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3:23-29) 하나님의 비전을 최대한 줄여라.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 (7)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우리가 벳브올 맞은편 골짜기에 거주하였느니라” (신3;23-29)

 

눈이 빠진 용의 그림

 

모세는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지금도 유대인들로부터 다윗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영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해 친구처럼 대화하며 끝까지 충성한 구약시대에 가장 크게 쓰임 받은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젖과 꿀이 흐르는 소망의 땅에 들어가지 못함으로써 그 인생이 마치 용을 그려놓고 마지막에 눈을 빼먹은 것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남아 살해 명령에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살아났고 또 거꾸로 바로의 왕자로 자랐기에 추측하건대 일찍부터 동족을 섬기는 일을 하겠다고 결단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동족을 핍박하는 애굽 관원을 격분하여 살인한 일과 나중에 출애굽과 광야에서 백성을 지도하는 모습을 보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든든히 세워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필생의 소망이었을 것입니다. 

 

흔히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120여 년간 충성한 종을 이렇게 매정하게 물리치는 하나님은 너무 독선적이고 앞뒤가 꽉 막힌 분 같지 않습니까? 차라리 형 아론처럼 광야 방황 중에 생을 마감했더라면 미련이 덜할 텐데, 약속의 땅을 빤히 보게 하고는 거기까지라고 하니까 심술궂기까지 합니다. 거기다 네가 맡았던 일을 여호수아가 대신 행하도록 하겠다고 하니까 모세로선 더더욱 섭섭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까닭은 모세가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던 중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한 사건 때문입니다.(민20:2-13) 하나님은 반석에 대고 말로 명해 물을 내라고 했는데 그는 화를 내며 두 번이나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쳤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을 믿지 못해 당신의 거룩함을 백성들에게 나타내지 아니했기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신명기는 가나안 입경 직전에 이스라엘의 신세대에게 모세가 다시 율법을 가르친 책입니다. 본문이 ‘그때에’로 시작하므로 민수기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 벌을 받은 얼마 후에, 모세가 자기 잘못을 깨닫고 제발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끝난 일이니까 다시는 언급하지 말라는 너무나 매정한 답변만 들었다고 말합니다.(26절)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서 큰 비전을 품고 헌신 충성하는데 마지막 순간에 큰 장애가 나타나서 도무지 사역이 진척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단계만 넘어가면 바로 이뤄질 텐데 갑자기 큰일이 일어나 심지어 그 사역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후임자가 그 사역을 이어받아 보기 좋게 달성하고서 사람들의 칭송을 대신 받습니다. 

 

지금 모세의 입장을 비유하자면, 목사가 처음에는 몇 명의 교인들과 가정집에서 예배드리며 교회를 개척하다가, 조금 신자가 늘면서 미국교회 건물을 빌려 사용하다가. 크게 부흥되어서 자체 건물을 마련해 봉헌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목사에게 갑자기 중병이 생겨 입원하는 바람에 봉헌식도 참석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이미 든든하게 세워진 교회는 성전 봉헌식부터 부목사가 맡아서 하게 된 셈입니다.

 

모세에게 화내지 않았다.

 

모세를 가나안에 한 걸음도 들여보내지 아니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에 관한 의문을 해결할 열쇠는 대체로 그 본문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본문도 하나님이 모세의 간구를 거절하신 뜻을 분명히 밝혔는데, 바로 “그만해도 족하니”(26절) 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이 조금 부족한데, 히브리 원문은 “모세 너에게 그것으로 충분하니라”의 뜻입니다. 단순히 이미 내린 명령이라 번복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역자로서 모세가 현재까지 행했던 일들로 충족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 KJV는 “Let’s suffice it thee”(you의 목적격 고어)로, RSV도 “Let it suffice you”로, 우리말 ‘표준새번역본’도 “이것으로 네게 족하니”라고, 모세를 강조하며 번역했습니다. 

 

네가 맡은 역할은 끝났고 너를 통해 새롭게 진행할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입경부터는 젊은 여호수아더러 백성을 이끌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늙어서 전쟁을 직접 수행하기 벅찰 것이라고 배려해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120세에 죽을 때에도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신34:7) 모세로선 매우 섭섭하게 여겨질지 몰라도 그의 가나안 입경은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원래부터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전쟁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당신의 나라를 세울 가나안 전쟁은 더더욱 하나님께 속했으므로 누가 지도자가 되었던 당신께서 확실하게 승리를 보장해 준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지금 상황에서 모세에게 전쟁을 직접 수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겪지 않은 신세대에게 굳건한 믿음으로 무장시키는 일을 마지막으로 모세 네가 한 번 더 해야 하는데, 네 말고는 그 일을 맡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지막 소명으로 여호수아를 담대하고 강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28절) 여호수아는 물론 그가 통솔할 신세대를 그렇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자기들 선조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벌을 받아서 광야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모습을 본 이 신세대에게, 당신께서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이스라엘을 보호 인도했는지 한 번 더 상기시키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1에서 본문 바로 앞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다시 가르치라는 것인데 본문에 이어서 율법을 다시 가르치는 내용이 죽 이어지는 까닭입니다. 그 사역까지 마치면 충성된 종의 직분을 다 한 것이므로 모세 너에게 충분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모세의 가나안 입경을 금지 시킨 것이 그에게 크게 분노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모세 스스로 자기 기도를 거절하신 이유를 하나님께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26절a)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작 이스라엘 백성에게 크게 진노했었고 그 형벌을 모세에게 대신 감당시켰던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들의 끊임없는 불평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애굽에서 관원을 죽였을 때처럼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바위를 쳤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모세가 그렇게 완악한 백성들의 광야 방황을 이렇게 마무리 지은 것만으로 크게 수고했다고 간접적인 표현으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더러 가나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금했으나 느보산 꼭대기에 세워서 요단강 서편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전체를 한 눈으로 바라보게는 했습니다. 그는 이미 요단 강 동편 땅에 르우벤과 갓 자손과 므낫세의 반 지파가 잘 정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신3:12-17) 나머지 아홉과 므낫세 반(半) 지파가 서쪽 땅에 정착할 일은 확정되었고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모세로선 그곳에 세워질 하나님의 아름다운 나라를 마음속으로 그려보고 얼마든지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영적 천재는 없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출애굽과 광야 여정은 모세에게, 가나안 정복 전쟁은 여호수아에게 일임하려고 계획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바로의 궁정과 미디안 광야에서 앞으로 맡을 일을 위해서 미리 준비시켰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맡을 여호수아는 모세의 부관으로 아말렉과의 전쟁에 직접 참전 지휘하도록 했습니다.(출17:8-16) 

 

더 중요하게는 모세가 율법을 받아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나아가 율법에 따라 백성을 다스리는 모습을 여호수아더러 바로 곁에서 지켜보게 했습니다. 교회를 개척 담임한 목사는 성전 봉헌식도 참석하지 못하고 부목사가 그 직분을 이어받아도, 그때까지 담임목사가 적은 숫자로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부흥시켜 왔는지 바로 곁에서 현장 실습으로 다 배웠듯이 말입니다. 

 

만약 모세의 지도로 가나안 정복까지 완성되면 그는 살아있는 신(神)으로 추앙될 것입니다. 출애굽과 광야 방황과 가나안 정착이라는 세 가지 막중한 소명 다 성공적으로 완수한 자가 됩니다. 그러면 가나안에 세워지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기보다 모세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모세 개인숭배까지는 몰라도 두고두고 회상 감사할 장엄한 기념관이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큰일을 혼자서 다 감당할 만한 영적 천재를 두지 않습니다. 인간 천재를 하나님이 시기 질투해서 그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시대별로 영적으로 탁월한 자를 예비해 주시지만, 그런 자질과 능력부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하시고 인간은 시대 장소 여건 별로 각자에게 적합한 역할을 맡길 뿐입니다. 모세의 역할은 여기까지이고 그 후로는 여호수아가 맡아야 한다는 것은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 주관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 노예살이에서 탈출해 가나안 이방 족속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거룩한 율법을 지키는 나라로 세워진 것은 인간 모세의 계획, 노력, 공로가 전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영적인 천재는 없기에,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각자가 맡은 역할이 각기 다르고 한시적이기에, 아무리 모세가 엄청난 일들을 이루었어도 하나님의 종들은 반드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은 종교적 업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그분의 거룩한 통치가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지역에 확장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이 땅과 인간이 존속하는 한 영원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사역자끼리 서로 협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후계자를 세워가는 일이 어쩌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고 특별히 젊은 교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가는 때는 예수 십자가 복음에 온전히 헌신한 젊은 영적 지도자들이 더더욱 절실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성경에 후계자 승계에 성공했던 예는 거의 없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친 여호수아부터 그랬고, 대표적으로 다윗 왕이 세운 하나님 나라가 솔로몬에 의해서 오염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모세를 이어받은 여호수아의 경우와는 달리 하나님의 인도만 신실하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나 후임자 모두 자기 능력과 업적에 스스로 도취했거나 인간적인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중단없이 확장되어야 하기에 지도자는 미리부터 후계자를 양성하되 자기보다 더 뛰어나게 성장시켜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처사입니다. 단순히 교회 목회자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교회 내 여러 부서는 물론, 신자가 속한 가정과 직장과 모든 조직 차원에서 그래야 합니다. 디모데처럼 부모보다 더 믿음이 좋은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비전을 최대한 키워라.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을 위해서 모세처럼 큰 비전을 품고서 여호수아처럼 성실하게 훈련받으라고 가르칩니다. 신자 부모들도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악을 저질러 하나님께 벌을 받았으나, 요셉은 어린 시절부터 큰 꿈을 품고서 이방 나라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자식들에게 큰 비전을 품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라고 독려합니다. 

 

그런데 신자들과 교회들이 내세우는 비전이 정말로 하나님께 받았는지 조금 의심스럽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거룩한 구호는 앞세우나 사실은 인간 목사, 인간 사역 팀장, 인간 부모가 자신들의 인간적 소망과 심지어 욕심으로 세운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거기다 능치 못할 일이 없는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당연히 이뤄진다고 굳게 믿고 최대한 큰 계획을 세웁니다. 빚에 쪼들렸던 과부와 두 아들이 기름을 담을 그릇을 적게 마련하는 바람에 엘리사가 베푸는 하나님의 복도 적게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왕하4:1-7) 그래서 비전을 크게 세워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자신에게도 큰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의 역할 분담은 물론이고 지도자 승계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스스로 그런 거창한 계획을 세워서 실현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모세 본인도 동족의 구원이라는 꿈을 꾸긴 했어도 하나님의 간섭하신 손길이 없었으면 시작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무려 80년간 그 꿈을 수행할 방도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동족과는 완전히 격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이 인도대로 순종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분이 계획하여서 신자가 처한 여건에서 신자가 행하는 일상적인 일을 통해서 그분이 주도 완성하십니다. 엘리사가 도와준 과부도 그녀가 갖고 있던 마지막 기름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했습니다. 성경은 준비한 그릇에 없어지자 기름이 그쳤다고만 말하지, 엘리사가 야단쳤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엘리사가 조금 빌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당장 불똥이 떨어진 과부와 두 아들은 틀림없이 나름대로 최대한 많이 빌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빚을 갚고서 두 아들을 빼앗기지 않고 당분간 생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양의 기름을 채워준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들도 엘리사로부터 구체적인 방안을 직접 들었습니다.

 

지금 모세가 평생 소망을 하나님이 단호하게 거절했는데도 전혀 불만을 표하지 않았던 까닭도 지난 120년 동안 하나님을 위해선 자기가 계획해서 행한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행한 일이라곤 동족을 살리려고 애굽 관원을 살해한 정도인데 곧바로 다음 날 오히려 동족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척당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의 왕자로, 이방 우상 족속의 제사장 사위로 가장 활발해야 했던 전반과 중반의 인생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나이 80이 되자 뒤늦게야 나타나신 하나님이 큰 소명을 맡겼으나 자기는 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거절해서 하나님이 화를 낼 정도였습니다. 거의 반강제로 떠밀리다시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나선 이후로도 오직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는 비전

 

모세처럼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명령하는데 그대로 따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는가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려서부터 품은 큰 비전을 이룬 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요셉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성경 기록을 아무리 앞뒤로 살펴봐도 요셉 본인이 애굽 총리가 되겠다는 비전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장차 형제들보다 높아질 것이라고 계시해 주는 꿈을 두 번 꿨어도 어려서 그 의미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형들에게 미움받아서 애굽의 노예로 팔린 이후로는 아예 개꿈이라고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만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 여겼어도 요셉의 생사를 모르게 된 후로는 오직 아들이 살아있기만 바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사자 요셉은 그때그때 자기 앞에 닥친 상황과 사건에서 기도하여 최선의 판단을 하고서 성실하게 자기 할 일만 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다 기근을 해결하려 애굽으로 내려온 형들과 극적으로 화해한 후에 비로소 이렇게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나를 미워했던)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 모세와 요셉이 하나님의 큰 종으로 이스라엘을 위해서 큰일을 행했으나 자기들 비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비전을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서 이룬 것입니다. 그들은 개별 사건의 뜻조차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몰랐으며, 하나님이 원대하신 계획은 더더욱 그분이 온전히 성취해 주자 뒤늦게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모세나 엘리사 시대와 달리 하나님의 직접 계시가 거의 없으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영적 욕심과 계획을 스스로 크게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품은 비전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든, 내면의 미세한 음성이든, 정말로 그분의 계시인지 또 그분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지 잘 따져봐야 합니다. 그 비전을 수행하면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되어져 가는 일들이 성경의 진리에 합당한지 판단 선택 적용해야 합니다. 그 전에 근본적으로 자기 삶과 인생 여정이 그분의 오른손에 붙잡혀 있음을 확신하고서 자신이 그분의 거룩한 계획이 실현되는 통로가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부터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당연히 당신의 크기만큼이나 광대하나, 그 실현 방식은 신자더러 일상적인 삶에서 한 걸음씩 걸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비전이 아무래도 자신의 소망과 계획에 그친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수정 포기할 준비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비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해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완전합니다. 우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큰 믿음을 가졌던 모세마저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오랫동안 자기 비전이 이뤄지지 않거나 오히려 반대로 되어져 갈 때 생기는 정서적 혼란과 의심 원망을 영적으로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처음 비전을 과감히 수정 포기해야 하는데 그것이 성숙한 믿음으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계획을 크게 세우는 것보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사실상 그분의 비전을 최대한 크게 품는 일입니다. 

 

모세로선 얼마나 가나안에 들어가 보고 싶었겠습니까? 이 상황에선 그냥 자기가 지휘하여 당장이라도 진군해 버려도 되었습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복을 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천사에게 매달렸듯이, 최소한 하나님께 그 땅에 한 걸음이라도 디딘 후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떼를 써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들어갈 수 없다는 단호한 말씀을 받았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어도 하나님의 대답은 같았습니다. 

 

순종한 진짜 이유

 

모세가 자기 필생의 소망을 포기하고 순순히 하나님을 따랐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바위를 지팡이로 내리쳤던 시간과 장소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 일이 일어난 때는 광야 방황 38년이 끝나가는 시점이었고 장소는 가데스 바네야였습니다.(민20:1) 이스라엘이 기나긴 방황을 끝내가는 때에 그 벌을 받게 된 문제의 장소 근처에 다시 도착한 것입니다. 

 

그동안 근 40년이 지났으니 일 세대는 거의 다 죽었을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의 진군 명령을 처음 거역했을 때 군대에 갈 성인이 되지 않은 20세 미만은 벌을 받지 않았는데 그들도 이미 38세에서 58세입니다. 그런데 그 신세대들이 선조들처럼 가데스 바네야에서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고 모세와 아론을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왜 광야를 방황했는지 부모로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으며, 그동안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반석의 생수와 만나와 메추라기로 갈급하지도 굶지도 않고 건강하게 잘 지내왔는데도 말입니다. 

 

다시 가데스 바네야에 도착했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했던 처음 출발지까지 자기들을 무사히 보호 인도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예배부터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선조의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헌신해야 했으나 정반대로 당장 마실 물이 없다고 선조들과 똑같은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았습니다. 그래도 눈곱만큼의 양심은 남았던지 차마 그곳에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못하고 애꿎은 모세를 공격했습니다. 

 

모세로선 얼마 전에 자기 생명의 은인인 누나 미리암이 죽었으니(민20:1) 더더욱 화가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지도자 개인의 사정과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가뜩이나 슬픔에 잠겨 있었으니까 더 예민해져서 화를 냈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불순종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경미하게 훼손했어도 그분에게 짓는 죄는 분명히 큰 죄입니다. 실제로 모세도 도대체 백성들의 원망을 계속 들어가면서 이런 귀찮고 고달픈 일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합니까라고 내심 하나님께 원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다른 곳도 아니고 가데스 바네야에서 모세의 불순종은 그냥 모른 척 덮어둘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38년 전에도 동일한 장소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 하나님은 모세더러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명했습니다.(출17:6) 다시 그곳에 도착해 똑같은 일이 발생하자 하나님이 이번에는 “반석에 말로 명하기만 하라”고 했음에도 모세마저 예사로 들었던 것입니다. 주의 종이 하나님의 일을 때로 지루한 모습으로 반복되어서 예사로 여길 수 있으나, 하나님 쪽에선 각각의 시간과 장소마다 당신만의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줍니다. 절대로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쉬지 말고 기도하여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는 가나안 입경 금지가 언뜻 모세가 저지른, 어쩌면 죄 아닌 죄에 비해서 너무 과도해 보였으나 절대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께 그 벌을 받은 직후에 이전의 일 세대와 같은 차원의 죄를 범했다고 깨닫고선 크게 아차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입경이라는 그의 평생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징계를 통해서 백성들처럼 모세도 결국 광야에서 죽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이나 정착한 후에도 하나님께 불순종할 경우, 아무리 모세 같은 위치에 있을지라도, 예컨대 여호수아라도 반드시 징계한다는 사실을 온 백성더러 똑똑히 목격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예표

 

모세가 이백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였으나 하나님이 아무 공로 없어도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이 절실한 그저 한 사람의 죄인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태어나기 전부터 죄에 찌든 백성의 대표자로, 또 그들의 죄를 대속해야 할 중보자의 자리에 세워서 그의 일생 전체를 당신께서 이끄셨습니다. 결국은 그도 백성과 같은 죄인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중요한 사건이 다 그러하듯이 이 사건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예표합니다. 또 그래서 모세 같은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로 올 것이라고 계시한 것입니다.(신18:18)

 

흥미롭게도 모세도 예수님도 무덤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했으므로 무덤은 있었으나 텅텅 비워졌고 그 원래 위치는 정확히 말 수 없습니다. 모세의 죽음에 대해 나중에 추가로 기록한 34장에 따르면 그는 본문의 기도를 했던 벧브올 골짜기에 묻혔으나 그 묘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신34:6) 만약 그의 묘가 거창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면 모세 개인을 숭배하는 종교가 반드시 생겼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안하지 않았고 십자가 구원 진리만 당신의 죽음으로 계시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영혼 구원 사역도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일임했고 그 사역을 온전히 인도해 줄 성령을 보내주셨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제자들이 걸어가는 세상의 끝 날까지 땅끝까지 함께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비전은, 그렇다고 다들 해외 선교사로 헌신하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위치와 신분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싶다는 순전하고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내주하신 성령님이 신자의 일상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주관하시므로 신자 스스로 굳이 따로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됩니다. 그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오히려 자기를 낮추고 더 낮추어서 그분의 인도에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개인적으로 가장 낮아진 비전이 거꾸로 하나님께 가장 큰 비전이 됩니다. 모세의 일생에 가나안 입경이 빠져서 용의 눈이 빠진 것 같아도 하나님 뜻에선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용의 눈을 그려 넣은 화룡점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물론 거룩하심, 완전하심, 영원하심, 신실하심 등은 인간의 계측은 물론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광대합니다. 그에 비추어서 아무리 신앙생활 오래 했어도, 아니 오래 했을수록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부끄럽고 연약한지 아는 것이 바로 성숙되고 온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신자에게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라고 했습니다. 신자 자신은 죽고 하나님만 살아나게 하는 것이 가장 크고 좋은 비전이며 그런 비전만이 온전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일이 멈춰서 전혀 전진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빨리 후계자를 양성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현재의 이 고난만 해결되면 하나님께 더 충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바로 그 고난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비전의 실체일 수 있습니다. 

 

(6/30/2024)

 

날마다순종

2024.07.05 19:06:39
*.14.99.126

오타제보 : 건물을 빌려 사용하다가. 크게 부흥되어서 => 사용하다가, 크게 (마침표를 쉼표로)

 

성경은 준비한 그릇 없어지자 => 그릇

 

조금 빌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 빌

 

하나님 원대하신 계획은 => 하나님

 

너무 과도해 보였으나 절대 그러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지 (앞의 '과도해 보이는' 행동이 아닌 상태의 표현이므로)

 

브올 골짜기에 묻혔으나 => 브올 (외래어 표기라 상관은 없지만, 처음 위에 이미 '벳브올'로 해서, 일관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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