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결혼 지참금 때문에 자살한 세 처녀 (마11:20-24)

조회 수 2355 추천 수 95 2004.12.07 06:46:59
마태복음 강해 (129) 12/05/2004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찐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찐저 벳새다야 너희게에거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 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신경질을 내며 분풀이 하신 예수님

성경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생애를 기록한 책이 복음서라는 이름으로 네 권 있다. 그리고 각 책의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포커스와 책을 읽는 주 독자층을 조금씩 다르게 하여 기록되어 있다. 지금 우리가 살펴 보고 있는 마태 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구약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사상적 종교적 배경과 연결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저자 마태는 간혹 사건의 발생 순서와 관계 없이 동일한 주제의 사건을 같이 모아 기술하는 경우가 있는데 본문이 그렇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사역 후반기 변화산 사건이 있은 후 70인 제자를 파송 하실 때에 하셨다. 마태복음에 변화산 사건은 17장에 가셔야 기록되어 있는데 시간적으로 하자면 그 뒤에 있어야 할 내용이 지금 11장에 앞당겨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동일한 주제이기에 함께 묶어 놓았는가? 마태복음 11장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 한 것으로 시작하여 지난 주 배운 아이들의 장터 놀이 비유까지 한결 같이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의문을 가진 것에 대해 예수님이 직접 변증한 것이 그 내용이었다. 본문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권능을 많이 베푼 고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메시야 되심을 더 못 알아 본 것에 대해 책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단순히 꾸짖은 정도가 아니라 어떻게 보면 꼭 삐쳐서 신경질을 내며 막말로 저주를 퍼부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야단 친 내용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종교적 사고와 상식과는 전혀 반대이기에 억지를 부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은 고라신, 벳세다, 가버나움의 유대 세 도시를 책망했다. 셋 다 예수님이 사역하셨던 주무대인 갈릴리 호수 주변의 마을이다. 특별히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사역 본부 격이었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병을 고치는 은혜를 가장 많이 베푼 곳들인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으므로 야단맞은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도시랑 비교했는가? 두로와 시돈과 소돔이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의 무역항으로 바알 우상을 숭배하는 페니키아의 이방도시다. 성경에는 불신 세상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될 것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예언까지 받은 곳이다. 소돔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죄악의 도성이었다.

본문의 내용을 오늘날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예수님이 얼마 전에 있었던 빌리 그래함 목사 집회처럼 기독교 국가인 미국 LA Pasadena의 Rose Bowl에서 부흥 집회를 통해 말씀을 가르치고 그 자리에서 병을 고쳐주는 이적을 많이 일으키셨다. 마지막에 “자! 이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기 일생을 그 분께 완전히 의탁할 사람 앞으로 나오시오”라고 초대의 말씀으로 결단을 촉구했지만 나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집합소인 알카에다 테러 본부에서 이런 집회를 했더라도 너희보다는 훨씬 더 잘 믿었을 텐데… 이 몽땅 지옥에 가서 저주 받을 놈들아!”라고 하신 것과 같다.    

물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디까지나 비유이기에 과장 된 표현이 포함되었을 수 있다. 또 정을 많이 준 사람이 배반하면 더 실망하는 법이라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삐쳤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심한 것 같지 않는가?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었으며 율법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던 자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당신께서 심판했던 소돔과 비교하여 소돔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소돔도 구원 받을 수 있다.

성경을 볼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이 야단치고, 분노하고, 슬퍼하시고, 우시는 등 인간적 감정이 강하게 실린 부분들은 따지고 보면 당신 나름대로 어떤 것을 굉장히 안타까워하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꼭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믿음의 더 깊은 내용이 반드시 내포되어 있다.

본문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그렇게 죄 많은 소돔도 얼마든지 구원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 신앙은 사람이 도덕적인 죄악을 고치고 선해지는 것과는 일차적으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과 모순, 상치, 충돌, 반대된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더 고급하고 심오한 도덕을 가르친다는 단순한 의미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도덕을 넘어 서는 영역을 다룬다. 도덕과 전혀 다른 사상이나 철학을 취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의 도덕과는 관점과 차원이 전혀 다른 도덕을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 관습, 제도, 도덕이 도저히 취급할 수 없는 부분을 다루는 도덕이다.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거나 다른 종교에서 가르치는 도덕은 인간의 도덕이라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덕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원수도 불쌍하니 사랑해 주어라, 인간끼리 미워하지 않는 일이 선한 일이므로 그렇게 하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사람끼리 서로 원수가 되었다는 것은 한 쪽에서 억울하게 일방적으로 당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쌍방이 다 잘못한 것이다. 원수 쪽에서도 나를 미워할 이유와 명분은 충분히 있다. 원수 쪽에서 보면 나도 그 사람에게 원수이긴 마찬 가지다. 서로가 원수로 삼을  근거는 밤을 새워 싸워도 모자랄 만큼 둘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논리는 항상 상대적이요 자기 중심적이다. 아무리 인격과 품성이 뛰어나도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편견, 선입관, 고집이 개입되어 있고 불완전한 정보와 지식에 근거하여 판단 내린 것이다. 절대적 진리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그런 논리적 모순, 편견, 왜곡을 뛰어넘고 없애고 깨끗하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이해관계도 얽히지 않고 개인의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이 조금도 개입되지 않으며 사기, 거짓, 조종, 강제, 술수가 전혀 포함되지 않은 예수님의 사랑만이 그럴 수 있다. 인간이 겪는 모든 흠집과 상처는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그 치유책이다. 그런 사랑이라야만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랑을 받은 자는 원수라도 변화되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항복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원수를 대하는 기준은 어떠한가? 원수는 끝까지 원수로 남는다. 100% 잘못한 쪽은 어디까지나 원수다. 용서하기 전이나 이후나 그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다. 어떤 인격자의 경우도 예외가 없다. 불신자도 원수를 용서하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 사회에선 단지 용서해준 사람의 점수만 올라갈 뿐이다.

김정일 정권이 갑자기 무너져 북한의 주민들이 그를 밧줄에 묶어 평양 시내를 끌고 다닌다 해도 절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적으로는 정의의 행동이요 도덕 점수로 따져도 50점 정도는 된다. 원수에게 당했던 앙갚음만 안 해도 75점 이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 원수는 아예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서 지워 나가며 도리어  수양의 기회로 바꾸면 분명히 90점 이상을 받는다. 원수를 용서하면 완전히 A 플러스요 100점 만점이다. 거기에 간혹 사랑까지 하면 세상에선 완전히 성자 대우를 받는다. 그래도 여전히 용서해준 사람만 승리한 것이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은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한다. 인간끼리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도 아니요 누가 더 인자한가를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인간끼리 시기, 질투, 반목하며 미워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한다. 우리 모두를 지으신 그 분의 마음이 안타깝다 못해 아프다. 형제들이 싸우는 것을 보는 부모는 누가 잘했든 못했든 같은 피를 나눈 형제끼리 싸운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가슴은 찢어지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소돔과 방불 하는 죄악의 성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 했을 때 인간 요나는 왜 그런 악한 자들까지 용서해야 하느냐 반발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고 하셨다. 소돔을 유황불로 멸망하기 전에도 마지막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자신의 사자들을 보냈다.

절대적 선이자 사랑이신 그 분은 인간이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 아래 눌려 신음하고 있는 것을 절대 그냥 두고 보시지 못한다. 너무나 불쌍해 그 분의 가슴이 터진다. 신자도 그 분의 성품에 참예한 자(벧후1:4)가 되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원수마저 동참시키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동일하게 품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의 원수 사랑은 용서하고 사랑해 준 사람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다. 신자와 원수가 동시에 승리하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win-win 게임이다. 나아가 신자는 수모와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 심지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생명을 바쳐서까지 원수를 살린다. 원수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것이 최종적인 목적이다. 예수님이 단순하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분명히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해주라고 하셨다.(마5:44)
        
3 D 입체 그림 같은 진홍 장미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도덕과 다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소돔이 가버나움보다 구원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인간이 무슨 죄를 지어도 상관하지 않으신다는 뜻은 그 속에 전혀 없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으로 인간의 죄악을 무시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제가 아침 마다 산책하는 길의 어떤 집 정원에 장미 몇 그루를 아주 잘 길러 항상 탐스럽게 꽃이 피어 있다. 분홍, 흰색, 노랑 등 색색이 있는데 그 중 붉은 장미가 가장 눈에 확 뜨인다. 흔히들 최고로 붉은 색을 피 빛같이 붉다고 표현하는 바로 그 진홍색 장미다.

색깔이 강렬하니까 당연히 눈에 잘 띄지 하고 쉽게 넘길 수 없는 것이 볼수록 신기하기 때문이다. 그림 같이 붉다. 그것도 배경은 희미하지만 특정 대상만 툭 튀어 나와 보이는 3차원의 입체 그림 같다. 다른 색깔의 장미는 평면에 그린 그림이라면 진홍 장미만 살아 숨쉬는 것 같다. 그것도 꽃 한 송이 송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송이 안에서도 꽃잎 하나하나가 그럴 정도로 그 윤곽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느낌을 제대로 말로 정확하게 전달 못하겠지만 어쨌든 눈에 다른 꽃은 안 들어오고 진홍 장미만 보일 정도로 선명하다.

이사야서 1:18절로 가보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모든 인간의 죄가 바로 피 빛처럼 붉은 진홍이요 주홍 같다고 한다. 인간끼리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 눈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각인된다.

당신이 지으신 전 우주와 모든 피조물은 평면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유독 인간의 죄악만은 3D 입체로 보이신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소와 나귀도 임자와 주인은 안다.(사1:30) 화초와 짐승은 창조주의 섭리를 거스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오히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 말하자면 자기 부모도 몰라라 외면하고 배반하는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추악한 죄를 지었다. 단연 그 분의 눈에 뛸 수 밖에 더 있는가?

그런데 그런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지으신 궁극적인 목적을 인간에게 두셨다.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인간이다. 부모가 집 나간 탕자를 자나깨나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처럼 어쩌면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을 유일한 대상이 인간이다. 그래서 죄에 빠져 있는 인간이 하나님의 시야 전부를 가리고 있다. 나아가 진홍의 장미가 송이송이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송이 안에 붙어 있는 꽃 잎 하나하나마저 뚜렷하게 보이듯이 모든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분 앞에 죄인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이 지은 모든 죄도 3D 입체 그림으로 보고 계신다.      

그런 하나님이 지금 뭐라고 하셨는가? 오라 변론해 보자고 하셨다. 그렇게 진홍 같은 죄를 깨끗케 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인가 한 번 서로 토론해보자는 것이다. 분명히 ‘희어질 것이요’ 또 ‘양털 같이 되리라’고 수동태로 말씀하셨다. 인간 스스로의 공적과 선행으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밖에서 어떤 힘이 가해져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깨끗케 하는 행동의 주체는 따로 있다.

이 말씀 앞의 이사야 1:9에도 어떻게 되어 있는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 모두 소돔 같이 멸망했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 당신의 자비에 달려 있을 뿐이다. 거꾸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면 소돔과 고모라도 구원 받을 수 있다.

몽땅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자다. 피빛 같이 붉은 진홍의 죄악을 마치 피칠갑 하듯 덮어 쓰고 있다. 그 죄는 십자가에 흘리신 독생자 하나님 예수님의 피로 씻지 않고는 절대 희어질 수 없다. 이 진리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평생을 두고 교도소는커녕 파출소 문 앞에 간 적도 없다는 것만으로 인간이 절대 의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가장 가까워야 할 친구, 친척, 형제 심지어 부모마저 담을 쌓고 원수로 지낸다. 겉으로 그런 적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건 하나씩 따지면 마음으로는 셀 수 없이 그렇게 했다. 세 치 혀로 자기보다 사회적으로 열등한 사람을 완전히 묵사발이 나도록 깔아 뭉개고 그 시체 위에 신나게 자신을 자랑한 일은 도저히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음 속으로 간음하고 살인한 것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 열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턱 없이 부족하다.          

도덕 윤리적으로 따져도 추악하고 더러운 냄새가 진동해 도저히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 앞에 설 수조차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그런 윤리적 죄악보다 더 문제 삼으시고 더 못 참으시는 죄는 따로 있다.

인도에 딸만 일곱을 둔 칠 공주 집이 있었다. 그런데 큰 세 딸들이 줄줄이 자살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부모가 감당할 결혼 지참금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서 그랬다. 인도에는 지금도 일년에 수 천명의 처녀가 이런 일로 자살한다고 한다. 부모님과 동생들의 어려운 처지를 생각하여 자살한 그들은 인간 세상에선 도덕적으로 가장 의로운 자로 칭송 받고 옛날 같으면 나랏님의 효녀상 감이다. 인간적으로도 동정이 가고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시기에는 과연 어떨까? 죄송하지만 인간식으로 표현하자면 완전히 분통이 터져 오히려 하나님 당신이 확 죽어버리고 싶을 것이다.  “내가 너희 일곱 자매를 세상에 보낼 때에 얼마나 심히 기뻐했는지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 일곱 자매가 서로 양보하고 희생하며 사랑하면 얼마나 아름답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아느냐? 기껏 그래 사회적인 체면과 위신 때문에 내가 그토록 준비해서 단 한 번밖에 허락하지 않은 그 고귀한 생명을 너희 마음대로 끊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자살했다는 이유만으로 야단 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너희들에게 과연 무엇인가? 너희들 삶과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또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나를 이웃 집의 강아지 취급도 하지 않지 않느냐? 내가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까지도 참아 넘겨 주겠다. 어차피 십자가에 내가 죽지 않고는 너희들을 그 죄악에서 구원해 낼 수 없으니까. 그런데 너희들 덕에 결혼하게 된 네 동생들은 세 언니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이 평생의 멍에가 될 것이 아닌가? 사람들로부터 살인자로 손가락 질 당할 것이며 그렇게 한 결혼에 도대체 어떤 진정한 의미가 있겠는가? 동생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너희들의 죄악을 뒤집어 써야만 하느냐?”

인간이 자랑하고 실천하는 도덕은 오직 자기 자랑이요 자기 증거다. 그 곧은 머리를 어디까지 높이 쳐드는가 하면 하늘까지다. 예사로 “나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말한다. 과연 그 말이 뜻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교만한 말이며 큰 죄악이 되는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 말 안에 벌써 최고로 치졸한 자기 자랑이 담겨 있지 않는가?

“나는 그런대로 착하다. 또 얼마든지 착할 수 있다. 착한 자가 천국 가야지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는 왜 죽느냐? 나하고 예수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도리어 목청을 돋구며 따진다. 진홍 같은 죄악 속에 파 묻혀 있다 보니 스스로 그 강렬한 피빛에 눈이 멀어 자신의 죄악의 색깔이 얼마나 붉은지 아예 처다 보지도 못한다.      

본문 23절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가버나움아 네가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네 스스로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 치느냐?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율법대로 제사를 지내고 입술로 주여주여 한다고 그럴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지 말라.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대신에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인간의 도덕 기준으로 따지면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이 분명히 두로와 시돈과 소돔보다 월등히 낫다. 그래서 자기들은 스스로 천국 갈 수 있을 만큼 선하다고 자신했다. 그것도 자기들 같이 선한 자들이 아니고는 천국 갈 사람이 없다고 자랑했다.

또 예수님이 오셔서 도저히 인간으로 취급할 수도 없는 죄인, 세리, 창녀 같은 자들과 식사하니까 예수님을 배척해 버렸다. 그것도 당신의 메시야 됨을 충분히 인정하고도 남을 만큼의 이적과 은혜를 가장 많이 베풀어 주었는데도 그랬다. “당신 메시야 맞소? 맞다면 번지 수를 잘못 찾아 다니는 것 아니요? 우리부터 등 따시고 배 부르게 해 주어야 할 것 아니요?”라고 의심했다.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구원의 기준마저 자기들이 정하겠다고 설쳤다.

기독교 신앙의 참 본질

기독교 신앙이 도덕과 무관하다는 또 다른 의미는 도덕적 선으로는 인간 중에 어느 누구도 만점 받을 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덕으로 따져도 모두 카트라인에 훨씬 못 미치는 낙제자들이다. 그럼 하나님의 도덕으로는 빵 점인가? 아니다. 마이너스로 무한대의 점수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배반하다 못해 저주까지 했다.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였다. 또 세상의 도덕이라는 것 자체도 지금껏 살펴 본 대로 거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 없다. 그 속에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의 진리가 없으며 십자가 예수님의 절대적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불신자들 가운데도 드물긴 하지만 진심으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자가 있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별다른 사심(私心)과 자기 자랑이 없더라도 여전히 사랑한 자의 의만 남고 그 사랑의 상대가 된 원수는 생명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도덕만 있지 참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참 생명은 그 근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 인간이란 존재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이는 하나님뿐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간끼리의 사랑은 절대 완전해질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예수가 없는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떤 존재로 지으셨는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시는지, 어떤 신분으로 바뀌어지길 원하시는 지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전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신 반면에 그 진홍 같은 죄악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실 만큼 저주하셨다는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어떻게 다루셨는 지에 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소돔이 가버나움보다 구원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뜻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것 만큼 더 큰 죄는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의 정체성을 못 알아 준다고 분풀이 하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정죄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으로 채우시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게 보존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셔서, 당신의 피로 구속 곧 그 죄 사함을 거저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덕으로 마이너스 무한대였던 우리를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며까지 플러스 무한대로 바꿔 주시겠다는 것을 거부했다. 아니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싫어 했다. 그 까닭은 마이너스 무한대 쪽이 훨씬 재미있어 그쪽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버나움은 말하자면 입술로는 주여주여 했을지 몰라도 자기 평생에 단 한 번도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그 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고 항복한 적이 없는 자를 말한다. 자기가 정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자백해 본 적도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자기 인생의 방향을 바꿔 보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있을 리 없다. 이런 자가 어찌 심판 날에 소돔보다 그 벌이 적으리라고 감히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영국의 신학자 프시도가 죄와 믿음에 대해 이런 정의를 내렸다. “죄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거스리는 것이다.” 세상의 도덕을 위반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 “은혜란 죄를 다루신 하나님의 거룩한 행위다”라고 했다. 기도해서 응답 받고 현실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 은혜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인치심을 받은 것이 신자가 누리는 참 은혜이자 은혜의 전부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는 그 거룩하심의 승리다”라고 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성공해도 실제 그 인생에 완전한 승리가 없다. 현실적으로 풍요해도 그 영혼은 항상 진정한 평강에 갈급해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믿음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배하는 것이다”라고 결론 지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에 참석하는 종교행위나, 신자의 굳건한 의지든  하나님의 도우심이든 큰 일을 이루거나 환난을 이겨내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다. 사탄의 종이었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바꿔 주신 그 거룩하심을 평생토록 어떤 상황 하에서든 찬양하는 것이 믿음이다. 기도, 성경공부, 예배, 전도, 선교, 인내, 봉사 그 모든 것들은 다 신자가 예수님을 경배한다는 증거일 뿐이다. 신앙생활의 모든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하는 것이며 또한 그 분을 찬양함 없이 어떤 선한 일을 해도 여전히 인간적인 껍데기 뿐인 의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며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자는 예수를 통해 십자가에서 죽었다 다시 산 신자 뿐이다. 우리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애끓는 심정으로 죄인된 우리를 구원해주셨던 그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시기에 가능하다. 신자만이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지으셨던 당신의 형상대로 회복된 자다. 이 바뀐 신분, 위치, 소속, 특권 만으로도 주님을 평생 찬양하고 경배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의 현실적 상황이 어찌하든 말이다.  

사라의 웃음

2011.10.02 10:44:15
*.161.100.136

추천
1
비추천
0
모든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또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기의 괜찮음을 내세우는
너무도 끈질긴 것들이 잔뜩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우리의 보이는
죄악 보다 더 추악한 죄악인 눈에 보이지 않는 끝없는 이 죄악을 토설하고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할 부분임을 발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앞에 머리 조아리며 은총을 구합니다. 자기 자랑, 자기 의가 수시로
튕겨져 나오는 이 죄를... 십자가 아래 그 피로 이 붉은 죄를 덮어 주십사....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결혼 지참금 때문에 자살한 세 처녀 (마11:20-24) [1] 운영자 2004-12-07 2355
85 왜 불신자는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하는가? (마11:13-19) 운영자 2004-11-30 2535
84 하나님 실수하신 것 아니에요? (마11:7-12) [3] 운영자 2004-11-16 2926
83 잘 믿는데도 왜 삶은 자꾸 꼬여 가는가? (마11:1-6) [1] 운영자 2004-11-10 2759
82 베드로의 맹세는 지켜졌다. (마10:40-42) [2] 운영자 2004-11-01 2726
81 기독교는 분리적이어야 한다. (마10:34-38) [2] 운영자 2004-10-26 2013
80 기도에는 두 종류 뿐이다 (마10:29-33) [1] 운영자 2004-10-19 2146
79 “And Then?”의 인생 철학 (마10:28) [1] 운영자 2004-10-13 1718
78 하나님의 해결책을 포기하라 (마10:26,27) [2] 운영자 2004-10-05 2006
77 핍박을 피한 가짜 몰몬교인들 (마10:24, 25) [2] 운영자 2004-09-28 1755
76 아인슈타인의 이유 있는 불평(마10:21-23) [1] 운영자 2004-09-21 2151
75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없다 (마10:16-20) [2] 운영자 2004-09-14 2380
74 저주하며 편을 가르신 예수님 (마10:11-15) [1] 운영자 2004-09-07 1581
73 세계에서 가장 급성장하는 종교 (마10:5-10) [2] 운영자 2004-08-31 1494
72 신자가 누리는 참된 특권 (마10:1-4) [3] 운영자 2004-08-24 1904
71 단장의 미아리 고개(마9:35-38) [1] 운영자 2004-08-17 2279
70 수호천사로 전락한 예수님 (마9:32-34) [2] 운영자 2004-08-10 1998
69 원정 출산을 막으시는 하나님 (마9:27-31) [1] 운영자 2004-08-02 1972
68 일기장을 거꾸로 적어 가는 믿음 (마9:18-26) [2] 운영자 2004-07-27 2479
67 철저하게 형식을 지키신 예수님 (마 9:14-17) [2] 운영자 2004-07-20 1836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