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에 대해 정확이 모른다면..
[질문]
자기가 지옥갈 수밖에 없는 철저한 죄인이기에 자력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담당해 피 흘리신 사실을 믿었고 그 후로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도 온전히 믿어 모든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신자가, 예수님이 육신적으로 부활하신 의미가 무엇이고 속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정확히 모르는 채로 죽었다면 그 구원 여부는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즉, 부활하셨다는 개념 자체는 당연히 믿지만 주님의 육신적 부활에 대해 정확하게 몰랐다고 해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옳습니까?
[답변]
먼저 집고 넘어갈 것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믿음이 좋고 성경지식에 능해도 다른 사람의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구원받은 여부조차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원리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원리의 첫째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기 주인으로 영접했다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거기다 하나님이 택하여 성령으로 간섭하시는 은혜를 주어야만 그런 영접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성령이 인간의 영에 작동한 구원을 인간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현실적으로도 어느 누구도, 심지어 부부도 서로 죽는 날이 다르니까, 어떤 이의 믿음 생활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 그런 영접이 일어났는지는 당연히 모르고 언제 일어날지 예상조차 못합니다. 신자는 그저 때를 얻든 못 얻든 사탄에 미혹된 영혼에게 십자가 복음을 순전하게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복음 전한 것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왕에 심겨진 복음의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도록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또 성도들이 함께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진정한 영적 회개가 일어났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에 대해 본인이 정확히 알아서 자신의 삶에서 온당하게 반응할 수 있어야 참된 믿음입니다. 단순히 영접 기도 시켰다고 전도자가 할 바를 다했다고 여겨서도 심지어 구원받게 했다고 섣불리 판단해선 안 됩니다.
구원이 바로 부활이다.
전도에서 가장 자주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무엇입니까? 아니 기독교 신앙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어떤 구절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구원을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은 바로 부활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요1:13) 즉, 십자가 대속 죽음을 믿는다는 의미는 죄 사함의 은혜만 아니라 부활의 새 생명을 선물로 주셨음도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구원에서 영생을 강조했다고 해서 부활을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든지 부활만 믿으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골고다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의 부활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영생 즉, 부활은 “저를 믿는 자”는 누구나 얻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선행되면 영생은 자연히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는 질문자께서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 값을 다 감당하셨기에 아무 공로 없고 죽어 마땅한 자신이 그 은혜로만 구원 얻게 되었음을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히 믿었다면 당연히 구원은 얻습니다. 그 온전한 믿음이란 또 주님의 부활은 물론 자신의 부활까지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원리이고 실제 전도에서도 그대로 이뤄집니다. 전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즉,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입니다. “천국 간다는 것”은 “예수 믿으면 부활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질문에서 혹시라도 전도에 부활을 빠트리면 어쩌나 염려했습니다. 그럼 반쪽의 전도가 됩니까? 그럼 반이라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런 염려 불안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전도할 때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라는 말을 빠트리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권면 그대로 순전히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부활은 물론 본인의 부활도 믿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고 전해야 하는 자가 어떻게 예수님 부활을 관념적으로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에 대해 확신이 안 서서 그런 언급을 빠트린다면 온전한 전도가 아닙니다. 나아가 전하는 자 본인의 믿음 아니 구원부터 의심해봐야 할 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엄밀히 말해 상기질문은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혹시 죽음이 임박한 자를 전도할 때에 시간 여유가 없어서 부활을 빠트릴 수도 있지 않는가 여기겠지만 그것도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죽음 앞에 있는 자들에겐 더더욱 예수님이 부활했으니 당신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는 뜻은 사실상 우리 죄를 대속하신 주님은 물론 부활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도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이왕에 질문을 주셨기에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이 구원과 연결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육신적 부활의 의미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그 예고대로 정확하게 스스로 부활하셨습니다. 당신께서 하나님이라는 확증입니다. 인간 중에 그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이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육신적으로 죽은 후에 영은 천국으로 가고 또 마지막 날에 육신적인 부활을 합니다. 사람은 이 땅에서 부활할 수 없습니다. 나사로의 경우도 부활(復活)이 아니라 얼마 안 있다 다시 완전히 죽어야만 하는 소생(蘇生)일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육신적 부활은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의미합니다. 그 부활이 없었다면 구원도 영생도 없습니다. 부활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은 인간 성인에 불과해지며 십자가는 한 성인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일 뿐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까지만 대신해서 감당한 것밖에 안 됩니다.
구원이 성립되려면 자비(긍휼,Mercy)와 은혜(Grace) 두 차원이 다 이뤄져야 합니다. 먼저 자비는 도무지 자기에게 자격과 공로가 없기에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데도 그 벌을 면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그치면 죄의 용서만 이뤄지는 셈입니다.
은혜는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도무지 받을 자격과 공로가 없음에도 공짜로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써 신자가 그 부활에 연합하면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 때문에 신자가 천국 입성까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케 하라.
죄 사함과 영생 선물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구원의 원리 또한 단순히 개념적 믿음으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신자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물론 부활에도 연합하여야 한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롬6:1-11) 또 그래야만 죄에 더 거하지 않고 새 생명 가운데에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새 생명”은 부활에 연합해야만 받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내면의 죄만 씻은 것이 아니라 제2의 창조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도 이 땅에서 사실상 영적인 부활을 맛 본 자입니다. 그런 부활이 없으면 머리로만 수긍 동의하는 관념적 믿음일 뿐입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한 죄인이 완전히 낮아져서 예수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됩니다. 썩어질 자신의 옛사람은 철저히 깨어지고 부서져서 죽어 없어짐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맛보는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히 채워져 새로 태어나는 체험도 하게 됩니다. 신자가 구원 얻을 때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빈 무덤의 부활하심에 반드시 연합하게 됩니다. 바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일대일 개인적 체험적 대면이 선행되어야 구원이 성립됩니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마지막 날의 부활은 어렴풋이 믿었고 기대하고 소망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관념적 믿음이었지 개인적 체험적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거듭남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아직 체험도 못했기에 쓸쓸히 돌아갔습니다. 그 단계에선 그는 아직 구원 밖에, 구원으로 작정이 되어있었다 해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영적 부활을 체험한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는 절대로 이전의 삶을 그대로 이어서 살 수 없습니다. 또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에 전혀 의심이 생기지 않으며 오히려 육신적 부활이 없었으면 자신에게도 그런 부활이 생기지 않을 것임도 압니다.
바꿔 말해 주님 부활의 의미를 구태여 성경적인 교리로 정리하지 않아도 자기 존재 전체로 저절로(진리의 영인 성령의 간섭으로라는 뜻임)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과 정반대의 인생 목표와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비록 더디고 때로 넘어져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데 어찌 자신의 영적 부활을 자기가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가 또 어찌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을 가르쳐라.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은 주님을 여전히 인간으로 보는 인간적 생각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 성인군자의 숭고한 희생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그 숭고한 희생을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기에 예수의 삶을 따라가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고 믿는 정도입니다. 이처럼 머리로만 수긍 동의하는 관념적 믿음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실제로 거듭난(부활한) 믿음이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인간 성자가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쳐도 그런 관념적 믿음은, 육신적 부활에 대한확신이 없다면 여전히 구원과는 거리가 멉니다. 자칫 예수님이 이 땅에선 그냥 인간의 껍데기만 쓰고 있다가 십자가에 죽은 후에 원래의 하나님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초기 이단의 하나인 가현설(假現說)에 동의하는 꼴이 됩니다. 십자가상의 주님이 인간 가면만 썼다면 죄 값으로 반드시 죽어야하는 인간제물이 없었기에 죄 사함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육신적 부활이 없으면 인간의 육신적 부활도 없습니다. 또 신앙의 핵심도 주님의 이끄심 가운데 새 생명으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자기 내면을 스스로 성찰 정화시키는 도덕이나 종교로 전락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손수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무덤에서 걸어 나오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분이 신자도 육신적 부활로 이끄신다는 “절대적 진리”를 붙들고 그에 의거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만 기독교 신앙입니다.
바울처럼 영적으로 부활한 분명한 체험이 있는 신자는 주님의 부활에 의심치 않고 또 그 의미도 압니다. 천국 영생과 마지막 날의 육신적 부활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갖고 이 땅의 어떤 환난도 이기며 평강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빌1:20-24, 3:7-16)
물론 전도하면서 부활에 의미에 대해, 특별히 대속구원과 연결해 구체적으로 설명할 겨를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 믿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 갑니다.”라고만 해도 이미 부활신앙은 전해졌습니다. 그대로 믿으면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고 구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 의미와 그 의미를 앞으로 자기 삶에 어떻게 접목 실현할지는 아직 모릅니다. 그것은 전도자와 교회가 책임지고 가르쳐 훈련시킬 부분입니다.
6/8/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