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답변 감사히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세례'에 정확한 의미도 잘 모르고 있더군요. 사실 그 동안 중요성을 생각하지 못해서 그랬던거 같아서 좀 더 공부를 해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과거 '유아세례'에 대해서 목사님의 성경문답도 보았습니다.
해당 글에서 목사님께서 약간 돌려서 말씀하시긴 했지만 적어도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앙관에서는 구원은 개개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부모나 타인이 세례를 주는 것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동의하고요. 그러면서 유아세례에 대해 부정적인 어조를 글 전반에 적으셨습니다.
세례 라는 것이 결국 거듭나고 회심한 교인이 그러한 자신의 마음 속에 피어나는 믿음을 고백하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행위라는 것을 봤을 때, 목사님의 이런 어조는 당연한 것이라고 보고 저 역시 너무나도 동감이 갔습니다.
그러면서 제 스스로 과거 생각없이(?) 행했던 세례가 매우 후회되고 다시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20세 군입대 시절, 육군 훈련소 수영장에서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군대라는 특성 상, 많은 장병들이 맛있는 간식을 주는 곳으로 매주 종교를 바꾸고 다녔습니다. 저는 물론 기존 신자였어서 매주 기독교를 선택해서 주말 종교활동을 하였지만요. 당시 군종교회에서는 세례를 단체를 받으면 초코파이 하나를 더 준다는 식으로 했고, 저는 어차피 기독교 신자이고 언젠가는 해야할 행위(?)로 가볍게 인식해서 받았습니다.
군대의 특성 상, 장병들을 대거 차로 운송해 수영장에 데려갔고, 무슨 공장에서 물건을 찍어내듯이 차례로 안수해주시는 분 앞에서(목사님인지도 모름) "성자와 성령과 성부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라면서 주문을 외우듯이 속사포로 읊으시고는 숨을 참고 물 속으로 잠깐 머리를 넣었다 빼는 것을 했습니다. 그렇게 그 날 저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 저 말고도 굉장히 많은 장병들이 그 날 그런식으로 세례를 받았고요. 사실 5주간의 훈련병 활동 중에 교회활동에서 5주 마다 이런 식으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수십만명의 사람들에게 세례를 마치 중세교회가 면죄부 찍어내듯이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서울에 다니던 담임목사님께 웃으면서 농담으로 얘기하며"세례 또 받을 수 있느냐. 그 때는 멋도 모르고 받았다" 라고 말씀드렸는데 뜻밖에도 목사님께서 "어떤 경로로 받았든지 세례는 다시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라는 답변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제가 서울에서 신앙이 갈급해 교회 4곳 정도를 전전했는데(번외로 제가 교회 선택에 있어서 지나치게 신중하고 주변사람들의 의견을 받는 이유이기도 한 거 같습니다.), 바뀐 교회의 전도사님도 "다시 받을 수 없다"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런 반복적인 답변을 들은 그 때야 그런갑다 하고 넘어갔는데 세례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알게되고, 세월이 꽤 지나 제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서 세례를 다시 스스로 죄 고백을 하고 다시 받고싶다는 마음이 참 크게 듭니다.
1. 이런 상황에서 제가 다시 세례를 받을 수는 없는지요? 세례라는 것을 공장찍어내듯이 그렇게 하는 방식 자체도 굉장히 저는 문제가 크다고 다시 생각도 듬에 동시에, 물론 그 당시 어린 저의 선택이었지만 조금 원망도 듭니다. 마치 제대로 스스로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할 일생의 한 번의 선택인데 군종교회에서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한 것에서요. 핑계일수도 있지만, 신앙이 미성숙하고 세례의 의미를 깊이 숙고하지 못할 나이에 있는 대다수의 제 또래의 신앙인들조차 잘 모르고 그렇게 쉽게 받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5주간의 훈련병 활동 중에 그 날 교회에 가면 세례식을 간식을 하나 더 준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사실 그 시절의 훈련병에게 있어서 초코파이 하나는 정말 큽니다. 물론 간식 하나에 세례를 결정했다고 저를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세례라는 것을 그런식으로 '장사'해도 된다는 뉘앙스로 세례팔이를 한 주체가 더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면죄부를 팔아치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죄가, 무지몽매하고 신학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갑다 하고서 면죄부를 사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용서하시는가 보다 하면서 면죄부를 순진하게 돈을 주고 산 문맹 유럽 평민들의 죄보다 큰 것 처럼요.
무엇보다도, 만약 해당 군종교회가 세례의 의미에 대해 엄중히 말씀을 전하면서 심사숙고해서 결정하라고 했다면 비록 세례에 대해 잘 모르는 저였지만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코파이 하나가 크긴 하지만, 당시의 저는 부족하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이 마음에 중심이었고 그런 의미를 다 알고 나서는 그렇게 가볍게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군종교회에서는 세례를 받는 인원 수가 늘어나는 것을 자신들의 실적처럼 했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크게 듭니다.
너무너무 아쉽습니다. 이제는 제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서서 다시 제 스스로의 '선택'으로 세례를 받고 신앙고백을 하고 싶은데 비가역적인가요?
2. 같은 논리로, 유아세례 역시 저는 아이가 생긴다고 해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세례에 대해 이렇게 깊게 고찰을 하고 나니, 자기 의식도 없는 내 아이에게 '세례팔이'를 시킬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이 들더라고요. 유아세례를 성행하게 하는 것에 제 자신이 일조하는 것이 마치 면죄부팔이에 일조하는 느낌이고요. 신앙이 신실한 교회 내 한 성도가 어떠한 신앙적 세레모니를 하는 것 자체가 타 교인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이 되면서 두렵더라고요. 바울이 우상숭배 고기를 다른 이의 넘어짐을 생각해 먹지 말라고 권고한것 처럼, 제가 아름답게 신앙생활을 하는데 저의 유아세례를 보고 저를 흠모하는 누군가가 멋도 모르고 그게 옳다고 생각해서 또 그 사람의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종행하게 하는 악영향을 줄 거 같아서요. 제가 뭐 대단히 모범적인 신도가 아닐 수도 있고 그렇지만 혹시나, 혹여나 단 한 명의 제 교회의 신도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런 영향을 끼치고 연자돌에 목매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 큰 부분은, 유아 세례를 받은 자녀가 자라고 가치관이 형성되면서, 언젠가 스스로 하나님께 고백을 하고 부모의 신앙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를 주인이라 시인하는 단계에서 저같은 감정이 들까봐 두렵더라고요. 자신은 스스로 거듭나서 성도들 앞에서 결단을 하고 세례를 받고싶은데, 자기가 의식도 없던 아기 시절에 부모가 '저질러버린' 유아세례때문에 저처럼 세례를 거부당하고 분노할까봐 두렵습니다.
적다보니 1번은 질문은데 2번은 질문이 아니네요
사실상 1번에 대한 답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1번에서 가역적으로 제가 다시 세례를 받을 수 있다면 2번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제 아이도 다시 세례를 또 받으면 되니까요.
제가 다시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는 건가요?
유아세례를 꼭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하는 교단도 있고 안하는 교단도 있고 같은 교단 내에서도 개인의 신앙관에 따라 입장이 다 다를 것이고, 결론적으로 이런저런 면을 따져보고 뜻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세례라는 것이 결국 거듭나고 회심한 교인이 그러한 자신의 마음 속에 피어나는 믿음을 고백하고 입으로 시인하면서 성도들 앞에서 '선포'하는 행위라고만 본다면, 유아세례를 거부하시겠지만, 유아세례를 부모와 교회가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고 키우겠다는 공동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긍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부모나 타인이 세례를 주는 것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반대로 개인이 스스로 세례 받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니까요.
이미 worship님과 낭여님이 정답을 달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7:19) 이미 세례의 뜻을 정확히 알게 되었으면 굳이 다시 침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선한 의도는 좋지만 삶에서 그 뜻대로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한국에서 장로교 합동측 교회를 섬기며 세례를 받았으나, 미국 이민 와서 유학생들과 목회를 시작하면서 미국 남침례교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왕에 침례교 목회자로 사역하려면 침례를 받는 편이 좋다고 해서 목사 안수 위원이셨던 목사님에게서 회중 없이 제 혼자서 침례를 다시 받았습니다. 그 의식이 중요하거나, 제 믿음의 고백을 받았다는 인증의 의미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침례를 받지 않고서 교인들에게 침례를 가르칠 수는 없으며 침례교 목회자로서 하나님께 이전의 일반 신자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충성 헌신하겠다는 서약의 의미였습니다.
제 같은 경우가 아니면 다시 침례 받을 필요는 (전혀) 없으며, 침례교단이 아닌 이상 다시 침례를 주지도 않습니다. 종교 개혁 당시 유아세례는 아무 효력이 없기에 거듭난 후에 다시 침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재침례교(anabaptist)가 이단으로 몰린, 그 원인에 대해서 설왕설래가 있지만,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성경이 심령의 할례(성령의 세례)가 더 중요하고 나아가 그런 의식보다는 주님을 실제로 따르는 삶이 우선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현재 행해지는 유아세례는 태어난 아이가 믿음의 공동체에 일원이 된 것을 기념 축하하고, 부모가 그 아이를 말씀 안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신앙교육을 잘 시키고 스스로 삶에서 믿음의 올바른 본을 보일 것이며, 그 아이의 일생을 하나님의 의로운 인도에 맡긴다는 의미로 행합니다. 그 세례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유아세례는 교회가 신생아 부모에게 서약을 받으며 아이에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기에 지금도 아주 의미 있고 필요한 의식입니다. 침레교에선 이전의 구원과 연결되는 가톨릭적인 의미를 없애려고 유아 세례라는 용어 대신에, 아이를 하나님에게 바친다는 뜻으로 헌아례(獻兒禮)라고 부릅니다.
스무살에 별다른 뜻 없이 세례(침례)를 받았지만 지금이라도 참 의미를 알고 매일 하나님 말씀을 살아내려는 노력을 하고 계시다면 구태여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저의 경우 성인이 되기 전 하나님을 믿고 싶지만 믿기지 않아서 온전한 믿음이 없었을 때 세례를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Baptism의 원어 의미를 알고 나선 그 원래 의도와 동일한 형태로 침례를 받고 싶어서 침례를 결국 받긴 했는데요, 목회자마다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예수님 우편의 강도가 세례나 침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을 믿어 낙원에 간 것 처럼, 왠지 모를 후회가 들어도 굳이 받으실 필요까진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