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2:29-36) 슈퍼 파워 미국이 하나님의 공의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5)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29-36)
억울하게 당하는 의인
성경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공의로우며 세상이 불의하게 흘러가는 까닭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서 자발적으로 당신의 뜻을 따르며 거룩하게 살기를 바랐으나, 오히려 거꾸로 사탄의 종이 되어서 돈만 추구하다가 온갖 죄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으로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이미 허용했기에 인간 세상의 재앙과 비극을 미리 막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은 당신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을 그 상실한 마음에 버려둠으로써 그 죄악으로 인한 폐해를 스스로 덮어쓰게 하십니다. 문제는 그런 자들이 만들어 낸 폐해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좋아하는 의인이 아무 이유 없이 함께 고난을 겪어야 하고 그 피해 보상을 전혀 받지 못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하나님이 그런 악인을 방치만 하지 않고 이 땅에서부터 직접 벌을 주고 또 의인의 억울한 사정도 다 갚아 주신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악인이 죄를 범할 때마다 일일이 벌을 주지는 않고 그들도 회개하고 당신께 돌아올 여유와 기회는 주십니다. 의인으로선 하나님이 당신만의 방식과 때에 따라 그들을 처벌할 때까지는 억울해도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어서 빨리 이 고통을 끝내달라고 기도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의인의 그런 기다림이 절대 무의미하지 않은데, 악인이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의인을 위해 모든 차원에서 완벽하게 복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복수의 방식, 세기, 규모가 의인이 기대하는 아니 상상하는 범위조차 초월합니다. 의인의 기분을 풀어주느라 수백 배로 앙갚음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복수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더 높아지는 방식입니다. 악인 중에도 진심으로 회개하며 당신께 엎드리는 자가 나오며, 의인은 현실적 보상을 떠나 당신과 더 깊고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의인을 위해서 가장 통쾌하게 복수해 주신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사건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둘 사항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따져서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의인이고, 애굽 사람 전부가 악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히브리인의 지도자 모세는 살인자였고, 애굽에도 나일강에서 어린 모세를 건져서 자기 아들로 키운 바로의 공주가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따지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바로 쳐들 수 있는 의인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한 개인의 영원한 구원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택하심의 은혜에 달렸습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로, 더 정확히 말해서 일방적인 가해자와 억울한 피해자 둘로 확연히 나뉘기에 악인과 의인의 대표입니다.
애굽은 요셉의 지혜로운 방책에 따라서 7년간에 걸친 대기근에서 구출 받았습니다. 그러다 요셉을 모르는 새 세대의 바로가 등장해 자기들의 은인을 노예로 삼아 수백 년 동안 대규모 건축 토목 공사에 동원하며 학대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억울하게도 그 오랜 기간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 강국인 애굽에서 탈출할 방도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탈출에 성공해도 이미 2백만 명이나 된 그들이 정착할 땅도 마땅히 없었습니다. 완전히 사방이 막힌 절망 가운데서 매일매일 죽지 못해 겨우 연명하는 상태였습니다.
애굽에게 복수하신 하나님
그들이 여호와께 이 억울한 환난에서 구출해 주고 저 악인들에게 형벌을 내려 달라고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선조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사백 년간 섬긴다고 예언하신(창15:13) 내용을 알고 있었어도 제발 그 기간을 줄여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애굽이 요셉을 금방 잊었듯이 아브라함의 후손도 그 예언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식들마저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생 노예로 고생해야 할 운명이니까 더더욱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되어 110세에 죽었으니까 그 80년을 빼도 300년이 넘도록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고통당한 시간은 36년으로 자기 세대 안에 해방을 맛본 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당한 억울함은 한국의 열 배 정도였고 자손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그렇게 오랫동안 애굽의 노예가 되도록 허락하신 뜻은 그 긴 인고의 고통을 충분히 상쇄하고 남을 만큼 거룩하고 광대했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 가족의 숫자는 겨우 70여 명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갈대아 우르에서 이민 온 타 인종의 한 가족이 가나안에서 대대로 번창하기는 불가능합니다. 현지인과 결혼해서 동화되거나 강도떼에 죽임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이 비록 노예가 되었어도 애굽으로선 노역에 동원해야 하므로 숙식을 보장해야 하고, 이스라엘도 매일 반복되는 육체노동으로 자연히 강건해집니다. 수백 년간 다른 종족과 전쟁 치를 염려라고는 없어서 그 숫자가 계속 창성해질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나중에 애굽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고 바로가 걱정했습니다. 타민족의 노예가 되는 것은 인간이 꿈도 꾸지 못할 계획이고, 만에 하나 생각해 내었어도 사백 년 장기 계획은 절대 세우지 않습니다. 당신을 주인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우려는 하나님만이 계획 시행할 수 있는 묘책이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오래전에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도 한 치의 차질 없이 실현했습니다. 이스라엘로선 무려 300년이 지나서야 기도의 응답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애굽을 철저하게 응징하여 의인 이스라엘의 억울함도 완벽하게 풀어주었습니다.
흔히들 애굽에게만 열 번의 엄청난 재앙을 내리고 마지막에는 그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켰기에 이스라엘만 편애하는 불공평하고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비난합니다. 그 비평이야말로 아주 불공평한데 4백 년간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 먹은 애굽의 잔인함에는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비롯되었기에 일고(一考)할 가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심판을 빼고는 9번의 기적적 재앙들이 엄청난 규모이긴 했어도 애굽에게 인명 피해를 준 적이 없습니다. 아홉 번 재앙으로 심판받는 주역이 전부 애굽이 믿던 토속 신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로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대상이지, 인간이 자기들 인생을 주관하는 신으로 모시고 숭배할 존재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들더러 제발 이 땅을 실제로 통치하는 신이 누구인지 깨닫고서 우상을 버리고 참 신인 당신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배려였습니다.
바로가 짐짓 거짓으로 회개하는 척만 해도 하나님은 재앙을 끝내 주었으나 바로는 곧바로 더 완악하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도 잘못하면 세 번만 용서해 주고 네 번째는 크게 징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 인내의 한계인 세 번의 세 배인 무려 아홉 번이나 참아주었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열 번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애굽 사람에게 한 집도 빠지지 않고 장자를 죽이는 벌을 내렸는데, 이 또한 절대로 과도한 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이미 히브리인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다 죽이는 더 잔인한 참극을 자행했습니다. 장자만 죽였기에 살아남은 백성의 숫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애굽이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보다 그럴 자격이라곤 없는데도 용서받은 은혜가 훨씬 더 컸습니다.
막상 가장 먼저 심판받아야 할 악의 괴수 바로는 살려주었습니다. 대신에 장자를 죽임으로써 그 집안 전체를 멸한다는 의미를 확실히 했습니다. 당시 바로는 애굽의 살아있는 최고의 신으로 숭배받았습니다. 아홉 번이나 그들의 우상들을 파괴 심판했음에도 바로와 애굽 백성들은 여호와가 어떤 분인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능력이 자기들 신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끝까지 완악하게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로의 장자를 죽임으로써 애굽 최고의 신의 명맥을 완전히 끊어버린 것입니다.
무엇보다 억울한 노예였던 이스라엘도 이때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이스라엘도 밖에 나오면 죽음을 면치 못했는데,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집 안에 남아 있어서 죽음의 사자가 심판에서 면제해 준 것뿐입니다. 이스라엘도 평소의 죄악과, 시내 산 금송아지 배역 사건에서 보듯이 애굽의 우상숭배에 많이 오염되었던지라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애굽만 피해를 본 앞선 아홉 번의 심판과는 달리 이 열 번째 장자 심판은 이스라엘도 사실상 함께 심판받았기에 하나님이 공평한 분이라는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열이라는 완전 숫자가 의미하듯이 하나님은 인내의 한계가 찰 때까지 완전한 인자를 베푸셨고 또 마지막 열 번째 심판으로 당신의 공의를 완전히 실현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당시 이방 세계를 대표하는 최강국 애굽을 완벽하게 심판함으로써 세상의 모든 우상도 심판하며 온 세상에 당신의 공의를 실현한 셈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양의 피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면제해 준 것은 언젠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당신의 공의를 완성할 것이라는 예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처벌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스라엘의 억울함도 단번에 해소해 주었습니다. 애굽의 가축들과 금은보화를 양껏 취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애굽으로선 모든 장자와 가축의 초태생마저 졸지에 죽는 심판을 받았기에 더 이상 버티다간 남은 자들마저 죽을 것이 빤하니 이스라엘의 요구를 안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불신자들이 죽음을 눈앞에 두면 비로소 혹시 하나님께 벌 받으면 어떡하나 싶어서 회개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애굽이 세계 최강국이 되고 백성이 그런 재산을 갖게 된 까닭이 바로가 정치를 잘하고 자기들 우상 신이 도와주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살아 계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도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는 일반적인 은총을 베풀었기 때문임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이 위협을 받자 비로소 겉으로나마 고분고분해졌는데, 최소한 이스라엘 노예들 때문에 그동안 호의호식했다는 사실은 인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려 삼백 년 동안 임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자손 대대로 노동력을 애굽에게 착취당했습니다. 그 액수를 계산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될 것입니다. 애굽 전체를 다 가져도 모자랄 것입니다. 인간적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거꾸로 애굽을 이스라엘의 노예로 삼아 같은 기간 동안 부려 먹게 해주어야 시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밀린 임금 조로 가축과 금은보화만 갖고서 조용히 그 나라를 떠나도록 했습니다. 애굽으로선 그것으로 끝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이고 여호와께 백 번을 절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빼앗긴 재물이 아깝고, 무엇보다 거지 노예 떼를 이끄는 팔십 넘은 노인 한 명과 열 번을 싸워 열 번을 다 무참하게 짐으로써 자존심이 무참하게 무너진 것이 너무 분했습니다. 자식들의 장례식을 마치고 조금 정신을 차리자 곧바로 홍해까지 추격해 왔습니다. 또다시 홍해에 직접 뛰어든 군대만 수장시킨 하나님의 형벌은 여전히 그들의 죄악에 비하면 아주 약했습니다.
악한 개인도 공동체도 심판받는다.
그 당시로선 이스라엘과 애굽 두 당사자 모두 자기들이 더 억울하고 하나님의 공의도 실종되었다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식과 시기에 따라서 당신의 공의를 양쪽에 공평하고도 완벽하게 실현했습니다. 그것도 인간의 기대는 물론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차원으로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이 직접 의인을 살리고 악인을 벌주는 모습이 곳곳에 나오는데, 개인과 공동체의 대표적인 예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사악한 왕 아합은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함께 길르앗의 라못에서 시리아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시리아 왕의 복수의 표적이 된 줄 아는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자기 왕복을 대신 입히고 자신은 일반 병사 복장을 취했습니다. 시리아 군대가 처음에는 아합의 모략대로 여호사밧을 추적했으나 곧바로 아합이 아닌 줄 눈치채고 다시 아합을 쫓으려 했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시리아의 이름도 없는 군인이 쏜 화살이 우연히 아합에게, 그것도 갑옷 이음새의 틈새에 박히는 바람에 하루 종일 피 흘리는 고통 가운데 죽었습니다. (왕상22:34)
아합이 아무리 교묘한 인간적 계략을 동원했어도 하늘에서 이 땅의 모든 일은 물론 각 개인의 깊은 심령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눈길을 피할 길은 전혀 없었습니다. 시리아 졸병은 상대가 아합왕인 줄은 전혀 모르고 열심히 자기 조국을 위해서 싸운 것뿐입니다. 갑옷 이음새 사이로 아합의 급소를 겨냥해 맞힐 만한 명사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수만 명이 뒤엉켜서 적군과 아군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는 아수라판에서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당신의 권능으로 사악한 아합이라는 개인에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조준하여서 당신의 공의를 완전하게 실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의 큰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출하여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자기들만의 독립 국가를 세워주었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율법대로 살아서 모든 열방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라는 뜻이었으며 이스라엘도 그렇게 헌신하겠다고 피의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 온갖 죄를 저지르며 거꾸로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배역하다가 끝내 바벨론에게 함락당해 포로로 끌려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라는 이방 왕을 들어서 유다의 죄악을 심판하여서 당신의 공의를 실현한 것입니다. 이때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회개하도록 수백 년을 기다려 주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 잘못을 회개하며 본토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두 세대가 지나는 70년 동안 침묵하다가 고레스라는 의로운 왕을 세워서 일시에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게 해주었습니다. 노인 모세 한 명을 들어 애굽에서 이스라엘 전 백성을 구원했듯이, 이번에는 이방 왕 한 명으로 제2의 출애굽을 일으킨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은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한 죄를 물어 마대에게 멸망 당하게 했는데, 하나님은 인간 공동체에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의 공의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기어이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은 얼마 안 가 또다시 제사장 나라 소명과는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이방인을 할례 없는 족속이라고 저주하며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동족끼리도 온갖 종교적 구실을 갖다 붙이며 차별했습니다. 나아가 출애굽의 결론 격인 십자가 대속 구원으로 이 땅에 공의를 완성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마저 자기들 탐욕과 자존심을 채우려고 살인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판단 정죄하다 못해 급기야 공의로운 하나님까지 심판했습니다.
공의를 논할 자격이 없다.
현재도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격렬한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많은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마스가 분명히 먼저 잘못을 저질렀고 또 포로와 인질의 교환을 위한 휴전 조건도 위반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번 사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양쪽이 오랜 기간 자행한 복수극의 연장이며 또 그래서 온갖 비참하고 억울한 죽음이 생긴 것입니다.
미국에 버스나 식당은 물론 학교와 교회에서도 흑인은 백인과 함께 동석할 수 없게 법으로 금지한 때가 있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의 주도로 민권법과 투표법이 제정되어 인종 차별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70년 전입니다. 그 후로도 백인 경찰이 흑인 로드니 킹을 무차별로 때린 사건으로 엘에이 폭동이 1990년에 일어났습니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관 데릭 초빈에 의해 흑인 플로이드가 목이 짓눌려 사망함으로써 BLM(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이 활발해진 것이 바로 3년 전인 2020년이었습니다.
정말로 한 번 곰곰이 따져보십시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시비 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세상 악인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백성은 억울하게 당한 의인이라고 절대 항변할 수 없습니다.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며 가장 우수한 게르만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역사상 최고로 잔인했던 극우 나치 제국을 독일 교회와 교인들이 얼마나 열렬히 지지했습니까?
내년 미국 대선에서도 나치와는 결이 다르지만, 백인 우월주의를 내심 표방하는 트럼프가 남부의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적으로 진보 보수로 편을 가르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세상의 공의를 기독교 신자들 포함해서 인간이 왜곡 파괴하고 있지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시비를 걸만한 자격이 있는 신자는 물론 있습니다. 독일 나치 제국에 끝까지 항거하다 옥사했던 본 회퍼 같은 하나님이 남겨두신 당신의 참된 종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순교를 당하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전혀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공의를 세우리라 소망하며 자신이 그분의 공의로운 일에 쓰임 받고 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기꺼이 충성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억울한 핍박과 죽임을 당했으나 그들 또한 본 회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순교를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남겨둔 당신의 종더러 세상 앞에 오직 당신만 주인으로 모시는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게 함으로써 불신 세상 앞에 당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님이 어서 빨리 오시길 갈망하고 있을 때 바울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놀라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신자의 환난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살후1:4-8)
한마디로 신자가 환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는 표시이고 또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증거라고 합니다. 의인이 이 땅에서 환난을 받으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참 안식을 얻게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또 그들을 핍박하는 악인은 당신의 재림 때 영원한 형벌을 내림으로써 공의를 완성한다고 합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고난을 겪으니까 주님 재림을 앞당겨 달라고 간구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최대한 늦추어서 악인도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그동안에 신자는 극심한 고난으로 크게 괴롭더라도 하나님의 참 안식과 평강을 누리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보고 자기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해야 합니다.
최근 펜데믹 사태와,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 등으로 세계가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장기 침체가 예상됩니다. 주님 당시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했듯이 21세기 최고 문명사회에서도 일반 서민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판국까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불현듯 미국이 ‘슈퍼 파워’(Super power)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묵묵히 공의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일방적으로 편들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 미국은 너무 문제가 많으며 도덕적으로도 가장 타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부터 LGBTQ 교육을 하고, 낙태의 자유화, 여전한 인종 차별, 빈번한 총기 사고, 마약의 범람 등으로 이등 국가로 추락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런데 만약 러시아나 중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지금의 미국처럼 유일한 슈퍼 파워가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전 세계를 침공해서 제2의 공산 제국주의를 실현했을 것 아닙니까? 그나마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현재의 힘을 유지하고 있음으로써 그런 최악의 사태를 막고 있으니까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이 고안해 성취한 업적이지 하나님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그런 이성적 지혜를 심어주신 분이 하나님이며 또 그분이 인간이 자유의지대로 행하도록 허락하고서도 당신의 공의를 완벽하게 실현하신 결과입니다. 약 사천 년 전에 세계 최강국 애굽을 이용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창성하게 보존했듯이, 지금은 슈퍼 파워 미국으로 자유세계를 붙들고 있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비록 미국이 많이 타락했어도 아직은 민주적 절차를 시행하고, 인권 운동가들이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보장하려고 열심히 활동하며,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려는 비용과 노력을 가장 많이 경주하고, 세계 선교를 위해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미국을 붙들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이 예뻐서가 아니라 당신께서 지으신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미국의 신자들이 제사장 나라 소명의 실현에 등한히 하면 미국도 결국은 망하게 할 것인데 이미 조금씩 그런 조짐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우리 생각 이상으로 아주 사악한 존재입니다. 평균적으로 수입이 급감하여 다수가 생계마저 걱정할 판국이 되면 서로 양보 희생하여 다시 이전으로 회복하자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대다수가 세상을 뒤집어엎어서 똑같이 못살자고 덤빕니다. 최근 세계 각국에서 그런 집단주의 망령이 서서히 되살아나 하나님의 가장 큰 대적인 물질만 주인으로 삼는 공산 체제가 조금씩 다시 싹트고 있습니다.
신자는 과거의 역사를 하나님 중심으로 분별하여서 그분이 가르치는 교훈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 역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긴급한 사태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관한 사건과 인물이 등장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방의 지도자들도, 예컨대 바벨론 포로를 해방한 고레스왕이나 공산주의를 포기한 고르바초프 같은 인물을 세웠습니다. 대신에 개별적 비극은 인간에게, 특별히 신자들에게 공의를 세울 책임을 맡겨 두었습니다. 신자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소명에 등한히 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에서 실종되며 인류에게 소망이 없어집니다.
현재 인류가 처해 있는 상황이 너무 갑갑하고 안타까워서 하나님을 의심 원망하는 심정은 이해는 됩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세상 재앙과 인간 비극의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져보십시오. 하나님이 묵묵히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완벽하게 공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못하면 출애굽 사건부터 다시 공부해 봐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을 당장 멸망시키지 않고 주님의 재림 때까지 당신께서 붙들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12/1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