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욘1:1~5)
나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사람이 신앙의 방황을 겪게되면 삶의 혼란도 같이 따라 옵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저도 신앙의 혼란을 겪었는데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에서 한 동안 헤어 나오지 못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요나도 나름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인데 그런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고 있는 자신이 너무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아무 의욕이 없고 다만 죽기를 바랄 뿐 이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엄청난 폭풍우가 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모든 사람이 죽을까 봐 벌벌 떨고 있는 그 순간에도 될 때로 되라는 식으로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더구나 4장을 보면 요나는 감정의 기복이 아주 심한 사람입니다. 말만 하면 하나님에게 죽는 게 났다고 반항하고 있습니다. ‘죽고 싶은 사람의 대부분은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다.’라고 생각해도 무방하겠지요. 요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기를 바라고 그 엄청난 폭풍우 바다 속에서도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가 사공들에게 자신을 바다에 던져 파도를 잠잠케 하라고 한 것은 참된 회개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내가 죽으면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 때문에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앙이 원인이 되어 우울증이 걸렸으면 이러한 우울증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신앙의 회복 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우울증은 없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면 세상 속에서의 삶의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저의 경험으로는 그러했습니다. 요나도 신앙의 회복이 이어지자 자연스럽게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말씀을 거역하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우울증을 앓는 것보다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데 동행하는 삶이 더욱 아름다운 삶이리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주변에서는 그가 신앙으로 회복될 때까지 끝까지 그를 믿고 사랑 해 주고 기도 해 주는 마음들이 필요하겠지요
하나님,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온전한 관계가 될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의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묵상 글을 짧게 쓰다 보니 님께서 말씀하신 대전제 부분(전체적인 맥락)을 생략하고 올린 것 같습니다.
당연히 님께서 말씀 해 주신 부분은 맞는 말씀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다양성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희 목사님께서 미국의 어느 신학교에서 박사과정 강의를 들으셨는데 교수님께서 한 본문을 두고 분임토의를 하면서 50개의 핵석을 가져오라고 하셨고 그렇게해서 50개의 해석을 가져 갔더니 이번에는 500개의 해석을 가져 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게 되더라면서 저에게 말씀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요나의 갈등을 보았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이제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엇는데 이번 말씀을 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가 죽기보다 싫고,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또는 자기는 하나님의 어떤 명령에도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 너무나도 괴로웠을 것이고 오랜 고민과 번민 속에서 자괴감에 빠지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 속에서 요즈음으로 말하면 우울증 비슷한 증상으로 나타나고 삶을 포기하기까지 이르지 않았나 묵상 해 보았습니다.
다양성에 대해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묵상하다 보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기존의 목사님에게 듣지 못한 다양한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다시말하면 표준적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준적인 생각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모두가 이단적인 생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한 본문을 두고 500가지의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표준적인 말씀의 해석 안에서도 충분히, 얼마든지 충분히 말씀의 은혜를 누릴 수 있고 기쁨으로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육이 1+1=2라는 수동적인 교육하에 모든 국민이 배워오다보니 획일적인 사고 방식이 너무나도 깊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에도 침투하여 획일적인 사고 방식이 아닌 모든 곁가지는 다 잘라 버린다는 것이죠
저도 이제까지 예장 합동측에서 자랐고 지금은 고신측에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저의 글이 보수적인지 아닌지 늘 자가 검열을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가급적 기존 목사님과는 다른 관점으로 묵상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종종 엉뚱한 묵상(?)도 합니다.
혹시 저의 글이 보수적 관점에서 벗어난 글이 있다면 말씀 해 주십시요.
횡설수설 너무 말이 길었내요
평안한 한 주 되세요.
샬롬~~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요나의 반항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을 철저히 구별하면서 그것이 거룩이라고 여겼습니다. 더구나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원수였습니다. 요나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긴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보내고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둥 마는 둥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마지막까지 니느웨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며 니느웨의 멸망을 지켜보려고까지 하지 않습니까.
성경에 의문을 갖고 깊이 묵상하는 태도는 아주 바람직하고 권장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대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반드시 성령의 인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가 없으면 자칫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에 빠질 염려가 있습니다. 요나는 우울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끝내 기꺼이 사명을 감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신앙의 회복이라고 쉽게 단정지으면 안됩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자칫 폐쇄적이고 배타적이 될 수 있는 모든 신자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과, 마찬가지로 모든 피조물은 예외없이 그 분의 긍휼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교회라는 건물에 갇혀, 교리와 전례를 앞세우며,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종교놀음에 빠져 있는 신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경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