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넘어지는데 신앙의 비법이 없을까요?
[질문]
삶속에서 하나님을 늘 찾으며 그분 말씀대로 되게 해달라고 많이 간구합니다. 그러나 노력할수록 저의 한계가 드러나고 말씀과 정반대로 살았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처음부터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는 건가요? 아니면 만들어지는 건가요? 구약의 다윗, 여호수아, 모세, 신약의 베드로, 사울 등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겨집니다. 말씀대로 사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사실이 분명히 보입니다. 신앙의 비법이 없을까요? 신앙생활이 너무 어렵습니다. 말씀 들을 때는 은혜 받다가 막상 제 삶을 돌아보면 말씀과 괴리감이 너무 큽니다. 주일 하루만 조금 경건하고 계속 넘어졌다가 다시 주일에 교회에 출석해 재충전을 반복하는 이런 모습은 뭔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답변]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믿음의 영웅들
모든 신자들이, 당장 저부터 실감하는 문제입니다. 신앙에 손쉬운 지름길은 절대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매뉴얼도 없습니다. 신자의 평생은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한 걸음씩 걸어가는 외롭고 고달픈 여정입니다. 비법을 찾으려는 생각부터 완전히 버리셔야 합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다시는 그런 길을 모색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신앙이 성숙되는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타고난 믿음이 있은 것이 아니요 손쉬운 지름길을 따른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동안 맹수의 습격을 많이 받았으며(삼상17:34-36) 그 후에도 골리앗과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를 빼고는 심지어 왕이 된 후로도 고난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으로 모세로부터 지도자 훈련을 사십 년 넘게 받았으며(출33:11), 모세는 알다시피 떨기나무 불꽃으로 여호와를 대면하기 전에 80년이나 하나님이 침묵하는 고뇌와 갈등의 긴 터널을 거쳤습니다.
베드로는 삼년 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 역사상 최고의 신앙교육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회심 전에는 가마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최고전문가로 교육 양성되었고(행22:3) 스데반의 처형에 관여하는 등 신자들을 핍박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할 때까지 많은 영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사도로 행하면서도 엄청난 고난을 겪었습니다.(고후11:23-28)
성경 인물들이 하나님께 순종한 것은 틀림없지만 성경은 그들이 이룬 업적 위주로 기록했기에 언뜻 보면 평생을 흔들림 없이 충성한 것 같습니다. 그들 모두는 원죄 하에 태어나 욕심과 죄악이 생생히 살아 있는 우리와 동일한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으면 그런 인간적 본성으로 인해서 그들도 구원 전이나 후에 많은 허물과 죄를 범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간음을 저질렀고 그 불륜녀의 남편이자 충직한 부하를 전장에서 죽게 모략을 꾸몄고,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들에게 기만당했으며, 모세도 살인자인데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반석을 지팡이로 치는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는 알다시피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또 할례주의자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다 바울에게 꾸중을 들었습니다(갈2:11-14). 바울은 최초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고(행7:58-8:1) 신자들을 앞장서서 핍박했습니다.
거기다 주님께 온전하게 순종할 때까지 믿음의 실패도 오래 동안 많이 겪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칠 때까지 120년이 넘게 걸렸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실패를 많이 거쳤습니다. 다윗의 시편 2-7 편 정도만 간단히 살펴봐도 그가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얼마나 많이 하나님과 씨름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약서신서의 절반을 저작해 기독교교리를 확립하다시피 한 바울의 이 고백을 보십시오. 계속 허물과 죄로 넘어지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 소망하고 그분께 다시 힘을 얻어야만 일어설 수 있다고 실토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신자가 된 후의 변화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되었다고 당장 거룩한 성자가 되지도 않고 그렇게 될 수 있는 지름길도 절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은혜를 얻었음을 믿게 된 것뿐입니다. 여전히 원죄로 타락한 본성에 묶여 있습니다. 언제나 신자 되기 전의 잘못과 죄악에 넘어질 수 있는 문호가 오픈된 상태입니다.
그럼 신자가 된 이후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불려나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졌기에 그분의 사랑과 권능 안에 붙들려 있다는 것뿐입니다. 더 이상 영원한 심판으로 정죄되지 않습니다.(롬8:1,2) 그 신분과 소속이 흑암과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나라에서, 광명과 의와 하나님과 생명의 나라로 옮겨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에 사탄에게 결코 빼앗기지 않으며 천국 가는 날까지 또 마지막 부활의 날까지 내주하신 성령님이 지켜주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신자란 세상에서 불려나왔으나 여전히 세상 안(within the world)에서 살 수밖에 없지만 세상에 속하지(of the world) 않고 하나님에 속할 따름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지배하며 원죄 하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죄인들의 시기 다툼의 장입니다. 신자는 인간적 본성이 그대로 남은 채로 죄의 시험과 유혹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신자 내면의 욕심과 죄의 본성이 더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여신 후에 당신과 동일하신 사랑과 권능을 지니신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택한 자를 거듭나게 하시고 그 영혼에 영원토록 내주하면서 신자들이 바로 설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와 싸워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 피 흘리기까지 평생을 두고 신자가 자기 책임 하에 죄와 싸우는 훈련과 실천을 해야 합니다. 결코 단 번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 굳건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질문하신 대로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본인이 노력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질문 자체가 성숙한 증거다.
그럼에도 신자가 된 후에 본인이 체감하는 영적 성장이 몇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죄인 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고 또 죄를 지으면 심히 부끄럽고 두려워집니다. 그 전에는 죄가 무엇인지 모르고 죄를 즐겼고 남들에게 동참하라고 권했으며 그러지 않는 자를 비난까지 했습니다.(로마서1:18-3:18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 성장을 비유하자면 흰 옷으로 갈아입고 빛 가운데 서있기에 작은 얼룩만 묻어도 아주 신경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신자 되기 전에는 검정 옷을 입고서 흑암 속에 서있었기에 흙탕물이 크게 묻었어도 전혀 더러워 보이지 않았던 것과는 천양지차이입니다.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아주 큰 믿음의 진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전에 예수를 몰랐을 때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자를 고리타분하다고 멀리 했었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께 회개 기도하는 간단한 일도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죄에 대해서 그만큼 예민해졌고 또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이미 생겼습니다. 그런 소망이 클수록 이런 갈등과 회개는 더 많아지는 법입니다.
문제는 질문하신 대로 마음에 찔림이 있고 고치려고 노력하는데도 별로 진전이 안 되고 매번 쉽게 넘어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직히 너무 실망이 됩니다. 서두에 강조한 대로 실망이 되어야만 정상입니다. 실망되는 이유와 의미를 정확히 정리가 안 되어 있기에 괴로운 것이며 어떻게 그 실망을 극복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 바뀐 것을 다시 간단히 정리해봅시다. 영원한 심판은 절대 없습니다. 구원의 취소도 없습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를 입을 때에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죄와 싸워 이기고자 하는 소망이 심겨졌습니다. 또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단 죄의 본성은 그대로 살아 있고 세상의 죄악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노력하기에 달렸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가장 먼저 행할 바는 계명대로 순종 못하고 또 죄책감이 든다고 해서 절대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쓰러져 있으면 사탄의 먹이 감만 될 뿐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심판이 없음을 확신하십시오. 또 성령님이 내주하기에 얼마든지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도 그 자리에 쓰러져 있거나 후퇴하는 신자를 가장 안타까워하십니다. 부어주려고 예비하신 복도 유보하십니다.
성령은 이런 싸움을 곁에서 도와만 주시지 대신 싸워주지는 않습니다. 어떤 초자연적 능력으로 거룩하게 바꾸어주거나 선행을 손쉽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나서서 기꺼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헌신해야만 사탄과 세상의 훼방을 막아주시고 신자의 그 결심과 노력이 계속 이어지도록 격려 위로 힘을 보태주십니다.
질문과 같은 실망이 들 때에는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일단 무조건 의지적으로 실천 가능한 아주 사소한 선이나 계명부터 실행하여야 합니다. 죄에 쓰러지거나 계명에 불순종하는 일 그것부터 스스로 중지하려고 해서 쉽게 그만두어지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고 계명 하나라도 실천해야만 겨우 그런 넘어짐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을 바꾸라.
가장 중요한 사항은 믿음으로 순종한다는 의미 혹은 믿음이 굳건해진다는 의미를 정확이 아셔야 합니다. 지금껏 알고 있는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어야 합니다. 간단히 알기 쉽게 말해 외적으로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을 실행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혹은 믿음이 좋아졌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으로 이뤄낸 결과물이지 믿음 자체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교제와 동행을 지속적으로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관계를 뜻합니다. 그분의 손을 잡고 일생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단순히 실제로 행해지는 행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의할 것은 내면의 생각이나 감정의 변화도 겉으로 안 보일 뿐 여전히 행동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건, 상황, 사안에 따라서 정서적 기복이 생긴다고 해서 믿음이 나빠진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믿음의 본질은 반드시 하나님 쪽만을 일관되게 지향하는 관계성, 방향성, 목적성, 내면의 성향이라는 차원에서 분석 판단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끊거나 장소적으로 한두 곳에 제한해서 믿음을 판단해선 안 됩니다. 지금껏 믿음의 판단기준으로 삼아왔던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의 실행은 일시적 부분적 신자 쪽에서 행한 일일 뿐이지, 그분과의 지속적 관계라는 맥락에서 파악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믿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과 한두 번 접촉한 일로는 믿음이 생성되지 않고 믿을만한 인상 내지 인식을 얻었다고 당장 믿음이라고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과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교제한 후에 변함없이 진실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진 후에 상호 신뢰할만한 관계를 실제로 이어갈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신자가 한두 번 주위에 어려운 이웃을 섬겼다고, 기도나 찬양을 뜨겁게 행했다고, 성경 말씀 몇 구절 깊이 잘 이해했다고, 전도 몇 명 했다고 믿음이 좋아졌다고 섣불리 자만해선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 반대의 경우도 믿음이 나빠졌다고 섣불리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뭔가 선을 행하여 기쁘고 신나도 혹시라도 다시 넘어지지 않게 겸손하고 진실 되게 그분 앞에 지속적으로 이전과 다름없는 태도로 엎드리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반대로 죄와 허물로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언제 어디서나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저는 여전히 연약하고 죄 많은 존재이니 오직 저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과 은총뿐이라는 고백이 입에 붙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선하고 경건한 행위 하나 하나로 믿음을 판단하니까 삶에 그런 열매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믿음이 나빠졌다고 나는 가망이 없다고까지 실망합니다. 이런 질문으로 곤혹스러워 하는 모든 신자는 바로 이점에서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에 묶여 있지 말고 하나라도 사소한 선을 의지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도 말씀드린 것입니다.
믿음이 신자 쪽만의 사건이나 행동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방향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죄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을 한두 번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내 마음에서 지워서 등을 돌린 것입니다.
원죄부터 그러합니다. 금령을 위반해서 과일을 따먹은 행위는 죄의 결과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을 지우고 인간을 대신 그 자리에 위치했기에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필연적으로 그와 같은 맥락으로 따라 나온 것입니다. 과일을 먹은 행위는 죄의 결과이고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된 것입니다. 구원도 그래서 죄의 본성을 그대로 둔 채로 먼저 한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어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질문하신 것 같은 느낌, 죄책감, 자책감, 실망감이 드는 것은 오히려 믿음이 좋은 증거이고 그럴수록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픈 열망이므로 믿음이 떨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매일 수십 번씩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 쪽을 향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선행이나 종교적으로 경건한 행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 내면에 자신의 욕심이나 의를 앞세우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과 반대편에 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죄입니다. 예수님께 저주 받은 바리새인들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행위가 아니고 관계라면
믿음이 행위가 아니고 관계라면 지속적인 믿음의 승리도 그 관계를 계속해서 주님 뜻에 맞게 바꾸어야 합니다. 위에서 악을 없애려 하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실망하지 말고 실패는 무조건 잊고 무엇이든 선을 하나라도 의지적으로 행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자칫 일시적인 미봉책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몇 번의 선한 열매를 맺지만 쉽게 지치게 됩니다. 끈질긴 시험과 유혹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사탄과 세상에는 절대로 휴식이 없습니다. 지금껏 모든 신자가 그렇게 노력해왔고 그럼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속적인 평생을 바쳐서 행할 한 가지 선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받은 자신만의 소명입니다. 소명에 붙들린 삶을 살아야만 질문하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됩니다. 질문에서 예를 든 믿음의 영웅들이 믿음이 좋아서 성공한 인생이라기보다는 바로 소명에 붙들려 살았기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은 삶을 평생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그들도 때로는 죄를 짓고 주님 계명에 위반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실현해야만 하는 자기만의 소명이 있었기에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인생에서 반드시 도착해야 할 목표지점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그 도착지가 주는 의미와 가치를 대신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실현하려 노력하니까 성령의 보호 인도 도우심도 충만하게 동반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에 전 인생을 걸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족속을 멸하고 그 기업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분배하는 소명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가나안 땅의 사방 대적을 멸하고 나라를 굳건히 세우고 성전을 건축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처럼 율법을 진정으로 삶에서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 나라를 열방으로 확장하는 소명을 실현하고자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런 이들은 오직 소명의 실현을 위해서 자신을 준비 훈련하고 또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실제로 평생을 바쳤습니다. 나태 과오 실패 범죄가 있으면 그 때마다 회개하고 성령의 지혜와 힘으로 다시 일어서서 한 걸음씩 진군했습니다. 소명은 자기만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라,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그분의 일입니다. 그것도 평생을 걸쳐서 행해야 합니다.
일반신자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소명은 받았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 실현해야 합니다. 꼭 적극적 전도가 아니라도 세상 안에서 다른 이의 생명에 유익과 활력을 심어줄 수 있는 구체적 일을 하시면 됩니다. 사회를 개혁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평생을 걸면 다른 데 신경 쓸 여유 시간이 없습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그 일 때문에 금방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한두 번의 실패에 마음 아파하는 그 시간마저 아깝게 됩니다.
결론을 맺자면 이런 의심과 갈등이 생기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마십시오. 넘어질 때마다 이런 고뇌 실망이 당장에는 생길 수 있지만 그것에 붙들리게 되면 그때부터 바로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극적 의지적으로 아주 사소한 실현가능한 계명부터 실천하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을 바칠만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서 그 일에 전심전력하십시오. 그런 일을 발견하기 전까지라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반드시 자기만이 행할 수 있는 선을 찾아 행하십시오.
7/23/201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