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장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ㅡ> 13절에서 모세가 자신의 얼굴에 수건을 쓴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않고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빛에만 신경을 썼던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라 이해를 합니다.
그럼 14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수건은 모세가 쓴 수건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이 쓴 수건으로 이해됩니다.
모세가 수건을 쓴 동기(말씀에 집중)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수건의 의미(말씀이 가리워 짐)가
다른 것처럼 이해가 됩니다.
구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13절의 모세의 수건과 14절의 수건(이스라엘 백성들이 쓴 수건)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이미 구원님도 알고 계시듯 모세의 수건은 모세 얼굴의 광채로 인해 말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쓴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쓴 수건은 링크의 목사님 말씀중 그부분만 콕 집어 인용하면
'유대인들의 잘못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적용하지 않은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성경을 읽을 때 얼굴을 가린 수건이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하고 그 앞에 개인적으로 심령이 깨어지고 또 깨어져서 그 말씀에 자기 목숨까지 걸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민이 되어 있기에 남은 것은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입니다.
3장
14. But their minds were blinded: for until this day remaineth the same vail untaken away in the reading of the old testament; which [vail] is done away in Christ.
ㅡ> 그 수건이 유대인들에게 씌워진 수건이 아니라
모세가 쓴 수건이 아닌지요?
유대인들이 당시에 모세가 쓴 수건에 대해 가지고 있던
선입관(모세의 얼굴 빛)을 아직도 구약을 읽을때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닌지요?
아직도 유대인들은 모세(율법)에 대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기에 예수님(복음)을 배척하고 있는 게 아닌지요,
유대인들의 수건이 아니라 모세의 수건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수건에 대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모세의 수건과 유대인들의 수건으로는
이해가 쉽게 되지 않습니다.
두 너울은 모두 두려움을 뜻합니다. 창조주의 영광은 타락한 피조물에게는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바울이 바로 앞 절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직분이고 정죄를 선고하는 직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의 직분이며 의의 직분인 그리스도께서 더 크고 빛나는 영광으로 오셨습니다. 영원한 빛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은 스러져가는 모세 얼굴의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그 빛과 영광은 피조물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자유를 줍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시면서, 또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진리를 외면하고 거부했습니다. 두려움의 너울을 벗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경건이고 거룩인 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땅히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나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으로 둔 채 너울 뒤에 숨거나 가리는 것으로는 결코 창조주와 피조물의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 화해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샬롬!
"따라서 자기 얼굴의 광채를 가려서 백성들의 두려움을 완전히 없애주려는 뜻도 있었지만, 더 중요하게는 백성들이 자기가 전한 율법에는 주목하지 않고 자꾸 그 광채에만 주목할 것을 염려해서 수건을 가린 것입니다. 모세로선 백성들이 율법을 정확히 배워서 삶에서 온전히 실천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건을 바울이 인용하면서 “장차 없어질 결국”을 보지 못하게 수건을 가렸다고 해석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을 때만 광채가 생겼으니 바울이 말하는 장차 없어질 것은 율법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특별히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정결법과 제사법을 상징합니다.(히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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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답변 글 중에서 상기 부분 다시 잘 읽어 보십시오. 구원님 누차 권면드린 대로 주석이 붙은 성경을 구입해 참조하시면 난해해 보이는 구절에 대한 설명이 다 나와있습니다. 만약 그 성경이 어렵다면, "현대인의 성경" "우리말성경" "쉬운 성경" 중에 하나를 구입해서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모세가 과연 장차 없어질 결국(대상)이
율법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바울이 모세의 마음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표현했을까요?
복음시대에
수건은 복음과의 단절(막힘, 오해)을 상징하고
그래서 마치 휘장이 갈라지듯 수건이 벗겨져서
율법을 지킴으로가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고
또 많은 지도자들이 그렇게 이해하게 하고
저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모세는 단지 자신의 얼굴의 광채를 가리기 위해
혹 자신의 얼굴의 광채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해서 수건을 가렸지 않나요?
장차 없어질 결국(율법)을 위해
수건을 가렸을까요?
그래서 저는
수건의 비유가 이해가 안됩니다.
모세가 실제로 쓴 수건(율법,말씀 집중)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징적으로 쓴 수건(말씀,복음 오해)이
각각 수건의 의미가 다른데
바울이 굳이 수건을 비교해서 고린도 교인둘에게
편지로 권면을 했는지,
그렇다면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뜻을 과연 바르게 이해를 했을까요?
바울은 모세처럼(백성들이 말씀에 집중케 하고자)
수건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수건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한 이유가
굳이 수건을 쓰지 않아도
백성들이 말씀에 집중케 할 수 있기 때문인가요
그런데 이제 오히려 백성들의 수건을 벗어라고
권면합니다.
모세의 수건은 말씀 집중의 의미로
백성들의 수건은 말씀 오해로?
아직도 이해가 안됩니다
제가 너무 꽉 막혀서 그런가요?
구원님 저하고 게시판에서 질의 응답한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성경을 해석하는 원리에 대해서 말씀드렸으며, 가능한 주석이 붙은 성경과 성경해석학 책을 꼭 구입해서 스스로 공부해보라고 권면드렸습니다. 상기 구절도 주석이 붙은 성경에는 자세히 설명이 나와 있기에 그런 성경이 있었다면 저한테 굳이 묻지 않아도 되며 제 답변도 그 주석을 조금 더 풀이한 정도입니다.
그리고 형제님 스스로 솔직히 말씀하신 대로 꽉 막힌 점도 있고 죄송하지만 문해력이 조금 떨어지는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순수성이나 진실성을 논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형제님의 기질과 성격에 그런 면이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해서 '수건'의 비유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해석법에 대한 지식이 모자라고 특별히 비유를 해석하는 원리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비유 해석에 대해서도 게시판 답변들과 제 글을 통해서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비유 자체를 붙들고 문구나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집착해선 안 된다고 말입니다. 비유는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보완해서 알기 쉽게 해주는 역할로 그치며 그것도 본문의 주제와 연결되는 뜻 한두 개만 설명해주는 용도입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매번 들었던 예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속담에서 낫이라는 비유는 기억 자의 모양을 알기 쉽게 연상시키는 역할로 그치지, 낫이 무슨 재질로 만들었고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까지 해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기억 자의 모양이라는 주제만 보완 설명한 것으로 그치는데 성경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상기 수건의 비유도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비추어봐야 하는데 그 주제는 반드시 앞뒤 문맥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문 앞에선 율법(돌판에 새긴 구 언약)이 은혜(심비에 새겨진 새 언약)로 대체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3:1-12)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으며 구약성경을 읽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3:15-18)
그리고 유대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 갖는 그 완악한 마음을 바울은 모세의 수건 사건에 비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가린 것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바울의 해석이지 모세가 그 당시에 품은 의도가 아님) 모세 당시로서는 장차이지만 바울 때는 그 장차가 이미 이르렀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이미 없어졌는데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서 구약성경을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럼 없어진 것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구 언약입니다.
모세로선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에 가르칠 때만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율법의 가르침은 듣지 않고 얼굴의 광채 즉,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에만 집중할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게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백성들이 광채만 주목하는 이유도 자기들은 이미 하나님의 택한 족속에 율법까지 받았으니 구원은 염려할 것 없고 하나님이 큰 복을 부어주리라는 기대만 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이미 없어졌다고 말하는 구 언약은 이스라엘이 모든 족속들의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즉, 다른 민족들에게도 여호와를 알게 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출19:1-6) 또 하나님은 그런 언약 백성으로 즉, 다른 이들 앞에 여호와를 아는 백성으로 그분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출20장 이하) 그런데도 구약 백성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다른 민족들은 무시 배척 저주하면서 율법도 형식적으로만 지켰습니다. 모세의 돌비에 새긴 구 언약은 실패했으며 하나님은 그래서 예레미야와 마음에 새기는 새 언약을 맺었습니다.(렘31:31-34)
그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31:34)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뜻합니다. 신약시대 유대인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을 두고 바울은 수건(모세의)으로 가려졌다고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모세가 수건을 덮었을 때는 모세도 백성들도 앞으로 율법의 정신은 살아있어도 제사법 정결법 같은 죄 사함의 계명들이 종결되고 또 얼마 전에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이 무효화 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때는 모세와 그 후계자가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저작했으니 구약성경도 저작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완비된 구약성경과 또 이스라엘의 구약 역사에 대해 능통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였고 그에 따라 인류 전체의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왔는지 깨달았습니다. 아담의 타락 때에 약속하신 원시복음을 실현해 나가는 구원이 역사의 초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뀐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경륜과 의미를 로마서를 필두로 13개의 서신서를 통해서 자세히 설파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유대인들이 율법이 복음으로 대체된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서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생각이 마치 모세가 수건으로 광채를 가려야만 했던 이유와 같더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에 주목하게끔 수건으로 가렸는데, 그렇게 한 원인은 백성들이 자기들은 선민이라서 죄에서 구원받을 필요는 없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어 주시는 현실적 축복만 기대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 시대에 그리스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생각이 모세 당시의 백성들의 마음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구약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인류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구속사적 차원에선 모세 수건의 의미가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된다고 비유(설명)한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이 특유의 선민의식으로 헛된 교만에 젖어 있고 현실적 축복만 바라는 완악한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모세 같은 선지자가 와서 이스라엘 나라 전체를 애굽에서 탈출시키듯이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기만 바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가리고 있는 (모세의) 수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그런 수건에 가려진 마음에는 변함이 없기에 예수님을 아예 배척 적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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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에 여기까지 질의와 답변이 지속되었으니까 구원님에게 진심으로 세 가지만 감히 그리고 꼭 권면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개혁주의스터디 바이블”(부흥과 개혁사 발간)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성경을 책별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성서유니온 발간)를 구해서 참조하십시오. 만약 이 책들을 구입하려니 부담이 되거나 일차 내용을 보고 자습하기 힘들겠다 싶으면 “현대인의 성경”이나 “쉬운 성경”으로 바꾸시는 것도 좋습니다.
둘째: 현재 출석해서 섬기는 교회(교단)가 어딘지 몰라도 기본교리나 성경 공부 모임에 성실히 참석하십시오. 교회 안에 성경에 능통한 신앙 선배나 사역자를 정해서 언제든 의문이 있을 때마다 물어볼 수 있는 관계를 맺으십시오. 저와 인터넷상으로 글로서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훨씬 의사소통이 잘 되어서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순전히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는 것인데 형제님이 사소한 주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바람에 전체적 종합적 합리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일상적 삶에서도 혹시라도 그런 성향으로 인해서 고립되거나 타인과 멀어지거나 사회생활에서 불편이나 손해를 보지 않는지 염려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그렇다면 전문가와 한 번 상의해보시기 바랍니다. 진단이라도 한 번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샬롬!
귀찮을 정도의 질문에 진심으로 답변을 주신
목사님과 여러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도 이번에 고린도후서 3장의 수건을 대하면서
이렇게 까지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리라 생각치
않았습니다.
성경 몇 구절을 두고
며칠을 두고 고민하거나 궁금해 한 적이 처음입니다.
저 자신도 왜 이렇게 까지 궁금해 하나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해하면 되지라고 애써
넘기려고 하면서도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동안 저의 질문에 답변을 하시면서
염려 아닌 염려를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강박적인 면도 다소 읽혀질 수 있으리라
이해됩니다.
염려하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권면의 내용을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구원님 안녕하세요.
관련하여 잘 정리된 게시물 링크합니다.
출#64 34:33-35(고후3:12-18) 수건을 덮고 성경을 읽는 신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