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 42:1-6) 위선자만 환난을 이겨낼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1-6)
최고로 억울한 욥
성경 인물 중에 욥만큼 큰 고통을, 그것도 억울하게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졸지에 다 당했습니다. 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와 욥의 종들을 죽이고 가축을 다 탈취해 갔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양들이 다 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광야에서 강풍이 불어닥치는 바람에 자녀들마저 다 죽었습니다. 평생을 두고 이루어 놓은 소중한 것을 다 잃어버려서 더 이상 살아갈 의미조차 없어진 셈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자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성 종기가 도져서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으로 종일 계속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순전한 믿음을 가진 욥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다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지경에 빠졌는데도 하나님에게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는 남편의 모습을 본 아내가 참다 못해서 하나님을 저주하며 죽는 편이 낫다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욥의 육신의 상태와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위로하러 온 세 친구가 7일 동안이나 한마디 말도 못 해줄 정도였습니다. 정신을 차린 친구들은 하나님은 의인은 반드시 복 주고 악인은 반드시 벌을 주므로 이런 환난을 겪은 원인도 욥의 죄 때문이니까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욥으로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당해야만 할 죄를 지은 적이 없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친구들이 틀렸다고 반발했습니다.
결국 젊은 엘리후가 나서서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승복해야 한다고 중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기 쪽에 잘못이 없고 평소에 선을 많이 베풀었으니까 승복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고집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폭풍 가운데 임재하신 하나님이 직접 욥을 질책하면서 자연계의 이치에 관해 많은 질문을 던지며 대답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38-41장) 욥은 그 이치를 단 하나도 알지 못함을 깨닫고는 고통의 원인을 따졌던 자기가 잘못했다고 본문처럼 순순히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외적 상황과 육신의 병을 전혀 호전시켜 주지 않았고 그렇게 알고 싶었던 고난의 이유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욥이 뜬금없어 보이는 고백을 하면서 갑자기 하나님께 바짝 엎드린 이유가 더 궁금해졌습니다.
창세기 족장 시대의 사람인 욥의 이야기는 읽으면 읽을수록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충격적이면서도 큰 은혜가 됩니다. 착하게 살면서 남에게 해를 끼친 적이라곤 없는 의인도 끝까지 그 원인도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무려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에 당신께 정성과 재물을 바친 만큼 비례해서 복을 받고 당신의 계명을 어긴 만큼 벌을 받는다는 기복주의가 틀렸다고 직접 선언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도 많은 교회에서 욥의 세 친구처럼 하나님을 잘 믿고 교회 활동에 충성하면 복을 받고 그러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내용이 인간적 치성이나 물질이 아닐 뿐, 도덕과 종교로 교묘하게 위장한 기복주의의 일종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와 다르게 가르치는데도 신자들은 그저 ‘아멘’으로 화답하고 오히려 그런 교회가 더 부흥합니다.
병 주고 약 주는 하나님
욥기가 충격적이라고 말씀드린 까닭은 너무 순진한 욥을 보고 화가 나서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아주 불경한 말로 다그쳤지만, 오히려 그 비난이 잘못이라기보다 충분한 타당성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멀쩡히 성실하게 살고 있는 욥의 믿음의 순수성을 두고서 하늘에서 사탄과 하나님이 내기를 걸었기에 받은 고통이었습니다. 욥이 고통을 당한 원인이 너무나 어이없지 않습니까?
물론 이는 욥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경우이지 신자가 겪는 고통의 원인이 매번 그런 내기 때문은 아닙니다. 욥도 본문의 고백을 했을 당시로선 영계의 그 내기 사건을 미처 몰랐을 것입니다. 만약 알았다면 하늘에서 이미 정해진 계획을 전혀 모른 채 불평 의심한 죄부터 회개했어야 합니다. 욥기의 저자가 누가 되었던 이 천상의 회의는 모든 일이 선하게 마무리된 후에 성경으로 저작될 때 성령이 그 저자에게 영감을 주어서 알게 되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사탄은 욥이 현실 상황이 풍요로우니까 하나님을 잘 믿지 큰 환난이 닥치거나 자신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면 반드시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불평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고 현실 소유를 다 없애고 그에게 중병을 주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겉으로만 보자면 하나님마저 그를 갖고 놀은 셈이며, 최대한 양보해도 병 주고 약을 준 꼴입니다.
그럼에도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하에 그분이 제한하는 범위 내에서만 욥에게 고통을 안겼으니까 이만한 귀한 은혜와 권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의 육신은 살려두라고 하신 것은 당연히 욥의 생명을 당신께서 붙들어 주시고 믿음도 줄지 않고 더 성숙해지도록 당신께서 인도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천상의 어전 회의에서 하나님이 먼저 사탄에게 욥의 근황을 물었으므로(욥1:8), 사실상 당신께서 사탄더러 그런 내기를 하도록 유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한 믿음을 아시기에 그 내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음을 다 아셨던 것입니다.
나아가 욥의 믿음을 당신께서 업그레이드할 계획까지 이미 마련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으로 간섭하여 욥더러 훨씬 전에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 친구 엘리바스에게 반박하게끔 인도한 것입니다. 세 친구와 엘리후의 논쟁을 통해 영적 갈등을 계속하게 한 후에,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들이 그의 고집을 깨트려서 입을 완전히 닫게 만든 것입니다.
바울도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고 가르쳤습니다. 그도 죽음 직전까지 이르는 고난을 여러 번 겪으면서(고후11:23-27) 성령님이 끝까지 자기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갈수록 더욱 강건케 해주신 은혜를 체험했던 것입니다.
천국 가야 알 수 있다.
지금도 많은 의인이, 예컨대 아주 의롭고 경건한 목사 장로 가정에 죽을 때까지도 이유를 모르는 너무나 큰 고난들이 연거푸 겹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구체적 원인을 모른다는 것은 죽어서 영계인 천국에 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입신(入神)하여서 천국에 올라간 적이 있는데 그때 인간이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왔습니다.(고후12:4) 그가 간증해선 안 된다고 미리 못을 박았으니까, 추측하건대 하나님이 이 땅의 종말에 관한 비밀을 말씀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엄청난 고난들을 열거한 후에 그런 간증을 했고, 또 입신은 주로 거의 죽어가는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입신의 방식과 시기는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바울도 하나님께 제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소명에 끝까지 충성했는데도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고난을 왜 주셨느냐고 따졌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선 그의 의문이 해소되었거나, 천국이 너무 좋아서 그런 갈등을 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같은 서신의 앞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6-18)
이 땅에서 신자가 죽도록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멀리 떨어진 하늘에 있다고 하나님이 모를 리 없고 모른 척하는 것도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려는”(고후4:17) 당신만의 방식이자 신자가 겪어야 할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이 땅의 고난은 잠시면 지나가고, 인생 전체도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모세의 체험적 고백처럼 인생이 강건해야 80이라도, 오늘날처럼 백 세 인생이라도, 날아갈 정도로 신속히 갈 뿐입니다.(시90:10)
모세는 또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무리 장수해도 고난의 연속이 인생이며 그 대부분의 원인을 이 땅에선 모른다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고난이 많으니까 이 땅에선 오직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모든 고난을 인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의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하늘에 마련해 놓은 더 아름다운 처소를 온전히 믿고 정말로 소망한다면 고난의 원인을 따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욥이 믿음의 결론으로 깨달은 본문이 바로 그런 뜻이며,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겪고 있는 이유 없는 고난에 대해서 성경이 제시하는 근본적인 해답입니다.
하나님께 따지지 말라.
그래서 욥은 가장 먼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시인합니다. 욥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고통을 겪은 직후에 하나님이 복도 주고 화도 주며, 사람의 살고 죽음을 주관하신다고 분명히 시인했습니다.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서 담담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것은 우리의 믿음에 비하면 아주 월등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천상에서 사탄에게 두 번이나 욥의 믿음을 칭찬했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의 믿음이 입술로 원망하지 않았던 딱 그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막상 너무나 큰 고통을 겪게 되니까 그 진리를 자기에게는 진리답게 온전히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환난이 한꺼번에 졸지에 닥쳐서 전부를 잃고 나니까 그 이유를 알고 싶어졌습니다. 정말로 이유가 궁금하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따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의로운 자기가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느냐고 따진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한 진리를 자기에게는 적용하지 않았기에 자기를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신분과 위치라고 스스로 제쳐놓은 셈입니다.
세 친구가 계속 네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쳤으나 그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리후가 나서서 욥이 스스로 의롭게 여겼고, 심지어 하나님보다 의롭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분을 발했다고 깨우쳐 주었습니다.(욥32:1,2) 엘리후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예비하는 메신저로서 여호와가 직접 욥을 견책하기 직전에도 또다시 그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욥37:23,24)
인간이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도 그분의 권능이 지극히 커서 그 무한한 공의를 절대 굽히지 아니하시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한다고 말합니다. 바꿔 말해 인간이 하나님을 쉽게 찾고 이해할 수 있는 공의를 베풀면 굳이 그분을 경외할 이유가 없고 또 경외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인간의 눈에 공의가 굽어 보이면 그분에 대한 완전한 경외심도 잘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현실이 풍요롭든 고달프든 자기 임의로 판단하니까 하나님께 온전한 진심으로 항복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셔서 인간이 그 전부를 절대로 온전히 알 수 없어도 그분의 공의는 절대로 굽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며 그분의 공의가 굽었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이 모른다고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은 그런 자들 스스로 세상 이치를 다 안다고 큰소리치면서 하나님을 알 필요 없다고 먼저 그분을 거부한 것입니다.
욥은 자기 아들들이 혹시라도 생일 파티 하면서 죄를 지었을까 속죄 제사를 대신 드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의심 원망하지 않았고 입술로 저주의 말은 하나도 내뱉지 않았습니다. 행동과 말에 악함이 없고 종교적 측면에서도 전혀 하자가 없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하심에는 그분만의 절대적이고 거룩한 뜻이 있고 공의도 절대로 부족하거나 굽어지게 실현될 리가 없다는 진리를 지식적 교리로만 이해했던 것입니다. 심령 중심에서부터 자기 전부를 걸고서 그 진리를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겨우 숨만 붙어 있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런 꼴이라도 나를 온전히 믿고서 사랑하고 나에게 순복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믿음을 요구했듯이, 욥으로부터 너 자신의 전부를 걸 수 있는 바로 그런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욥으로선 하나님이 자연계에 대해 퍼부은 질문에 단 하나도 답변하지 못하는 와중에, 우선 하나님이 그 모든 만물을 정말로 조화롭게 다스리는 완전하신 분임을 새삼 깨달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백 개가량 되는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은 도무지 숫자로 셀 수 없을 만큼 광대한 차원이고, 그에 대해선 자기가 전혀 무지하다는 사실도 생전 처음으로 분명히 알게 되고, 그래서 자기를 견책했던 엘리후의 말도 떠올랐을 것입니다.
자기 같은 의인이 이런 억울한 고통을 당하니까 이해가 안 된다고 따진 의미는 어쨌든 자신의 지혜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더 정확히는 광대하지만 절대로 굽지 않는 공의보다 뛰어나다고 우긴 셈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큰소리치면 그분은 무시한다는, 즉 반드시 침묵으로 대응하신다는 진리를 욥은 비로소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자기 입으로 생명을 주신 이도 앗아가는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기에 지금 당장 자기를 죽여도 아무런 원망이 없어야 합니다. 아직 죽이지 않고 살려 놓은 상태인데도 나는 의인으로 무죄한데 왜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따졌습니다. 거꾸로 뒤집으면 잘 믿는 자기에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잘못이라는 뜻입니다. 권선징악적인 형벌의 세기와 수준만 다를 뿐 사실상 세 친구와 같은 맥락의 믿음입니다.
억울한 고난을 겪으면
그러니까 욥은 자기는 무지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알 수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감히 말만 앞섰다고 비로소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고 따지기 전에 자신의 어리석음부터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이자 큰 교만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공할 힘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뜬금없는 종교적 치사가 아니라 그분의 완전하신 공의를 이제는 자기에게부터 온전히 적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신자가 고난을 겪으면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밝혀졌습니다. 절대적이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를 넘어서 자기 전부를 그분에게 바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이 땅의 물질적 현실에 제약받는 연약한 인간인지라 슬프고 억울한 측면이 자연스레 생기고 또 온갖 교리적 신학적인 의심이 따르겠지만 일단 그분을 무조건 신뢰해야 합니다.
창조주이자 영원토록 스스로 자존하시는 유일한 존재요, 진리와 아름다움과 선하심에 단 한치의 부족과 하자 없이 완벽하신 하나님으로 말입니다. 길어야 백 년을 살고 하루에도 생각이 변죽 끓듯 하는 피조물 인간과 그분과의 사이에는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음부터 가장 먼저, 아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겪어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해가 안 되어도 그래야 합니다. 다른 뾰족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욥기의 이 결론이 개인적인 고난에만 해당할 뿐, 요즈음 같이 자연 재앙, 전쟁, 기아, 전염병, 무차별 테러 등으로 점철하는 인간 사회의 비극이나 타락상을 하나님이 방치하고 있는 그런 실상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이해해선 안 됩니다. 동방에서 욥만한 거부는 없었는데 재산 규모로 보면 오늘날 재벌 회장급입니다. 졸지에 아무 잘못 없이 많은 종이 죽었고 욥 자식들의 아내와 남편들, 즉 사돈 집안도 희생되었습니다. 그 동네에 수백 명의 최하 수십 명의 합동 장례식이 열렸을 것입니다. 한국의 세월호나 이태원 사태처럼 그 사회의 모두가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참극이었습니다.
성경 진술에 따른 결과적 판단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욥 개인의 믿음을 바로 세우려고 사탄과 내기하느라 발생한 환난이었으므로, 그들에겐 정말로 개죽음이었기에 하나님의 공의는 아예 실종되었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이 인간 사회의 비극을 외면 방치하는 하나님이라 믿지 않을 것이며 믿을 필요도 없다고 비방하지 않습니까? 특별히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런 비극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반드시 있다고 입에 달고 다니는 기독교 신자들을 보고 너무 꼴 보기 싫은 위선자라고 비난합니다. 너희가 믿는 신의 그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다그쳐도 신자들은 제대로 변증하지 못합니다.
본문은 그런 비난에 대해 바로 그러니까 거룩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이라고 단호하게 답변합니다. 이는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른 기독교 특유의 역설(paradox) 중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는 유일한 존재인지라, 인간에게 일일이 미리 설명해 주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도 인간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일 뿐입니다. 그와 반대로 고통이 다 끝나고 다시 원상으로 회복되거나 더 많은 복을 받았어도 그분의 뜻을 끝까지 모를 수 있습니다. 욥기의 마지막도 그냥 원상 회복되었다는 것이지 본문 외에 따로 더 깊은 뜻을 깨달았다는 기록이 없지 않습니까?
그럼 무슨 뜻입니까? 세상에 도무지 이해도 안 되는 비극과 재앙이 많이 생겨도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모른다는 사실부터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욥처럼 자신은 의로운데 왜 이런 고통을 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따지는 일이 오히려 가장 근본적인 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순전히 역설적으로 따진 것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큰 참극을 허락하지 않았다면 욥은 이렇게까지 영적으로 깊이 갈등하지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 하나님과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은혜는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욥을 이끌어서 도달시킨 장소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자신의 무지무능함 사이를 메꿀 수 있는 인간적인 방안은 단 하나도 없다고 시인하게 하는 곳입니다. 그 사이를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그 은혜가 인생사에선 종종 엄청난 고난을 통해서 더 오묘하고 풍성하게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의미를 설명해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설명해 주어도 인간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에겐 단 한 치의 오류가 없는 데도 있는 것처럼 따지고 드는 죄가 크다는 점부터 욥에게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비극도 하나님의 은혜
욥이 엄청난 두 가지 환난을 받은 직후에 행한 두 번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 수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든 이의 생명을 주시고 거두시는 분이며, 인생의 복과 화를 주관하신다고 밝히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까지 했습니다. 놀랍게도 친구 발닷에게 반론하면서 모든 자연 현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는 인간이 천 번을 논쟁해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고 시인했습니다.(욥9:3) 비록 하나님께 원망하는 어조가 포함되었어도,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욥9:15)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문학적으로 따지면 욥기는 서론과 결론이 짝을 이뤄서 같은 의미를 강조하는 수미상관의 형식입니다. 마지막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자연 현상의 이치에 대한 백 가지 질문을 퍼부었습니다. 욥 겨우 그 백 가지 질문에 입도 벙긋 못하게 만듦으로써 네가 처음에 하나님과 천 번을 논쟁해도 대답 못 한다고 고백한 내용이 절대적 진리라고 다시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욥의 믿음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라는 사실은 알아도 그분이 어떤 뜻과 계획을 갖고서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욥도 처음에는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도 몰랐으나 이제는 그 사실 하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모든 신자가 가져야 하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욥의 말문을 막으신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흥미롭습니다. 세 친구와 엘리후와 아내까지 욥을 믿음과 말이 다른 위선자라고 비방한 셈이었는데 사실 그런 비방을 받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믿음과 행동이 다른 도덕적 위선을 떨어도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 분명한데도 그마저 은혜라고 감사하고 심지어 기쁘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위선을 말합니다. 그들로선 광신적 위선을 떠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으나, 그 고백이 욥이나 바울처럼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서 자기 전부를 걸고 하는 진심이라면 하나님에겐 절대 위선이 아니라 오히려 의롭고 성숙된 믿음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모든 신자가 갖길 소망하는 믿음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욥의 영적인 갈등을 통해서 딱 하나 고쳐준 사항은, 네가 의로운데도 고난받는다는 그 생각이 틀렸고, 감히 하나님의 뜻이 잘못이나 부족하지 않은지 따지려고 든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옳고 인간은 절대적으로 연약하고 어리석고 불완전하고 자기 생각과 감정에 치우쳐서 자기를 높이려는 죄의 덩어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해서 하나님은 신자더러 그런 고백을 하게 하려고 고난을 자꾸만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신자는 자꾸만 타당한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게 해서 벌거벗긴 채로 당신 앞에 완전히 납작 엎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이 은혜라는 진리는 불신자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생겨야만, 그것도 완전히 성숙해져야만 비로소 겨우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만큼 하나님의 일에 충성했던 신자는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한 번만 맞아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욥 같은 고통을 다섯 번이나 겪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는데 그런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핍박했듯이 세상이 하나님을 거역한 탓이니 굳이 하나님을 원망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그도 욥처럼 정말로 억울한 고통이 따로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는 것은 전혀 억울하지 않고 또 이전에 신자들을 핍박한 죗값을 치르는 셈이므로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더 활발히 전하려 하는데, 자꾸 지병이 방해 되므로 제발 이것만은 낫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꿈쩍도 않고 침묵으로만 일관했기에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바울이 깨달은 진리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12:10) 쉽게 말하면 신자의 억울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세상 앞에 더 크게 증명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진심으로 그 고통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있음을 알기에 얼마든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큰 재앙과 비극도 신자가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오리려 그 고난을 진심으로 순응하며 감사하는 모습을 보일 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조금이라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신자의 일생과 세상만사를 온갖 재앙을 포함해서 모두가 주님의 은혜라는 너무나 위선적으로 보이는 고백이 나오게끔 인도하고 계십니다. 욥처럼 내가 의인인데 억울하다는 불평부터 그쳐야 하며, 그치지 않으면 죄송하지만 계속 고통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그 신자를 믿고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는 욥처럼 세상의 비극과 불의가 이해되지 않아서 분노하며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나이가 70이 넘으니까, 즉 가진 것 하나 없이 오직 벌거벗은 몸으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할 시기가 다가오니까, 여전히 이런저런 고난을 겪고 있지만, 본문 같은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날이 갈수록 삼위 하나님 외에는 인생에 아무 소망 의미 가치가 없다고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세상 앞에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억울한 고통을 당했다고 여겨질 때 반드시 신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분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절대적 진리가 오늘부터 시작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시리즈의 결론과 다름없으므로 그에 바탕을 두고 더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시다.
(11/12/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