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어제 예수님을 믿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중 이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어떤이는 토해내는것이 구원의 취소를 말하고 저는 정확한 뜻은 모르지만 주님의 자녀에게 말씀하신거라 구원과는 다른 의미로 알고 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 믿고 있습니다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 인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하셨는데 말씀이 궁금합니다
성경을 읽을때 전체 문맥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해석조차도 저는 힘이 듭니다..
목사님 위의 말씀 해석을 부탁드려도 되는지요..?
"나는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신 말씀에 이어 차지도 덥지도 않음을 책망하신 예수님의 편지는 자칫 우리에게 적극적인 태도나 이성적인 행위를 촉구하는 것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냉철한 이성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구분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권면으로 신자들이 쉽게 생각해버리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신앙과 불신앙,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오래된 편견 때문입니다. 교회 출석 여부로 믿음을 분별하고, 입으로 하는 고백으로 구원여부를 판단하는 잘못된 신앙의 관행이 찬 믿음과 뜨거운 믿음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해석을 하게 한 것입니다.
먼저, "구원 받았다"는 오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만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당신의 아들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 편에서는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의 일입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언제나 현재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시공간에 갇혀 있는 우리의 처지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습니다. 실제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여전히 어둡고,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순간들을 살아갑니다. 구원받았으므로 언제나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어둠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는 믿음을 오해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푯대를 향하여 날마다 나아갈 뿐입니다. 푯대는 다른 것이 아니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달린 바로 그 자리까지 가고 또 가는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찬송을 부르며 전세버스로 우아하게 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살점이 뜯겨나가고 뼈가 상하는 채찍질을 묵묵히 감내하며, 모욕과 수치 가운데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것입니다. 부활에 참예하는 길은 그 길 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지 않고도 '구원 받았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 길을 가지 않고도 예수와 함께 죽었고, 또 그 분과 함께 부활했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예수가 우리 대신 모든 고난을 겪었으니 우리는 감사하기만 하면 된다고 편하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는 푯대를 향하여 가야 합니다. 쉽고 편한 길은 없습니다. 넓고 평탄한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만을 원하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신자의 길은 좁고 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함은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그들의 어정쩡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난지 며칠 되지 않아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사를 지냈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뒤에도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면서 동시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막론하고 수많은 산당을 지어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낸 많은 선지자들이 목숨을 걸고 책망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일깨웠지만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다만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특별히 악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바로 그런 이스라엘임을 가르쳐 줍니다. 성전에서 제사 지내고,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랑하던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거짓 믿음은 참 믿음인 예수님이 오시자 그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이사야 29장13절) 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자 참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립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로 그 유대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처지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는 단어의 교리적 정의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취소가능여부에 진리가 좌우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구원한 민족이었고, 스데반은 자신의 조상들을 광야교회라고 표현했지만, 애굽에서 나온 세대 중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 성전제사와 율법, 아브라함의 혈통과 몸에 새긴 할례의 표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구원자가 왔지만 끝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안심하기 이전에, 구원의 확신을 자랑하기에 앞서, 나는 과연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어 오직 하나님만을 원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진리를 참으로 원하는 자에게만 성경은 비밀을 드러내고, 말씀은 생명이 됩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만 아버지께서는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꽃보다 준님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성경공부에 열심인 모습이 보기 좋고 참 감사합니다. 흔히들 잘못 혹은 부족하게 가르쳐지고 있는 구절에 대해 질문 주셨네요. 답변 준비되는 대로 성경문답 사이트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