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94) 2/8/2004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는 이마다…
저는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을 때 국어 공부하듯이 문법적으로 잘 따져 보라고 항상 강조한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절한절을 천천히 앞 뒤를 연결해서 정확한 뜻을 분석해야 한다. 성경을 지식적으로 습득하라는 뜻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신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 한 두개만 골라 별로 묵상도 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떠 오르는 생각으로 해석해 버리는데 그렇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본문의 어느 구절에 초점을 맞추었고 어떻게 해석했는지 제가 알아 맞추어 볼까요? 아마 틀림 없이 7절과 11절 끝부분에만 신경을 써서 읽고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해석했을 것이다. 맞다. 그런데 읽기는 분명히 그렇게 읽어 놓고 이상하게도 머리 속에 입력할 때는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은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로 그 뜻이 바뀌어 버린다. 아무리 두 눈을 닦고 보아도 그런 뜻을 발견할 수 없다.
오늘은 정말 본문을 국어 공부하듯 철저하게 한 번 따져 보기로 하자. 돌을 구했는데 떡을 준다고 한 적이 없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다. 떡을 구하면 돌을 줄 리는 없다고 했다. 나아가 8절에선 “구하는 이마다, 찾는 이가, 두드리는 이에게”라고 했지 구하는 것, 찾는 것, 두드리는 것마다라고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신자에게 기도라는 행위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신자가 기도하면 당연히 구하는 이가 된 것이 아닌가? 꼭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몇 시간씩 기도해야 하거나, 구하는 내용도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영적으로 신령한 것이라야만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기도하는 이가 되는 것이 정해진 양식, 절차, 시간, 내용을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이슬람은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기도한다. 바리새인들도 하루 세 번씩 성전에 가서 기도하며 성전에 올라 가다가 기도시간이 되면 길거리나 시장 어귀에서 기도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종교적 의무감으로,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 기도한 것이지 기도하는 이가 된 것은 아니다. 신자라면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이건 무엇이라도 간구하면 된다.
감방에서 보내 온 쪽지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 봐야 할 구절은 9-11절의 예수님의 비유다. 그 내용이 참 흥미롭고 오히려 이런 부분에 더 큰 은혜가 숨겨져 있다.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반문하신 배경이 무엇이겠는가? 신자들 가운데 하나님을 그렇게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모든 신자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뱀을 주리라곤 꿈도 못 꿀 정도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이런 말씀을 하셨을 리 없다.
여러분은 어떤 긴급한 사건, 중요한 문제, 꼭 해결해야 할 오랜 숙제들을 금식하며 작정하여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태가 더 악화된 적이 없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생선을 달라고 했는데 왜 뱀을 주시지라고 의심해 본 적이 없는가? 이런 의심을 뒤집어서 풀이 하면 기도하고 금식했다면 당연히 문제가 해결되거나 상대가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인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들의 그런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하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과 은혜를 받아내는 수단과 방법이 아니다.
본문에 드러난 예수님의 뜻은 신자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 세상의 악한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취급하지 않고 못 믿는다는 것이다. “천하의 흉악한 강도, 살인범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만은 필요한 것 공급해 주고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너희를 그런 사람보다 못하게 대우할 것 같은가? 제발 진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먼저 되어야지 왜 자꾸 구하는 것마다 더 좋은 것으로 주지 않는다고 의심하고 불평하느냐? 그래서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 하나님과 신자 사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꾸중이다.
대부분의 신자는 언제 기도하는가? 긴급하고 큰 일이 생겨야 그것도 겨우 쥐꼬리만큼 기도한다. 그러고선 왜 내가 기도한대로 빨리 응답이 안 돼지 불평이며 생선을 달라 했는데 뱀을 주시나 의심한다. 마치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돈을 낭비하고 밖에 나가 제 멋대로 방탕하게 사고 치다 경찰서 감방에 잡혀 들어가자 그 때서야 집에 연락해 빨리 돈 싸 들고 와서 자기를 빼내달라는 경우와 같다. 나아가 미처 제 때에 빨리 오지 않자 거꾸로 부모더러 고함치며 야단치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한다는 것 또한 기도가 만병통치약 같은 해결책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응답은 우리가 기도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기도라는 행위를 하기 이전에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먼저 올바른 부자 관계로 맺어져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온전한 믿음만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수단이자 방법이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통과하는 통로일 뿐이다.
완전한 비유가 아니지만 기도란 이런 것이다. 사고 쳐서 감방에 들어간 아들이 셀폰도 압수 당하고 외부와 연락이 차단되자 먼저 석방된 친구에게 “아버지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고 보석금을 갖고 와 제발 좀 저를 이 감방에서 빼주십시오”라고 종이에 적어 전해 달라고 부탁한 쪽지가 기도다. 아버지가 그 쪽지를 보고 쪽지 자체에 신령한 능력이 있거나 그 적은 글이 아버지에게 감동을 받아 아들을 빼내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대체 이 놈의 새끼가 언제까지 이 짓을 계속하고 언제쯤 철이 들라나?” 불 같이 화를 내거나 실망에 잠기지 않겠는가? 그 글 자체가 아버지가 자식을 구해내려는 결심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자기는 아버지이고 사고친 자는 아들이라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쪽지를 전해 받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는 아들이 어떤 형편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완전한 비유가 아니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은 인간의 아버지와 달리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기 때문이다. 신자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죄와 흑암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는지, 제대로 말씀과 기도를 하는지 다 아신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문 쪽지에 대해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아무리 내용이 천박하고 투정 부리고 불평 투성이며 심지어 하나님을 의심하고 미워하는 내용이라도 신자에게서 쪽지만 받으면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축복을 예비해 놓으시고 신자가 기도하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 계신다. 참 사랑과 진정한 경외를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러 주기를 애타게 원하신다. 자기 자녀들이 더럽고 추한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고 스스로 겸비하여져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갈급하게 소원해주길 바란다. 하나님만을 자기들 인생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셔서 아버지와 아들의 진실된 관계로 회복되어지길 원하신다.
달러 빚을 내러 다니는 아버지
급한 일이 생기면 신자니까 당연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급한 일이 생겨야 기도한다는 것은 주위 환경, 여건, 사람, 세상, 죄악, 사탄이 휘두르는 대로 이끌려 다닌다는 뜻이다. 자기 인생의 개인적인 장기 목표도 없고 하나님 주신 소명에 관한 감각이 전혀 없다. 혹시 목표가 있어도 단기적 혹은 임시 방편적으로 자기 주변에 관한 일들과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그런 일들에 급 브레이크가 걸리면 기도라는 해결책만 동원할 줄 알았지 평소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안중에도 없다.
그런데 신자들이 그런 습관이 드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그런 기도도 다 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본문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세상의 악한 부모보다 나으니까 그렇다. 세상의 부모가 아들이 감방에 있다고 연락하면 십중팔구는 달러 빚을 내서라도 꺼내 준다. 정말 어쩌다 한 번 정도 자식을 일부러라도 고생시켜야지 독한 마음 먹었다가도 막상 정식 재판에 회부될라 치면 혹시라도 전과자가 될까 봐 마지막 열번 째도 구해준다.
그러나 아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감방에서 꺼내는 주지만 아들의 이런 저런 다른 요구는 들어 주지 않고 사업자금은 아예 대어주지 않는다. 갖고 가서 또 허랑방탕 낭비하다 사고칠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완전히 개과천선해서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제 할 일을 제대로 찾아서 하며 부모를 진정으로 부모 대접하게 되면 달라진다. 그 때는 금고 속에 숨겨둔 집문서, 다이아 반지를 팔아서라도 사업할 자금을 대어 준다. 사업성이 밝고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투자하는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없다. 오직 자기 아들이기 때문이다. 아들이 정신 똑 바로 차려 무엇이라도 하려고 하니 단지 그것이 좋은 것 뿐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급한 일이 생겨야만 기도하더라도 응답해주신다. 가끔 하나님도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는 경우가 있지만 인간의 체질이 진토요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결국에는 우릴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 앞에 스스로 무너진다. 또 신자가 회개하면 얼마 오래 가지 않을 줄 뻔히 아시지만 또 속는 셈치고 다 받아 주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과 제대로 된 부자 관계를 평생 단 한 번도 맺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향해 갖고 계시는 크고 신비로우며 영광스런 계획을 시작도 못해 보고 허송 세월하며 일생을 마친다. 그래도 구원은 받는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염려한 대로 천국에서 “벌거벗은 자로 발견”(고후5:3)될 뿐이다. 나아가 천국에서의 상급이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 모두 지금까지 겪어온 바 대로 한 시도 참 평안함이 없다. 급한 일이 생기면 울부짖어 겨우 해결하고 또 조금 있으면 더 크고 급한 일에 허덕이는 일을 되풀이할 뿐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두고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믿음도 없다면 아예 기도조차 하지 않는다. 최소한 하나님은 신자의 기도에 응답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급할 때는 기도한다. 그러나 믿음이 그 수준밖에 안 되니까 응답이 안 되면 항상 불안과 염려가 가시지 않고 생선을 달라 했는데 왜 뱀을 주시나 의심 한다.
이미 기도한 자의 믿음은 달라야 한다.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셨고 24시간 한 시도 빠지지 않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작업 중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좀 죄송한 표현이지만 육신의 아버지처럼 달러 빚이라도 내려 이리저리 뛰어 다니시는 중이다. 천국 곳간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시고 있다. 생선을 달라고 했는데 신자의 눈에 당장에는 비록 뱀을 주신 것 같이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 대신 신자가 자신에게 해독이 될지도 모르는 뱀을 구해도 생선으로 주신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신자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합력하여 가장 완전한 선으로 이끄실까 씨름 중이며 결국 그렇게 이루시고야 만다.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가? 아니다. 응답을 믿는 자는 응답이 될 때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응답만 기다린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는 자는 그 일에 신자의 실제 삶에서 온당하게 반응을 한다. 신자 자신이 구하는 이로 바뀌어 쉬지 말고 기도(살전5:17)하는 자가 된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기도 많이 해 복 받으라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상을 따로 더 주시고 적게 한다고 벌을 따로 더 주시지 않는다. 신자의 기도가 하나님이 문제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태드리고 응답을 더 빨리 받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하시고자 하면 하나님은 순식간에 신자의 기도와 아무 상관 없이 신자의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단 번에 해결할 수 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뜻은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왜 뱀처럼 보일까, 그 속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그런 와중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대해 쉬지 않고 지혜를 구한다는 것이다. 의심하고 불안하며 불평하는 바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혹시라도 비틀어져 신자가 응당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나지나 않을까 항상 점검해야 한다. 과연 제대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진정한 영광 속에 내 삶이 이뤄지고 있는가 계속해서 되돌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24시간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신자를 위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도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탄도 신자를 한 시도 버려두지 않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신자를 삼키려고 두루 다니며 신자의 문 앞에 웅크리고 있다. 기도를 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는 방향에서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사탄은 신자를 삼킨다. 더럽고 추한 죄악과 세상과 흑암의 세력이 신자의 삶을 순식간에 지배한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신자는 하나님과 사탄이 서로 차지하려는 대상이 되어 하늘에서 이뤄지고 있는 격렬한 영적 전쟁터의 한 복판에 위치하게 된다. 한 쪽은 의와 거룩과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시되 절대 힘을 동원하지 않고 자발적인 순종만을 요구한다. 다른 쪽은 어둠과 죄악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기 위해 온갖 재미 있고 신나는 사탕발림을 다 동원하며 최후에는 강제력까지 동원한다. 신자가 올라 가 있는 인생의 무게 추는 사탄 쪽으로 향해 있다는 말이다. 잠시만 기도를 등한히 하면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과 거룩한 빛으로부터 쉽게 멀어져 버린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일년 365일 정말 귀하고 소중하게 가꾸고 키워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좋은 것으로 주심
누가복음 11:9-13은 마태복음의 본문과 평행 되는 구절이다. 마태복음에서는 구하는 이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에선 무엇을 주신다고 했는가?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눅11:13) 기도의 응답이 더 좋은 것이 되려면 생선을 달라고 했을 때 갈비 짝을 주어야 하고 떡을 달라고 했을 때 최고급 호텔의 생크림 케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언급은 전혀 없이 성령을 주신다고 했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신자에게 원하시는 유일한 소원은 신자가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불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는 것 외에 그 분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없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왜 걱정하느냐? 악한 부모라도 다 책임져 줄줄 알거든 하물며 내가 그것 하나 채워주지 못할 것 같으냐? 그것은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매일 매 순간 성령의 충만을 구하여 나와 함께 교제하고 동행한다면 내가 네 평생을 통해 이루고자 계획하고 준비 해 놓고 지금도 진행 중인 그 영광된 길로 함께 가자. 너희가 아들의 자리에 바로 서 있다면 그로 인해 내가 기쁨을 못이길 것이며 바로 그것만이 나를 영화롭게 하는 길이다.”
영국의 복음주의 설교가이자 신학자인 로이드 존스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인식이 들기 전까지 기도하지 말라. 하나님에 대한 사고가 바로 될 때까지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인식도 하지 말라. 자동적인 기도를 하지말고 먼저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부터 하라.”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내 존재와 삶과 인생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지부터 심각하게 생각하라는 것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이 없다. 본문식으로 따지자면 “육신의 아버지를 너는 사랑하고 믿느냐? 너에게 그 육신의 아버지보다 하나님 아버지가 더 좋고 더 믿을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기도해 봐도 소용이 없다. 육신의 아버지가 죽고 없어진다면 얼마나 힘이 빠지고 괴로울 것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는 것이 그것보다 훨씬 더 슬퍼지기 전에는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네 남편, 아내, 자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더 소중하다는 확신이 들면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단 한 시도 제 생각과 제 계획과 제 능력과 심지어 제 믿음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성령님 저를 제발 혼자 버려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만이 저의 생명의 근원입니다. 호흡이 멎는 순간 제 육신이 죽듯이 기도가 끊기는 순간 제 영혼 뿐만 아니라 전 존재도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삶의 매 순간마다 있어야 한다.
긴급한 일이 생기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가장 빠르고 가장 효과적이며 가장 강력하며 가장 편한 해결책이다. 나아가 가장 정의롭고 선하며 공평하고 거룩하며 완전한 해결책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급할 때만 기도한다는 뜻은 어쩔 수 없이 기도한다는 것이다. 기도란 모든 사용 가능한 방법이 다 실패하여 최후로 꺼내는 뒷 포켓에 숨겨둔 히든 카드가 아니다.
신자는 구하는 이가 먼저 되어야 한다. 기도의 응답이 세상적 관점에서 실패든 성공이든 연연해선 안 된다. 그 보다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고 그분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일만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목표요 삶 자체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생선을 달라 했을 때 뱀을 주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절대 실패할 리 없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세상적 실패의 모습 가운데 더 풍성한 은혜가 숨겨져 있고 하나님의 완전한 성공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니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성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안 된다. 그 발견한 것에 따라 자기 삶과 인생이 반응하고 변화하여 실제로 하나님을 온전한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신자가 급할 때만 기도하는 것들도 하나님은 다 들어 주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만 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급하지 않을 때에도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만 당신의 큰 일을 이루신다. 기도하면 응답을 받아 자기 삶의 고난은 없어지겠지만 기도하는 이가 되면 소명을 받아 자기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 모두 이제 그 차이를 확실히 구별할 줄 알아 구하는 이가 먼저 되어 세상의 어떤 좋은 것보다 하늘로부터 오는 성령을 받기를 소원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