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3:9-18) 예수 재림의 신호를 포착한 과학자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3)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9-18)
너무나 황당한 참극
현재 중동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큰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둘 다 잘못한 점이 많고 또 둘 다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으니 윤리적 정치적 시시비비를 가릴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너무나 애꿎게도 많은 부녀자, 노인은 물론 병원에 입원한 어린이 환자들까지 희생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도 그런 끔찍한 광경을 매일 생생한 화면으로 접하게 되니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크게 곤혹스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이 욥의 믿음을 정금(精金)처럼 성숙시키려고 엄청난 환난을 허락하는 바람에 멀쩡한 자식들과 종들이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들로선 길을 걷다 우연히 높은 빌딩에서 떨어진 물건에 맞아 죽는 것 같은 황당한 참극입니다. 굳이 하나님을 변호하자면 결과적으로 인생살이의 이런저런 고통을 더 이상 겪지 않게 해주었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억지 춘향 같습니다.
욥도 졸지에 자식을 다 잃은 아비로서의 가슴 찢어지는 슬픔으로 평생을 큰 고통 속에 지내야 하지만, 어쨌든 그의 환난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과 계획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식과 종들의 억울함이 훨씬 더 크므로 하나님이 꼭 그들까지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이 그에 대한 성경적 해답입니다. 인간 세상에 하나님 보시기에 의인은 단 한 명도 없고 그 반대로 오로지 죄인뿐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 될 정도로 탐욕에 눈이 어두웠고 남을 말로 속이고 해하며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세상의 파멸과 고생만 있지 평강의 길은 사라졌다고, 즉 인간 세상에 공평과 정의가 사라져 디스토피아가 된 까닭이 전적으로 인간 책임이라고 합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불시에 아무나 심판해도 당신의 공의에 하자라곤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 쪽에선 그런 죽임을 당해도 하나님께 억울하다고 호소할 만한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법정에선 태어날 때부터 이미 사형수로 선고받은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남산 꼭대기에서 던진 돌에 우연히 맞아 죽은 것 같아도 단지 사형 집행의 시기와 방식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사형수가 된 이유를 성경은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18절)는 한마디로 결론짓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데도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을 두려워할 모든 여건과 상황을 하나님이 미리 다 마련해 주었기에 인간이 하나님을 정말로 두려워만 했다면 그분의 공의가 인간을 통해서도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만물 가운데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분명히 보여서 알게 해주었습니다. 인간은 자연만 자세히 잘 살펴도 그분은 너무나 광대하시어서 공의를 절대 굽히지 않으며 모든 선한 것을 넘치도록 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인간끼리 얼마든지 사이좋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그분의 영광을 썩어질 피조물의 우상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를 낳아준 친아버지를 쫓아내고 짐승을 모셔 와서 심지어 큰 바위나 나무를 친아버지라고 섬긴 것입니다. 그것도 평생토록 친부를 찾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새로 모신 계부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며 절했습니다. 친부라면 당장 그 자식을 잡아서 주리를 틀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은 그 천하의 패륜아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두고 공의롭지 못하다고 인간이 감히 대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이성이 최고로 깨이고 우주를 탐험하는 최고 첨단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그런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섬기는 대상만 재물로 바꾸었고 거기다 친부를 얼마든지 거역할 수 있다는 진화론이라는 방어무기까지 철저하게 갖추었습니다. 이번 중동전쟁에 대해서도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질만한 입장이 전혀 아닙니다. 하마스나 이스라엘이나 어쨌든 한 분 하나님이 만드신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서로 돕고 사이좋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도 복수심에 불타서 서로 상대를 지구상에서 멸절시키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피 흘리는 데에 빠른 발을 가진 인간 죄악의 전형적인 예일 뿐입니다.
자연 재앙도 은혜다.
그렇다고 인간이 바다, 바람, 천둥, 심지어 큰 나무나 바위 등이 인생살이를 주관하면서 자기들을 보호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으로 모실 정도의 바보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자연에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공할 힘이 있고 가끔 인명 희생이 크게 생기니까 신으로 삼아 섬긴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학자들 중심으로 자연 재앙이 너무 무서워서 섬길 수밖에 없게 만든 원인 제공을 하나님이 했으므로 인간에겐 잘못이 없다고 떳떳하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조금만 깊이 따져보면 자연 재앙 안에도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이 풍성히 숨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예로 홍수로 인명 피해가 있긴 하지만 그런 범람으로 땅이 기름져지고 작물의 수확이 많이 늘어납니다. 세속 역사도 세계 4대 문명은 전부 큰 강의 유역에서 발생했다고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족장들이 기근이 날 때마다 애굽으로 넘어가 생명을 건졌는데, 나일강이 홍수로 범람해서 생긴 비옥한 삼각주가 로마 시대까지 세계의 식량 창고 역할을 했습니다. 성경을 공리주의(公理主義)적으로 접근해선 안 되지만, 어쨌든 홍수 피해와 비교가 안 되는 하나님의 큰 은총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했던 천둥 번개도 식물의 성장을 돕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임이 밝혀졌습니다. 식물의 광합성 활동에 필수적인 질소는 공기 중에 가장 많은데, 식물 뿌리가 쉽게 흡수하도록 번개를 타고 땅속으로 단번에 엄청난 양이 유입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번개가 인류를 먹여 살리는 셈이며 그에 반해서 번개로 인한 인명 피해는 무시해도 될 정도의 극소수입니다.
친구들과 논쟁 결론이 나지 않자 직접 하나님이 나서서 욥에게 자연계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중에 놀랍게도 그런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며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욥38:25-27) 쉽게 바꾸면 하나님은 “제발 좀 생각해 보라! 사람이 없는 곳에 폭우와 번개를 내려서 인명 피해가 없게 했고 대신에 황야를 초록의 옥으로 바꿨으니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폭우가 내리고 천둥이 치고 난 다음에는 상큼한 냄새가 나는데 공기 중의 먼지가 씻겨 나가서 대기가 깨끗해졌고 또 질소가 공기 중에 남은 흔적 때문입니다. 생생한 활력을 되찾은 식물의 초록빛을 보는 인간의 기분도 상쾌해집니다. 거기다 폭우가 내릴수록 너무나 신비한 무지개가 떠서 홍수에 대한 염려는 없어지는 대신에 밝은 미래에 대한 기쁨과 소망은 물론이고, 그 무지개같이 아름다울 천국의 환상마저 생기게 해줍니다. 하나님이 노아 홍수 심판 이후로 자연은 변함없이 그대로 두어서 인간에게 풍성한 은혜를 제공해 주겠다는 약속의 보증이 무지개입니다.(창8:22)
큰 강 유역에 최초로 발생한 문명이 증명하듯이 자연재해는 인간으로 치산치수에 더 힘쓰게 만듭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 얻은 풍요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만 더 많이 차지하려고 주변 약소국을 침략했습니다. 같은 종족이라도 마음이 맞는 일부 지배층끼리만 풍요를 독점하고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인류 역사 전체로 따지면 자연재해로 죽은 자에 비해서 인간끼리 살육한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많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목적 중의 하나도 그 곡창지대를 뺏으려는 탐욕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풍성한 자연을 공평하게 나눠 유토피아를 건설하라고 인간에게 당신을 대신해 자연을 다스릴 수 있는 청지기 직분을 맡겼습니다. 오직 자연법칙에만 따라야 하는 동식물과는 차원이 다른 영적 존재로 만들어서 당신과 교통할 수 있게끔, 쉽게 말해 자연만 보아도 창조주의 공의로운 성품과 권능을 깨달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지금까지도 그분 뜻대로 더불어 사는 세상은 싫고 혼자 독차지하려고 서로 아귀다툼함으로써 이 땅을 디스토피아로 망쳐버린 것입니다.
억울하지 않은 욥의 자녀들
그리고 욥의 아들들에게도 사실은 죄가 있었다고 성경은 서두에서 그 언질을 줍니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생일에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누이 세 명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더라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4,5)
자식들이 생일 잔치를 마치면 그들의 죄를 사하는 번제를 아비 욥이 대신 드렸다고 합니다. 형제들끼리 생일을 축하하려고 모여서 술 마시며 즐겁게 지내는 일이 절대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로 형제를 욕한 것이 살인죄와 같으며, 마음에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5:21-32) 욥의 자녀들이 술이 과해져서 말로 형제를 욕했을 수 있으며 마음으로 특정 여인에 대해 음욕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욥은 그 성격과 기질을 잘 알기에 자식들이 하나님께 이런저런 모양으로 죄를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번제를 대신 드린 것입니다.
인간도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이라 그 안에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보여서 알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우선 인간만 당신을 알 수 있는 영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한 분일 뿐 아니라, 인간도 당신을 닮아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일의 본질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종은 십계명에서 인간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여섯 계명은 천성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효도해야 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는 하지 말아야 하며 이웃의 소유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이 진리를 모르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으며 만약 그렇다면 짐승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런 양심을 영혼 속에 심어주었음에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평생을 두고 불효자라고 가슴을 치며, 사촌이 논을 사면 축하는 제쳐두고 질투부터 하기 바쁩니다.
욥의 자녀는 풍요로운 잔치를 즐기다 죽었지만, 들에서 열심히 주인이 시킨 일을 하다 죽어서 더 억울해 보이는 종들 또한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4)고 선포했듯이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뿐입니다.(겔18:30) 욥의 자식이나 종들이 그 아빠와 주인인 욥 때문에 무고하게 희생당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당대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에겐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 죄라고 인정해 놓고 자기는 그분을 의심 원망하는 마음을 끝끝내 버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만은 하나님께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욥이 이럴진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는 본문대로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 큰 비극만 생기면 하나님의 공의를 따지려 드는 마음도 욥처럼 자신들의 잘못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부터 탓하는, 즉 그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원초적인 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언제든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심판하고 지구마저 폭발시켜도 그분의 공의에 시비를 걸 수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부끄러운 점 하나도 없다고 고개를 쳐드는 자야말로, 실제로 그랬던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고백한 대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욥기는 그래서 의인의 이유 없는 고난만이 그 주제가 아닙니다. 나중에 따로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곳곳에 보석 같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주도적으로 역사하여서 욥의 심령에 깊이 숨겨져 있던 자기만 높이려는 원죄까지 끄집어내어서 진정으로 회심토록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죄인에게 성령이 먼저 간섭하여서 십자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게 해서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서두에 사탄과 하나님의 뜬금없는 내기로 욥과 주변 사람들이 억울한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기록되었어도, 그것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완악한 로마 빌라도 총독, 이두메인 헤롯왕, 유대의 바리새인과 제사장들, 유다 백성들까지 각자 자기 의지 대로 행하도록, 즉 사탄의 조종과 농간에 놀아나도록 허락하고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완성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바와 갈대아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죄악은 물론 자연 재앙까지 허용하고도 욥의 구원을 완성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기 의지로 행동했던 일과 하나님의 광대하신 뜻과 계획 사이에는 전혀 모순과 상충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공의 또한 절대 굽지 않습니다. 젊은 옐리후가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욥37:23)고 욥에게 자기 변론을 마무리한 대로 말입니다.
머쓱해진 아브라함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그 타당성을 따진 대표적인 성경 인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전에 그곳에 조카 롯을 둔 아브라함을 생각해서 천사들을 보내어 미리 통보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언뜻 생각하기를 그곳에 의인들도 꽤 있는데 몽땅 심판하면 하나님의 공의가 굽어지고 억울한 죽음을 겪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의 비극적 참상을 바라보는 신자들의 의심 불만과 똑같은 맥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호기롭게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심판을 취소해달라고 간구했고 하나님도 흔쾌히 그러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타락이 극에 달한 곳이라 오십 명은 너무 크게 잡은 것 같아 자꾸 숫자를 낮춰나갑니다. 결국 처음의 당당했던 기세는 완전히 사라지고 롯의 가족만이라도 살리려고 아주 머쓱하게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마저 승낙했는데 심판이 취소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의인이 열 명도 없었습니다. 그 후의 모든 되어져 가는 과정을 보면 롯과 그 두 딸도 구원받기에 합당한 의인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나중에 의인 한 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렘5:1) 본문이 바로 예레미야의 이 예언과 연결된 말씀을 인용했는데, 당시 유일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랐기에 도덕적으로 가장 의로웠던 이스라엘 중에도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고 따졌던 하박국이 있습니다. 그 의미가 조금 다르고 중요하므로 나중에 따로 자세히 살펴보겠으나,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대로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말할 수 없으며, 오히려 죄악만 범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어떤 냉혹한 벌을 내려도 인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진리를 정확히 아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지난주 11/15일에 미국의 수도이자 세계의 정치 중심지인 워싱턴에서 약자인 하마스 지지자 측에서 중동전쟁을 반대하며 당장 종전하라는 시위를 했습니다. 미국 민주당 당사 앞에서의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폭력으로 번지고 부상자도 나왔습니다. 폭력을 반대하는 시위에서조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에 베푼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공의를 인간이 망쳐서 지구온난화라는 재앙이 일어났는데도 하나님이 손 놓고 있다면서 그분의 공의가 실종되었다고 뻔뻔하게 의심 불평하는 것입니다.
욥만 해도 첫째 환난을 겪고서 둘째 환난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신학적으로 일부 옳아도 욥의 상황에 비추면 완전히 틀린 의견이지만, 어쨌든 친구들이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운 분이라고 계속 강조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젊은 엘리후까지 나서서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대해 잘 생각해 보라고 권했으나 욥은 귀를 막았습니다. 끝까지 자기는 무죄하니까 이런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우겼는데, 거꾸로 뒤집으면 하나님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고 하나님을 야단친 꼴입니다. 현 세태를 보고 하나님의 공의에 시비를 거는 신자들의 잘못이 그와 똑같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연 이치에 관한 질문들을 받고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모든 인간에게 아무 차별 없이 넘치도록 은총을 베푼 하나님에게 공의를 따질 자격이 전혀 없음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따진 자신이야말로 바울의 고백대로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생전 처음으로 깨닫고는 아브라함처럼 머쓱해져서 완전히 꽁지를 내린 것입니다.
죄악만 저지른 인류
성경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거역하거나, 그분의 능력이나 뜻을 악용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 들었던 기록밖에 없습니다. 그에 반해 하나님은 계속해서 참고 또 참아주셨고 그들이 깨닫고 회개할 기회도 충분히 베풀었습니다. 인간은 당신과 원수 되어서 악만 행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자기만 높이려는 우상 숭배의 죄에서 돌이키라고 그러지 않으면 심판하겠다는 구체적인 경고를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얼마나 많이 보냈습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매번 귀를 막고선 거꾸로 그들을 핍박 살해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2:4,5) 인간의 이런 상태는 지금 중동전쟁에서도 똑같이 드러납니다. 비유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지려 들어도 사실은 누워서 하늘로 침을 뱉는 꼴입니다. 인간이 범한 잘못의 열매는 인간에게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데 현재의 인간 사회 비극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불신자들도 인정하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영악하게, 사실은 욥기 서론이 논증하듯이 사탄의 거짓된 지혜에 놀아나는 것이지만,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뒤로는 온갖 죄를 저지릅니다. 반전데모라는 아주 의로운 행위에서도 폭행이 따르듯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 바친다고 맹세했다면 부모를 부양할 돈까지 성전에 바쳐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예물을 제단에 바치는 중이라도 형제와 불화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돌아가서 화목한 후에 다시 예물을 드리라고 했으며, 심지어 그런 맹세는 악이라고 정죄했습니다.
형제와 불화하는 것과 부모를 부양하지 않는 것 중에 윤리적으로 따져도 더 중한 죄는 당연히 후자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최고의 의인이라고 세상에서 칭찬받는 자들이 그런 죄를 지어도 된다고 종교로 경건하게 치장하여서 사람을 속였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렇게 받은 예물로 치부하여서 풍요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으로부터 유일하게 저주를 받았습니다. 많이 배워서 지도층에 오른 자들의 교묘하고 음흉한 죄악이 훨씬 더 엄청난 폐해를 낳으며 이 세상을 완전히 망쳐버렸다는 사실은 인류 역사가 증명합니다. 이런 판국에 하나님의 공의가 굽었다고 불평할 자격이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당장 멸망하지 않고, 당장 주님 재림하지 않은 것만 해도 인류에겐 너무나 큰 요행(lucky)입니다.
무너진 현대 물리학
마침 지난 금요일(11/24)에 아주 흥미로운 뉴스가 전해졌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초고에너지 ‘우주선(宇宙線)’이 두 번째로 포착됐다고 말합니다. 아주 적은 양으로도 전 지구를 파괴할 만한 그 엄청난 에너지 수준과 그 출처에 관해 현대 물리학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기에 시쳇말로 완전히 ‘집단 멘붕’에 빠졌다고 합니다. 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갖 이상한 아이디어를 상상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물리학 체계를 새로 뜯어고칠 필요가 생겼고, 이론적으로 현대 물리학 법칙으로 풀어나가는 진화론의 기초부터 완전히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인류는 여전히 욥에게 던진 하나님의 질문에도 전혀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저도 과학자들처럼 순전히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지만, 그것이 혹시 예수님이 다시 오시려는 신호인가 아니면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징조인가, 또 그렇다면 참 좋기도 하지만 큰일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습니다.
이런데도 스스로 지혜롭다고 자부하는 과학자들은 선사시대에 공룡, 빙하기, 운석 등으로 지금의 지구온난화보다 더 심한 재앙을 겪었으나, 지구와 자연이 자체적으로 정화해서 더 선하게 진화해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실존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즉 하나님이 전혀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들이야 인간마저도 물질에서 우연히 시작해서 물질로 끝난다고 자인하니까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문제는 신자들인데 그들의 주장에 혹해서 옛날에도 그런 엄청난 재앙을 허락한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의심합니다. 그런 이론의 진실 여부를 따지기 전에 광대하셔서 공의가 절대 굽지 않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처럼 자기는 하나님보다 똑똑하다고 큰소리치는 죄를 지금 신자들이 범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중에 욥보다 의로운 자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는 세상에서 최고로 의롭다고 칭찬받아도 정작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설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 야곱, 요셉, 모세, 다윗, 베드로, 바울 등등 모두가 인간 사회 윤리와 관습으로 따지면 사형에 처할 죄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온갖 고난을 겪게 했으나 아무도 그분의 공의를 물고 시비를 건 자는 없었습니다.
정말로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죽어 마땅한 철두철미 죄인이라고 절감하고 오직 그분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에 시비 걸어서도 안 되며 또 걸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껏 생존하게 해주고 또 지구를 당장 멸망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조건은 완전하고 충분합니다. 믿음이란 그분의 공의는 인간의 온갖 죄악 속에도 당신만의 완벽한 섭리로 절대로 굽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환난 가운데 더 의롭게 실현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분께 범사에 감사와 경배를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자존하시는 거룩하신 분으로 완전무결하게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본성을 지녔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본성을 위반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기에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특별히 인간은 더더욱 그분에게 의존해야만 그분의 신묘하고 온전한 공의를 찾아서 누릴 수 있습니다.
작금 순전한 믿음으로 그분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공의를 따지는 신자는 어리석다 못해 그 믿음부터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서도 아브라함과 욥처럼 정말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공의를 따져나가면 전적으로 인간의 죄악 때문임을 깨닫고 머쓱하게 꼬리를 내릴 수 있어야 참믿음이라는 뜻입니다.
(11/2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