 이는 은혜구원을 강조하는 비유라고 해석을 달리합니다.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이런 비유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지어낼 수 있는 비유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비유를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데도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바꾸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자는 비유를 정확히 깨닫고 구원의 은혜 안으로, 그러지 못하고 대적하는 자는 반대의 결과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대적한다고 본문의 율법사처럼 시험하여 죽음에 넘길 꼬투리를 잡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 그분이 누구인지, 그분이 행하신 가르침과 사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내 자신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알아보려는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러 온 구세주로 그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는 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를 부인하고 지금도 인간이 취하여 행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따로 있으리라 생각해선 안 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 비유를 행위구원이나 선행을 강조하는 의미로만 해석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요컨대 사마리아인의 비유만큼 예수가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을 믿어 십자가 대속의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고 정확히 그림 언어로 가르쳐 주는 비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3/1/2019
조금 길었지만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더 써야할 내용도 남았지만 가능한 주제에서 초점이 멀어지거나 벗어나지 않도록 줄였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무엇보다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요 그분 십자가 은혜 외에는 영생의 길이 없음을 이 네 번의 시리즈 변증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면 저나 이 글들을 읽은 모든 분들에게 너무나도 큰 소득일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