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3:1-7)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8)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1-7)
이웃 사랑의 두 요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므로 신자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과 얼굴로 대면하기 전까지 이 땅에서 평생토록 삶에서 실현해야 할 일입니다. 한마디로 성화는 바로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고, 둘째는 네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나 실제 삶에서 어떻게 그런 사랑을 실현할 수 있을지가 문제입니다.
최근 한국에선 아파트 층간 소음 때문에 이웃 간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심심찮게 발생합니다. 지난주 신문 기사에 따르면 아래층 아줌마가 바로 위층 집을 찾아가 현관문을 수십 차례나 발로 퉁퉁 걷어차면서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이런 분쟁을 하는 사람 중에 틀림없이 교회 다니는 신자들도 있을 텐데 땅에 떨어진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는 더 추락할 것입니다. 거의 매일 마주쳐야 하는 아래 윗집 사이에도 이러니까,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에서도 박물관에 진열해놓아야 할 판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 죄와 무관하신 성자 하나님이시라 이 땅에서 인자로 계신 동안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죄로 타락한 본성이 생생히 살아 있는 연약한 신자에겐 아무리 따져봐도 무리한 권면 같습니다. 물론 평생을 두고도 완벽하게 예수님과 같은 수준에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것 자체가 교만이자 십자가 복음을 정확히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가장 가까이 있는 이웃에겐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며, 점점 그 대상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람이나 자기 형편에 따라서 사랑이 다르게 실현되어선 안 됩니다. 그럼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던 불신자 시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은 쉽게 말해서 자기가 도저히 사랑할 마음이 안 생기고, 주는 것 하나 없이 밉기만 하고, 만나면 불편하고 짜증만 나고, 그래서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하는 상대를 진심으로 자기처럼 사랑하게 되면 신자로서 행할 성화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일단 사랑하는 상대가 원수 같았던 자이므로 당연히 차별적인 사랑이 아니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계명까지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계속해서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자라나가는 것입니다.
은사 사용의 목적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동기와 방식을 가르치면서 사랑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를 내렸습니다. 우선 하나님께 방언, 예언, 능력, 믿음 등의 은사를 받았어도 교회 안에서 성도를 섬기려는 참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이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는데(4-7절), 이는 불신자들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세상 사람 모두가 동의하는 사랑의 뜻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런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즉 성화의 비결이 숨겨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외적인 은사를 사용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아주 신령하고 경건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사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쳐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자기 의와 믿음을 내세우려고 행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라고 비유했습니다. 참으로 의미심장하면서도 당시 고린도 교회의 은사를 받은 성도들의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한 표현입니다.
그 비유의 뜻은 신자가 참고할만한 내용은 하나도 없는 단순히 시끄러운 소음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했으나(마12:27), 예수님이 저주하신 대로 자기들 의를 자랑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행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지금도 일부 교파에서 그러하지만, 방언 같은 성령의 외적인 은사를 자기 믿음이 우월하기에 하나님이 그 영성을 인정하고서 더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주셨다고 자랑했습니다. 실제로 공적인 예배 중에 자기를 과시하려고 방언하니까 바울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방언 기도를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고전14:27)
본문은 사실상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꼽는 ‘쉐마’ -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는 말씀을 재확인한 셈입니다. 바울의 그 비유를 ‘쉐마’에도 적용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그 경문을 손목과 이마에 아무리 붙이고 다녀도 하나님의 말씀인 쉐마마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사랑 없이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면,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계명을 지킬 때는 더더욱 그래야 할 것입니다. 은사가 외적으로 경건하게 발휘되어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며, 그렇다면 성도 개인이 은사의 겉모습을 흉내만 내었거나 사탄이 역사한 결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란 기도하여서 초자연적인 응답을 받는다는 뜻인데, 아무리 그래도 사랑이 없으면 자기 믿음을 자랑하려는 의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따지면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도 기도로 기적적인 응답이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오지 않았고, 그 반대로 사탄이 그런 종교적 방식을 사용해 그를 농간 조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믿음은 거짓이요, 그 뜨거운 기도도 꽹과리 소리에 불과한 것이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은 사탄의 역사를 대행하고 있는 꼴입니다.
바울은 더 심각한 예를 비유로 들었는데 그 정확한 뜻을 알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이는 순교를 의미하는데 나중에 실제로 네로의 핍박 때에 신자들이 산채로 나무 기둥에 묶여서 가로등처럼 밤을 밝히는 용도로 불사르게 내어주었습니다. 바울의 뜻은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닌데도 순교하는 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또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니까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뜻까지 됩니다.
신학자들은 고린도전서의 저작 시점(AD 55년경)이 네로의 핍박(AD 64년경)보다 약 10년 앞선 것으로 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할 시점에는 로마의 박해는 없었고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앞장서서 열정적으로 행했듯이 유대교로부터의 핍박만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그에 의해 순교 당했는데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모욕한 자는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방식의 순교를 말한 것은 바울이 성령의 영감으로 네로의 핍박을 정확히 예언한 셈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의 결론으로 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13절)고 선포했습니다. 단순히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차적인 뜻은 그러하지만, 믿음과 소망은 천국을 가는데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기에 사랑이 없는 믿음과 소망도 천국을 가지 못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랑이 최고일 수밖에 없는데 본문대로 하자면 이웃사랑 없이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물론 사랑이라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뜻은 아니며, 다시 강조하건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는 이웃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외형적 사랑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사항이 생겼습니다. 믿음이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 신자도 방언 같은 성령의 외적인 은사를 받고, 기적적인 기도의 응답도 일어나며, 심지어 순교까지 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예 충분히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가능한 일이고 실제로 그러합니다. 우선 악령의 방언도 있으며, 무당도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 배후에 있는 사탄의 권세는 엄청나게 크고 무엇보다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기 때문입니다.(고후11:14) 물론 욥기 서론에서 보듯이 사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허락하에서만 행할 수 있는데, 간혹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과 시험과 때로 고난에 빠트려도 하나님의 사랑에선 절대 끊어내지 못합니다.(롬8:38,39)
문제는 믿음 없이도 순교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모순되고 왜곡된 아주 복잡한 존재입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려고 죽음마저 불사합니다. 심심찮게 한국에서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듯이 정치인이나 정부 관료들이 부정부패로 축재한 잘못을 감추려고 자살하지 않습니까? 당사자인 범인이 죽어버렸으니까 더 이상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리석은 대중은 오히려 의인이라고 추앙까지 합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이단에 넘어간 자들의 종교적 열정은 가족도 못 말리며 패가망신하는 일들이 자금도 많습니다. 자신의 영적인 우월함을 과시하려고 죄송하지만 얼마든지 순교에 가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참 영성이 아니라 종교적 열정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선 순교가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 여기고 서로 순교하려고 자원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순전함을 의심하려는 뜻은 전혀 없으며 간혹 순교를 위한 순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 중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고, 그것도 하나님과 견주어서도 절대 지지 않으려고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습니다.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부터 정녕 죽는다는 선악과 금령을 어기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바울의 비유가 결코 과장이거나 거짓이 아닙니다. 원죄 하에 묶인 인간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어리석기까지 합니까?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은혜 안에 들어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특별히 그 사랑이 어떠한지 깨달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바꿔 말해 사랑이란 외적으로 드러나는 극적인 행동과 정성과 열정의 크기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자기 가진 것도 다 팔아서 이웃을 돕는다고 해서 또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시간과 노력을 다 바친다고 해서 진정한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자연 재앙으로 큰 피해당한 자를 도우려고 구제 성금을 많이 내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의 순전한 성의를 결코 무시해선 안 되지만 평소에 자기 주변의 그들보다 더 힘든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신자들이 사랑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기 질투 미워하는 부정적인 감정은 하나도 없이 생각만 해도 너무 좋아서 뭐든 잘해주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사랑이라고 여깁니다. 실제로 말과 행동에서 특별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힘껏 도와주어야만 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은 도무지 실천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사랑을 남녀 애인 사이에 혹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모습에 대입해서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가 배운 것들, 더 정확히 말해서 체험한 범위 내에 머무는 아주 어리석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이라고는 애인과 가족 말고는 해본 경험이 없는 데다 원수는 아무리 해도 좋은 감정이 안 생기니까 아예 원수 사랑의 계명은 제쳐 놓는 것입니다.
간혹 큰 병이 생겼거나 엄청난 환난을 겪거나 극심한 가난에 찌든 이웃을 보면, 예컨대 이번 하와이 대화재로 모든 것을 일순간에 읽어버린 이재민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에 믿음과 상관없이 도와주려 합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한 조상을 가졌으며 하나님을 닮게 지어진 형상이 남아 있기에,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누구에게나 있는 양심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기는 측은한 마음입니다. 문제는 신자인데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원수는 물론 본문이 가르치는 사랑을 실천하기도 너무 힘듭니다. 장로님이나 목사님 자제들이 부모에게 큰 상처나 심지어 학대받아서 나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주변에 종종 있지 않습니까?
사랑의 본질
누구나 경험하듯이 사랑은 참으로 미묘하고 실행하기 너무 힘듭니다. 철학적으로 가장 앞섰던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사랑을 다섯 종류로까지 나누었습니다. 간단히 설명해드리자면, 첫째 남녀 간의 육체적 매력에 이끌리는 성적인 사랑을 에피투미아(Epithumia)라고 하며, 둘째는 첫째와 거의 같지만 남녀 간에 연애하여서 서로를 독점하려는 감성적 사랑을 에로스(Eros)라고 합니다. 셋째는 가족 간의 사랑으로 스톨게(Storge)이고, 넷째는 친구나 동료애를 나타내는 필레오(Phileo)가 있습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실현한 어떤 차별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신적 사랑으로 아가페(Agape)입니다.
예수님이 성화가 바로 이웃사랑이며 그것은 하나님 사랑과 또 자기 사랑과 똑같아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바로 마지막 아가페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나머지 네 사랑은 믿음 없는 불신자들도 행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성령이 내주해주신 신자는 당연히 예수님의 사랑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아가페 사랑을 실현은커녕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도 몰랐으나, 예수를 믿을 때 그 사랑을 생전 처음으로 알게 되고 그 후로 계속 그 사랑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결국 성화란 그래서 평생을 두고 아가페 사랑을 주변에 최대한 많이 실현해나가는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비결을 바로 본문 4-7절이 가르칩니다.
구체적인 행동 지침으로 15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일일이 살펴볼 여유는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바울이 동일한 내용을 세 번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이 15가지 모두를 종합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가 그것인데 한마디로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언뜻 우리의 상식과 이성에 배치되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려면 무엇이든 그에게 주면서 베풀어야 하는데 오히려 스스로 참는 일이 사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3,4)라고 권면한 대로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이 성화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수치를 참으신 것처럼 너희도 외부에서 가해지는 고난과 수치를 참아내라고 권했습니다. 주님은 평생토록 지켜야 할 율법과 강령이 하나님과 이웃사랑이라고 했는데, 바울은 그런 사랑을 하려면 인내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일관되게 사랑은 참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화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참는 일을 사랑의 첫째 덕목으로 꼽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나머지 12개 행동 지침도 상대에 대해서 먼저 참지 않고는 도무지 실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유 하려면 상대의 무례하거나 부당한 요구 행동 등을 참아야 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려면 상대가 다른 이를 사랑하거나 더 좋아해도 참아야 합니다. 자랑이나 교만하지 않으려 해도 속에서 저절로 생기는 자랑과 교만을 눌러야 합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 등 모두가 속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죄성을 누르거나 내 마음은 하고 싶은데 하지 않고 참는 것입니다.
사랑의 덕목 15가지 중에서 직접 능동적으로 행하라는 것은 참는 것 빼고는 오직 세 가지뿐입니다. 진리를 기뻐하는 일과, 모든 것을 믿는 것과,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결국 참는 것을 포함해서 열둘이 하지 말라는 것이며 셋만 하라는 것입니다. 우선 잘 참기만 해도 사랑은 성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려면 성경의 진리를 기뻐해야 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는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말과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다 하지 말아야 할 내용이 그리 심각하고 어려운 일들이 절대 아닙니다. 너무나 상식적인 내용이고 굳이 성경을 몰라도 누구나 아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랑의 정의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나 나처럼 이웃을 사랑하려면 초등학생이라도 동의하는 잘못만 하지 않아도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서 내 몸을 불살라 내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아낌없이 다 내어주어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마음에 안 드는 행동과 말과 태도 등만 참아주어도, 심지어 너무 현실적으로 아주 잘 나가는 이웃을 투기만 하지 않아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순교해도 사랑이 없을 수 있고 그러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왜 사랑이 죄와 싸우는 성화와 연결되고, 또 사랑의 본질 핵심 출발이 참는 것인지 이제는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아가페 사랑
놀랍게도 예수님도 사실은 십자가에서 그런 사랑을 베풀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있는 인간들을 바라볼 때 어떤 점이 좋고 기쁘고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우리를 바라본다면 과연 그런 점들이 단 하나라도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따져도 귀엽고 예쁘게 여겨질 만한 요소들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어폐가 있지만 오직 한 가지 당신께서 지었기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밖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땅을 인간이 살아가기에 충분하고도 완벽하게 모든 여건과 물질들을 미리 다 만드신 후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나아가 당신의 형상을 닮게 지으시고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리라는 너무나 고귀한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좋은 것으로 풍성히 넘쳐났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양껏 받아 누리며 그분을 기뻐하며 감사 교제 찬양 경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최초 인간은 그마저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맘대로 이 땅을 다스리려 했습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선포한 말씀대로 인간의 삶에는 고통과 죄악만 번창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탄 즉, 재물만 주인으로 삼아서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인생을 꾸려갑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죄 가운데서 죽음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정의, 아름다움, 진실, 정직, 겸손, 효도, 충성, 신뢰, 서로 돕는 사랑 등으로 충만해야 할 이 땅에 불의, 무정, 불법, 추악, 탐욕, 악의, 교만, 투기, 폭행, 살인, 분노, 전쟁 등으로 부패해져서 피조세계도 죄에 빠진 인간으로 인해 인간과 함께 절망 가운데 썩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목적을 완전히 왜곡 파괴하였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탄의 종이 되어서 당신을 거역 대적하는 인간에게 마땅히 죽음의 심판을 내려야 하나 끝까지 참아주었습니다. 성경의 특별히 구약의 기록을 보십시오. 어떤 이는 잔인한 심판의 하나님만 보여서 기독교를 믿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런 해석은 인간의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계속해서 끝까지 참아주셨다는 기록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지으면 벌을 내렸다가 조금이라도 회개하면 다시 구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심판의 재앙이 아니라 구원의 축복이라는 것이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아무 공로 없으나 어린 양의 피를 자기들이 거주하는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으면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어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쫓아내고서 살게 해주었으나 끝까지 또 타락 거역하자 그 땅에서 다시 쫓아내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이스라엘은 아무 공로 없는데도 고레스를 움직여 불시에 포로 해방의 칙서를 내리게 해서 가나안 땅으로 돌려보내 주었습니다. 애굽에서나 바벨론에서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죄 중에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큼 예쁜 짓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자기들 힘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구원의 은혜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창조 때 아담의 타락 이후로 배역한 인간에 대해서 계속 참고 또 참으셨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당신께서 창조한 당신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며 교제 동행하기를 소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사43:21,22)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그대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이어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사43:25)고 선포합니다. 참아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지난 모든 허물을 도말하고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인간과 함께 기뻐하고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참고 참으며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인데 그 사랑은 시종일관 하나님이 끝까지 참으시는 모습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타락 후의 하나님 사랑
그런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모든 이를 다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백성만 사랑하십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계획을 바꾼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그렇게 계획했습니다. 선악과 금령부터 당신의 품을 떠나지 않아야 당신의 모든 사랑을 베푸신다는 뜻이었지 않습니까? 그 뜻이 완성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그 사랑을 보여주었고 결국 죽기까지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이 땅의 신자는 불신자들 속에서 온갖 고난 수치 핍박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처럼 끝까지 참아내는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이후에 비로소 신자들이 남에 대해서 참을 일이 없고 오직 완전한 사랑만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화는 그래서 평생토록 아가페 사랑을 훈련, 연습, 실현하는 과정입니다. 너무 뜨겁고 모든 것을 수고 희생하며 목숨까지 바치는 사랑이라고 가정하지 마십시오. 처음부터 그런 사랑을 하려 해선 단번에 실패하고 다음에는 해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지금껏 원수를 사랑하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들을 도저히 참아낼 수도 없지 않았습니까? 요한이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사랑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전부 아가페 사랑을 말함)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이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하나님은 진정으로 당신의 택하신 백성으로부터 찬양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오직 그 이유와 목적 때문에 주님의 초림 때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 재림 때까지 죄 중에 빠져 당신을 대적하는, 믿은 후에도 수시로 죄로 넘어지는 우리를 참아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주님처럼 모든 일에서 끝까지 참아야만 나머지 더 좋은 12가지 사랑의 덕목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반드시 다음에 사랑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또 참고 있다는 것은 상대가 여전히 잘못과 죄악 중에 있고 특별히 신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신자가 먼저 모든 것을 참아야 하고, 그다음에는 반드시 먼저 사랑을 베풀되, 상대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오든 끝까지 참아내며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당장 열정적으로 사랑하려고 덤비지 마십시오. 그전에 정말로 진지하게 이웃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다 참아낼 수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자신 있게 예스가 나오지 않으면 상대를 참을 수 있는 훈련부터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첫째가는, 아니 유일한 비결입니다.
(8/2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