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1-5) 인생 첫째 질문의 해답을 얻었는가?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
기독교 신앙을 버린 청년들
최근 자녀들이 대학교에 입학만 하면 교회 출석을 중지하고 심지어 기독교 신앙을 버린다고 염려하는 부모들이 많아졌습니다. 율법적 믿음을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자발적으로 교회 가기를 기뻐했던 자녀들마저 그러니까 더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부터 없어졌거나 아주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진화론만 옳다고 배워온 데다, 대학교에 들어가니까 친구들이 창조를 믿는 자기를 앞뒤가 꽉 막힌 벽창호라고 놀리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현실 세상에선 말도 안 되는 비극적 재앙이 반복되는 데도 하나님은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진화가 옳다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인간 이성에 근거한 토론이 자유롭게 행해지는 대학이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서 그동안 쌓아왔던 창조신앙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완전히 무너진 것입니다.
심지어 일부 목회자들조차 하나님이 진화를 창조의 방안으로 사용했다는 유신론적 진화론이 옳다고 가르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 안에 남은 일부 청년들이 진화가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마침 면죄부를 받았다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하나님이 물질 안에 진화의 법칙을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진화는 진화인데 그 법칙이 우연히 생겼는지, 하나님이 만든 것인지 차이뿐입니다. 열등한 생물이 고등한 생물에게 희생되는 약육강식이라는 비도덕적인 법칙을 만드신 비도덕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에서 당하는 개별 생명체의 비극에 하나님이 수십억 년 동안 손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기독 청년이라면 이에 대해서도 하나님에게 반감을 품어야 하는데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기가 편한 대로 그냥 무시해 버립니다.
유신론적 진화도 어쨌든 진화이므로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도 완전해질 종착점을 향해서 계속해서 의로워지는 중입니다. 엄밀히 말해 인간에게 잘못과 죄악에 대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으며 인간도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린이가 잘 몰라서 저지른 잘못을 두고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 인식과 판단도 단계별로 진화될 것이라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따른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이라는 교리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최초 인간을 모든 면에서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했을 때만 인간에게 죄의 책임이 따릅니다. 진화에선 최초 인간 아담이 자발적 의도적 능동적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한 사건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됩니다. 또 성경 66권 전체의 주제인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완전히 허사가 됩니다.
성경의 첫마디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즉 무(無)에서 유(有)가 생성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성경의 이 처음 진술이 부인되면 나머지 모든 기록도 부인될 수밖에 없습니다. 유신론적 진화는 성경의 첫 구절부터 부인하므로 자기들은 성경을 믿지 않는 기독교라고 인정하지 않는 한 일고(一考)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자기 주관이 견고해진 대학생 자녀에게 교회 출석을 강요해 봐야 듣지도 않습니다. 미국은 다른 도시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아서 교회 출석 여부를 확인도 할 수 없습니다. 뒤늦은 감이 있어도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며 둘 중 무엇이 옳은지 깨우쳐 주어야, 최소한 중립적인 시각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진화와 창조
하나님 없이도 인간끼리 얼마든지 잘 살아 나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 과학자들이 더 이상 기독교 신앙이 필요 없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복제하고 여러 기적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하나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다면 인간을 만들어 내는 시합을 하자. 내가 예전에 아담을 만들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만들어 보자”라고 하자 과학자들도 흔쾌히 동의하고 흙 한 줌을 집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잠깐! 너희가 쓸 흙은 너희가 직접 만들어야지!”라고 따지자, 과학자들은 아무 대답도 못 했습니다. 물론 이는 창조와 진화를 비교하는 크리스천 유머입니다.
물질이 융합하여서 다른 물질로 변화 확장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리고 식물의 광합성 운동처럼 스스로 유기적인 활동을 하는 것까지도 이론적인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스스로 살고 죽어야 하는 생명은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진화가 정말로 옳다면 모든 생명에게 죽음이 임한다는 것도 엄격히 말해서 모순이지 않습니까?
특별히 인간처럼 자의식을 갖고서 철학적 종교적으로 깊은 사고를 행하는 영혼까지 만들어 낼 수는 절대 없습니다. 어떤 진화론자도 이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물질이 스스로 인간이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간혹 최고도로 진화한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후손을 심어 놓았다고 인간의 기원을 외계인에 두기도 합니다. 만에 하나 사실이라 쳐도 그 행성에 가면 그 외계인의 기원도 여전히 창조와 진화 둘 중의 하나이므로 이 또한 일고할 가치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진화론자들도 최초의 물질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최초 물질에 대한 창조가 바탕이 된 후에야 진화론이라는 가설이 출발할 수 있는데, 이 사실을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도 인정했던 절대적 진리입니다. 흥미롭게도 진화론을 믿는 빅뱅 이론가들도 물리학적으로 따지면 최초의 우주는 본문의 말씀처럼 빛이 가장 먼저 생겨야 한다고 합니다.
거기다 과학자들에게 앞으로 인류가 어디까지 진화할지, 즉 과학으로 무엇까지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면 흥미로운 대답을 합니다. 인간 지식에는 한계가 없어서 우주의 모든 신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나 돌아오는 답변은 전혀 예상 밖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모르는 사실만 더 늘어나기에 과학은 오히려 인간이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정의 내리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진화론자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이론적 모순과 맹점만 자꾸 더 드러나고 자기들 가설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어서 그들 스스로 아주 곤혹스러워하는 것이 실상입니다. 만약에 진화론자들이 수많은 미결 문제 중에서 종과 종 사이의 중간 존재 하나만이라도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거나 속이 시원하게 설명해 주면 저도 유신론적 진화에 대해서 접근을 달리해 볼 의향이 있습니다.
현재 상태의 인간이 진화의 최종 종착지가 아니라면 더 진화된 인간의 모습이 지금쯤은 나타나야 하나 거꾸로 선천적 질환과 불구를 안고 태어나는 자만 늘어납니다. 의학 분야에서도 원인 모를 병만 늘어나고 인간이 모르는 사실이 아직도 너무 많다고 인정하는 실상입니다. 이런 판에 진화가 옳다고 우기는 사람이야말로 제대로 진화되지 않은 것 아닙니까?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도 물질계라는 한계에 제한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인간 지성이 아무리 발달하고 또 최고 성능의 컴퓨터를 동원해도 이 땅에 이왕에 있는 현상을 역으로 추적하는 일밖에 할 수 없습니다. 과학은 물질들이 어떻게(how) 변화되어 가는지에 관한 사후보고서일 뿐입니다. 그조차도 조금 더 정밀하게 작성하려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온갖 질문들이 더 나타납니다. 이처럼 최초 물질에 대한 ‘어떻게’라는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 한 진화와 창조 양쪽에서 서로 자기가 옳다고 아무리 과학적으로 토론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최초의 ‘왜’에 대한 해답
그리고 과학은 최초의 물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까 그보다 더 심층적인 왜(why) 생겼는지라는 질문은 아예 다루지 못하며, 과학자들 스스로 그것은 자기들 과제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말하자면 과학은 세상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질문에 전혀 대답해 줄 수 없다는 뜻인데, 젊은이들은 오히려 과학만능주의에 빠져 있으며 그래서 이 간단한 원리도 깨닫지 못하고 더 과학적으로 여겨진다는 아주 어렴풋한 이유 하나로 진화로 돌아섰습니다.
어쨌든 진화와 창조는 인류 기원에 대한 가설로서 둘 중 하나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틀렸기에 둘을 다 믿을 수도 없고, 유신론적 진화처럼 둘을 적절히 섞을 수도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래서 창조 진화 둘 다 골치 아파서 모르겠으니 나는 그냥 현재 나에게 주어진 상태에서 인간 사회에서 정해진 관습과 문화에 따라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선하게 살다가 죽겠다고 결심 실천합니다.
그런 삶의 태도는 지구라는 행성에 잠시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살다가 죽는 것에 그치므로 수명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자기는 하루살이와 같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허공에다 자기 인생을 쌓은 것이라 무(無)에서 시작하여 무(無)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물질에서 물질로 마치니까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가장 충실한 것입니다. 불신자이지만 종교만 없다 뿐이지 자기 믿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만약 인생이 물질에서 시작해 물질로 끝나면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편리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최선입니다. 인간 사회의 법률과 관습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최대한 쾌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 인생 문제의 유일하고 최선의 해결책이 됩니다.
인간이 그래도 짐승과 다른 존재인데 어떻게 그렇게 추악하게 살 수 있느냐 따질 수 있는 계제가 아닙니다. 가치중립적인 물질로 이뤄진 이 땅이 전부라는 바탕에서 물질 만능주의로 인생을 꾸려가고 있으면서 의미와 가치를 따지며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꼴입니다. 그 전에 반드시 최초 물질이 왜 생겼는지부터 답을 얻어야 합니다. 나아가 자기가 왜 짐승과 다르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분명한 이유도 알아야 합니다.
최초의 궁극적인 ‘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왜’에 대한 답도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을 믿는 자는 그래서 왜라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묻지 않고 단순히 가시적 물질계만 논리적으로 분석하고서 물질적인 반응만 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모든 불신자의 인생 목표는 물질적 형통과 풍요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 세상을 통치하는 체제도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창조에 대한 지금까지의 교회의 가르침은 크게 부족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니까 거의 다루지 않거나,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니까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진화에 물든 청년들에게 그런 식의 접근은 한계가 있습니다.
고전적 변증이지만, 이 최초의 ‘어떻게’와 ‘왜’를 추적하려면 당연히 물질이 아니어야 하고, 물질에 영향을 받아도 전혀 안 되며, 물질이 생기기 전에 물질을 만들 수 있는 어떤 존재나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 전제가 됩니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진리이므로 그 최선의 답은 창조주 하나님이 됩니다. 영원하며 절대적인 존재가 천지 만물을 창조했다는 사실에만 근거해야 인생의 모든 문제의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기 인생이 절대로 아무 의미 없는 물질로 끝내지 않겠다는 소망과 열정이 있다면 하나님을 찾기 마련입니다. 또 그런 자에겐 하나님도 반드시 당신의 실존하셔서 세상을 통치하고 있음을 각자에게 가장 합당한 은혜를 주어서 체험적으로 확신케 해주십니다.
성경 첫 구절의 의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성경의 최초 진술도 단순히 인간 기원에 대한 설명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그럴 의도였다면 최초 물질의 생성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덧붙여져야 합니다. 창조와 진화는 말씀드린 대로 과학적인 해명을 넘어서는 차원으로써,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인간 인식의 차이에 따라 나눠지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창조와 하나님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개념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창조가 믿어지고, 그 반대로 창조가 믿어지면 하나님도 믿어진다는 뜻입니다.
나아가 사람은 이 땅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라고 믿는 자와, 보이지는 않아도 영적인 차원의 사후세계가 반드시 있다고 믿는 자, 오직 두 부류로만 나눠진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있고 그분이 영원토록 통치한다는 그런 세계관을 확고히 세운 자라야 성경의 나머지 책들에 계시 된 당신의 영적인 진리들도 이해하여서 자기 인생에 적용 실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초란 시공간이 형성되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 외에는 없으며 완전한 암흑이었고 물질과 물체라고는 없으며 생명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은 땅과 흑암과 수면을 만드셨고 빛이 홀연히 들어왔습니다. 외출해서 집으로 돌아와 방에 전등불이 켜지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순식간에 흑암은 물러가고 전체 방 모습을 훤하게 지각할 수 있게 됩니다. 빛이 들어오는 순간 흑암 중에는 아무 의미 없던 방안의 물체들이 각기 역할을 가진 의미 있는 물체로 바뀝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도 모든 물건에 당신이 계획하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서 빛부터 미리 만드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어떤 물체나 존재도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않으면 흑암 속에 떠다니는 우주 먼지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인생에 대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왜라는 문제의 해답은 빛을 만드신 하나님만 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최초로 빛을 만든 후 보시기에 좋아하셨던 것입니다.(4절) 우선 하나님은 단순히 우주를 운행 시키는 법칙이나 기운이나 힘이 아니라, 지정의를 가지신 인격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당신께서도 당신이 만드신 천하 만물이 우리가 자연에서 느끼듯이 아주 장관인 것은 틀림이 없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 내용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각 개체에 당신께서 의도하셨던 목적과 계획대로 완벽하게 창조되어서 고유의 기능과 역할이 온전히 작동되고 또 집단으로도 완벽한 조화와 균형을 이뤘습니다. 우리 눈에는 카멜레온, 낙지, 도마뱀 등이 징그러워 보여도 생태계에 마련해 놓은 하나님의 신비 안에서는 너무나 좋고 아름다울 뿐입니다.
그분에겐 단 한 치의 하자, 실수, 실패, 착오, 부족, 불완전 등은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마음먹은 그대로 100% 완벽하게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고 영원토록 오직 당신의 뜻대로 행할 수 있기에 유일하게 자존하는 절대자이므로 ‘하나님(the Only Being)’입니다. 그런 분이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창조하시다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후에는 심히 좋아했습니다.(창1:31) 인간을 당신의 뜻에 완벽하게 들어맞도록 만듦으로써 창조에 마침표가 찍힌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를 심히 좋아하셨던 이유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인간이었는데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최고 걸작인 인간에게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코에 직접 생기를 불어넣는 방식으로 만드셨습니다.(창2:7) 당신의 뜻을 정확히 알아서 그 뜻대로 순종하도록 당신과 교통할 수 있는 영혼을 인간에게만 당신께서 직접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청지기 직분을 잘 수행하라고 자유의지까지 주셨습니다. 그 일이 억지로 떠맡아야 할 의무가 아니고 하나님이 기뻐했던 것처럼 인간도 기쁨으로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청지기 직분을 수행하지 않으면 당신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당신과의 교통이 완전히 끊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쪽에서 먼저 진정으로 사랑하며 교제하고 싶은 대상으로 창조했기에 인간은 그분에게 심히 좋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도 당신과 인격적 교제를 통해 당신을 진정으로 기뻐해 주기를 하나님은 바랐던 것입니다. 요컨대 모든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오직 하나님 그분의 완전하심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앙은 인간의 책임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들의 백합화 꽃이나 공중의 새 하나보다 못하다”(마6:26-29)라고 가르치신 까닭이 바로 그것입니다. 들꽃이나 참새는 절대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으나 인간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초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 땅을 대신 관리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자기가 이 땅의 유일한 주인이 되고자 그분을 완전히 배격했고 그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만 유일하게 주신 자유의지를 거꾸로 사용해서 자기 탐욕과 교만을 만족시키려 한 것입니다.
불신자도 들꽃과 나는 새를 보고 경이롭다고 찬탄하며 심지어 그 안에 놀라운 조물주의 섭리가 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영광이 들풀보다 못하다는 점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은 예수님 말씀대로 다 무너지고 겨우 예루살렘의 서쪽 성벽 일부만 그 흔적으로 남았는데도 말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크리스천 조크처럼 아버지가 준 찰흙으로 장난감을 만들며 놀면서 자기가 다 만든 것처럼 스스로 우쭐대는 어린애 꼴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거룩한 뜻과 계획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분을 배반 타락했기에 모든 인간이 비참한 절망 가운데 죽음으로 치닫고 있다는 진리는 절대로 수긍하지 않습니다.
공중 나는 새와 들풀은 인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좋아하셨던 각기 만들어진 바 역할대로 살아가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반역자는 인간입니다. 스스로 자신은 동식물보다 못한 물질이라고 비하하면서도 죽기까지 돌아서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 사회에 생기는 재앙과 비극은 거의 전부가 인간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적 자연재해들도 최근의 과학적 연구로 지구를 온전하고도 깨끗하게 보존하는 놀라운 기능과 섭리가 작동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장기간에 걸쳐서 보면 규칙적이고 인간이 통제 내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였습니다. 반면에 작금의 지구온난화는 그 성격이 판이한데 전혀 예상치 못하는 시기, 장소, 규모로 일어납니다. 이는 분명 인간의 무차별적인 자연 파괴와 무한 경쟁적인 공업발달로 인한 것이라 인간이 책임질 재해입니다.
신자 부모의 치명적 잘못
신자란 그분과 원수가 된 상태인데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택하심에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총을 입고서 구원받은 자입니다. 불신자 때 믿었던 진화의 허구성을 철저히 깨닫게 됨으로써 창조신앙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해주신 뜻도 창조 당시에 가졌던 당신과 기쁜 교제를 다시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첫 항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칩니다.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 경륜대로 살아가지 않고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신자가 꽤 많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청지기 직분에 충성하여 그분을 영화롭게 하려는 생각은 거의 없고, 자신을 물질 세상 안에서 물질적으로 영화롭게 하려고 그분의 능력만 이용하려 듭니다. 바꿔 말해 자녀들이 부모와 교회 안에서 창조주 참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대리인의 역할에는 충성하지 못해도 신자답게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이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도 없습니다. 솔로몬의 영광이 들꽃보다 못하다는 말씀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비유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그 모두를 채워줄 테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마6:31-34)고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를 맡고 있으면서도 작은 고난이 닥치면, 조금만 돈이 부족하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기도하는 내용도 전부 자신과 가족의 형통하는 문제뿐입니다. 자식으로선 자기 잘되라고 기도해 주는 것은 좋은데 믿는 대상만 다르지, 미신적인 기복주의와 비슷하다는 인식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현실 형통이 소원이라면 평소에 실력을 더 많이 쌓고 더 열심히 일하면 될 텐데도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에게 떠맡기는 것만 같습니다.
무엇보다 죄로 타락한 세상과는 다르게 주님을 따라서 의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가 심지어 교회에 갔다 오면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화를 내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것이 자식들이 보기에는 친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으로, 혹은 죄책감만 해소하고 신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하는 정도라고 여겨집니다. 온전히 성경대로 살지는 못해도 성경을 열심히 파고들어서 연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창녀 과부 이방인 병자들을 섬기는 일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오히려 그런 자들을 더 멀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돈과 권력이 많은 집사와 장로 옆에 줄 서기 바쁩니다. 교회가 먼저 그런 자들을 대놓고 우대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
믿음이란 완전히 바뀐 세계관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창조 경륜 안에서 얼마나 고귀한 존재이며, 그분의 대리인으로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맡아서 행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막중한지 절감해야 합니다. 정말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데 혹시 맛을 잃고 밝기가 쇠퇴하면 내 주변부터 부패해지고 갈 바를 모르게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매일매일 살아가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진짜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걸어가는 모습을 세상 사람들이, 최소한 자녀들이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급한 일이 있을 때만 교회 기도 모임에 찾아가서 눈물 찔찔 흘리며 호소만 하지 말고 말입니다. 그렇게 해선 자녀들로선 우리 부모를 그렇게 힘들게 만드는 하나님을 굳이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껏 부모들은 자식들 앞에서 교회 밖의 삶과 교회 안의 삶만 대조해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교회 중심으로 생활하며 목사님 말씀대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만 강조했습니다. 자녀들로선 주일 하루는 잘 지키나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과 어떻게 구별되게 살아야 하는지 온전히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 부모나 교회 어른들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으니까 사실상 배울 것도 없습니다. 거기다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보다 더 의롭고 합리적이며 따뜻한 경우고 많고 그들도 힘들면 기도합니다. 교회만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절대로 단순히 교회 생활로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토록 광대하시고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일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아니 유일한 목표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그분이 신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서 심히 기뻐하고 계시므로 신자 또한 그분의 기쁨에 동참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기쁨에 어떤 장애도 생기지 않도록 현재의 내 행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내 심령의 중심과 방향이 온전히 그분 쪽으로만 향하게 하는 평생에 걸친 싸움이 믿음입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멀리하는 이유는 바로 이 세계관의 싸움에서 교회와 기존 신자들이 세상에 패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침 지난주에 발표된 미국 기독교 관련 여론조사에 따르면 13세 미만 자녀를 둔 미국의 부모 중 2%만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 이념으로 세워진 미국에서 창세기 본문을 믿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유신론적 진화처럼 혼합주의 신앙을 가진 부모가 98%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조사가 덧붙이길 대부분의 부모, 심지어 거듭난 부모라도 자녀의 삶에서 영적인 부분이 학교생활, 스포츠 활동, 인간관계에서 잘 지내는 것만큼 크고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대학교에 가서 진화로 바뀌어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청년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며 교회를 떠나는 사태는 교회 지도자와 부모가 자초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을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인생의 왜라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다 찾았습니까? 최소한 찾으려고 노력합니까? 그래서 교회 생활로 자신의 신자 됨을 증명하기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창조주 하나님이 맡기신 청지기의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써 그분의 기쁨을 실제로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후자가 아니라면 자녀가 언제든 교회 출석을 중지해도 놀라거나 안타까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부모부터 교회에서만 믿음을 허비하고 실제 삶에선 전혀 믿음이 능력을 발휘하지 않은 탓이기 때문입니다.
(10/22/2023)
교회 출석과 청년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지 6개월 됐어요. ㅎㅎ교회에서 배우는게 없는거 같아서요... 말씀 잘보고 있습니다 목사님 미국에서도 건강하세요.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