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97) 2/29/2004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우체국에서 노래 부른 오페라 가수
이태리의 오페라 소프라노 가수인 아델리나 패티가 프랑스 작은 마을로 여행을 가면서 자기 집으로 올 우편물을 그곳 우체국으로 발송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 마을에 도착해 우편물을 찾으러 가면서 모르고 신분증을 갖고 가지 않았다. 본인이 아니면 우편물을 내어 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명함을 주었으나 사진이 부착 된 확실한 신분증명서가 아니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잠간 망서리다 그 자리에서 아리아를 한 곡 부르기 시작했고 그 노래를 들은 우체국 직원이 바로 우편물을 내 주었다고 한다. 성악가가 노래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 이상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신자는 무엇으로 신자 된 증명을 할 수 있겠는가? 교회 마다 운전면허증처럼 사진을 부착하여 아무개 집사라고 교인증명서를 발급해 주어야 하는가? 그런 것 없이도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도저히 부인할래야 할 수 없는 증거로 무엇을 들 수 있겠는가? 그 답을 예수님은 본문에서 열매를 보면 안다고 말씀하셨다.
그럼 그 열매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일년간 고아원과 양로원을 방문한 횟수인가? 교회에 십일조와 주일 헌금으로 드린 금액 총액인가?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에 개근한 출석표인가? 전도한 사람의 숫자인가?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열매의 의미를 알 수 있도록 이미 본문 안에 힌트를 주셨다. 15, 16절에 거짓 선지자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 그것이다. 자칫 본문이 선지자들에게 해당된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마지막 심판이 선지자에게만 있고 평신도들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다. 또 주의 종들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고 성도들은 맺지 않아도 된다는 법도 없기 때문이다.
17절 처음에 ‘이와 같이’라고 하셨다. 15-16절의 내용이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잘 이해 시키기 위해 비유 속의 또 다른 비유로 들었다는 뜻이다. 즉 열매를 맺되 거짓 선지자처럼 맺어선 안 되며 아름다운 열매와 나쁜 열매를 판단하는 기준은 거짓 선지자의 경우에 비춰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레몬 나무와 오렌지 나무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의 특성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다. 첫째 양의 옷을 입고 위장한 이리라고 한다. “사탄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11:14)한다.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다 거룩하고 경건해진다. 싸워도 하나님의 일을 갖고 싸우고 입만 열면 주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때는 그런 싸움을 세상의 법정으로 끌고 가 서로 하나님이 자기 편이라고 우긴다. 그리고 불신자에게 하나님이 어느 편에 있는지 판단해달라고 한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겉으로 드러난 선행만으로 사람을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선한 일을 한다고 사람이 선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거짓 선지자의 또 다른 특성은 그런 위장을 하는 목적이 노략질을 하기 위해서다. 자기 이익만 채우려는 것이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딤전6:5)로 삼는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귀영화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달성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든지 선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척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교회의 직분을 맡았고 주위 성도들에게 체면과 위신이 있어 봉사를 하든가 이왕 믿은 책임과 의무감만으로 기쁨과 감사와 자유함은 전혀 없이 섬길 수 있다. 그러면서도 속 마음으로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믿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데 하나님은 왜 복을 주시시 않는가 의심하고 여전히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을 염려한다면 바로 거짓 선지자와 다를 바 하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을 역설적으로 따지자면 나무는 열매로 알 수 있지만 사람은 열매로는 알 수 없다는 말이다. 저희 집에 레몬 나무와 오렌지나무 두 그루가 있다. 한국에선 구경도 못했던 나무라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열매의 크기와 색깔이 비슷해서 그런지 나무 크기와 잎 모양도 비슷하다. 이제는 어느 나무가 레몬나무인지 오렌지나무인지 식물도감을 찾거나 전문가에게 물어 볼 필요 없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단순히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포도 나무에 사과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나무가 다르면 열매는 다른 법이다.
그러나 나무와는 달리 사람은 가장을 할 수 있는 데도 예수님은 왜 사람도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겠는가? 물론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위장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인가? 반드시 들통이 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거짓이 끝까지 통하는 법은 없다. 세상에 완전 범죄란 없다. 특별히 위장하는 목적이 노략질이므로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걸려 있는 기회가 닥치면 어김 없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정말 아주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세상 사람, 성도들, 목사를 속일 수 있다. 평생 남에게 비난 한 번 받지 않고 선하고 거룩하며 법 없이 예수 안 믿어도 잘 살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의 평생의 목표는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자기 성적표만 깨끗하게 관리하지 남의 성적표에는 관심이 없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기 관심 밖이며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자다. 그것도 노략질과 다름 없다. 설령 이 땅에선 그렇게 살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만은 절대 속일 수 없다. 끝까지 통하고 영원히 살아 있는 것은 진실뿐이다.
마누라 치마 끈만 붙들고 있는 남편
사람이 진실하면 진실의 열매를 맺고 사람이 거짓이면 거짓의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다. 신자가 신자 된 증거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 전 인격체가 신자로 바뀐 것으로 말고는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남이 나를 평가할 때는 열매밖에 보지 못하며 그 열매는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는 자기가 스스로 점검하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구원과 심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과 신자간의 일 대 일의 문제다. 마누라 치마 끈만 잡고 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만약 마누라 치마 끈만 잡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마누라는 벌거벗은 채 천국 간다. 이 땅에서도 예수 안 믿고 마누라 속을 썩이더니 마누라를 이제 그만 해방시켜 천국에 보낼 때마저 창피한 꼴로 만들어 보낸다.
그럼 여러분은 스스로 신자 된 열매를 무엇으로 점검하는가?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후에 나라는 사람 자체가 어떻게 변했는가? 제일 먼저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해야 하는가? 물론 맞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이다. 지난 주에 말씀 드린 대로 하자면 좁은 문이 열린 것 뿐이지 아직 좁은 길로 들어서 걸어 가고 있는 모습은 아니다. 죄인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아예 믿음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자다.
만약 죄인이라는 인식만으로는 신자라면 이슬람이나 다른 종교인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며칠 전 TV에 이라크의 근본주의 이슬람인 시아파가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모습이 나왔다. 어린 아이에서 노인 할 것 없이 전부 채찍이나 짧은 먼지떨이 비슷한 기구를 들고 자기 어깨, 얼굴, 몸통 할 것 없이 계속 두들기면서 줄을 지어 성전으로 들어갔다. 아마 자기는 죄인이며 그 죄의 형벌을 자기에게 가하는 상징으로 스스로 자기 몸을 두들겨 패고 먼지를 털어내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았다.
크리스찬은 달라야 한다. 나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자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흑암에서 광명으로, 죄악에서 거룩으로 완전히 옮겨진 자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 보혈로 의롭다고 칭함을 얻어 무죄 선고를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찍혀 불에 던지우지 않는다.
그런 확신이 단순히 성경 교리를 배우고 동의하고 믿으려 결단해서 생기게 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성령님의 간섭으로 예수님 당신이 내 영혼 가장 깊숙한 곳, 어둡고 침침하게 그늘지며 묶이고 매여 있던 그곳까지 찾아 오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광채를 비춰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군요. 지금까지 흉악한 이리이면서도 양의 탈을 쓰고 세상에서 노략질 할 줄밖에 몰랐던 저 같은 자도 사랑해 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나뭇잎과도 대화하는 신자
신자가 신자 된 증명은 다른 것 없다. 열매를 바꾸거나 많이 맺으려 하지 말고 나무가 바뀌어야 한다. 자신의 인생과 존재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거룩한 성자가 되거나 신령한 능력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를 영접하여 성령 세례를 받는 순간 본질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자기 존재, 자기 생명, 자기 인생, 자기 삶을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하고 정말 고귀하게 여기게 된다. 나아가 자기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모든 사물과 세상이 하나님 당신이 지으신 피조세계임을 알아 그 모두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처음으로 성령 세례를 받거나 방언 같이 성령 충만의 경험을 한 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나무 잎이나 꽃들이 살랑살랑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자기를 향해 손짓하고 웃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심지어 인사하고 말을 걸고 있으며 자기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객관적으로는 이전에 단순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구나 아니면 그냥 좀 예쁘구나 생각했던 것과 하나 다름 없는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전에는 눈길도 가지 않던 이름 없는 들꽃도 새삼 너무 예쁘다 못해 정말 귀하게 여겨진다. 평생 처음으로 꽃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도 나무 잎조차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가 하고 자기도 자신에게 깜짝 놀랜다. 자기의 본성이, 그 존재가 사랑하는 자로 바뀐 것이다.
물론 어느 사람치고 신앙과 상관 없이 자신과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불신자 시절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앞장 서 있지 않거나 남과 비교해 나은 점이 없으면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기는커녕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가득 품었다. 그런 약점들을 좀 뜯어 고칠 수 없을까 고민했다. 이 약점을 갖고 있을수록 세상살이하는 데 손해인데 성형외과에서 수술해서라도 고칠 수만 있다면 당장 고치겠다는 생각밖에 못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저주스럽고 자신을 학대하며 심지어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나님을 알고 난 자는 달라진다. 자기 허물과 약점들을 변경하고 수정하고 포기하거나 저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그럴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약점들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자 그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더 크게 늘어남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 삶과 인생에 대한 후회와 낙망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자신의 육신, 정신, 영혼 전부를 망라한 나라는 존재가 맞바꾸어 졌으며 이미 그 분의 보혈로 씻겨졌기 때문이다. 주홍 같았던 죄가 양털 같이 희어졌고 자기 이름이 주님의 손바닥에 새긴바 되었으므로 주 안에서는 자기가 보석 같이 빛나는 영혼으로 바뀌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결과 자기 삶과 인생을 아름답고 귀하게 꾸미고 싶은 소망으로 가득차며 나아가 주님의 일에 쓰임 받기를 소원하게 된다.
천국까지 같이 갈 사람
자식에 대한 사랑도 변한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그저 변호사, 의사 같이 세상에서 형통하는 직업을 갖게 할 생각밖에 없었다. 내 자녀에게서 조금 뛰어난 특기를 하나라도 발견하면 혹시 천재가 아닐까 하는 과대망상증에 사로 잡히거나, 남의 아이에 비해 조금 모자라는 점이 있으면 그저 화가 나고 짜증 투성이었다.
신자에게는 자기 자녀가 이미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부모를 통해 나눠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내 자녀에게 분명히 따로 있으며 또한 자녀의 장점뿐 아니라 그 약점도 주님은 들어 쓰셔서 영광으로 인도하신다.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기에 자녀의 인생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하며 단지 청지기로써 주님 대신에 그를 키우게 된다. 그래서 자녀를 대하는 말과 태도에 이전과 달리 주님의 사랑이 베어 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열매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남편도 얼마나 유능한가 무능한가의 기준만으로 판단했다. 한 달에 내게 갖다 주는 돈 봉투의 두께나 발렌타인 데이에 보내 주는 장미 꽃 송이의 숫자에 따라 그날 저녁 반찬이 달라지는 것은 불신자 시절에 했던 일이다. 남편의 돈을 빼내어 내가 좀 더 편해지려고 노략질하는 마누라들이나 하는 짓이다.
신자는 남편을 어떤 눈으로 보게 되는가? “저 사람과 천국까지 같이 갈 사람입니다. 내 치마 끈만 잡게 해서 이 땅에 떨어트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으로 저 사람을 대하겠습니다. 저희 부부 사이와 이 가정을 꾸려 나가는 기준, 목표, 방침 모든 것을 주님의 주권 아래 내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만을 저희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끔 세상의 유혹과 죄의 시험과 사탄의 계략에 빠져 서로 미워하고 싸울지라도 주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사랑과 긍휼을 베푸셔서 다시 세우시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은 사이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제대로 알게 된 자는 자기 인생을 새로운 사랑으로 사랑하게 된다. 주어진 모든 것들에 감사한다. 자신에게 부쳐 준 모든 사람, 사건, 여건들이 나에게 가장 적합하고 유익하며 최선의 것임을 확신하여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된다. 어제도 사랑스럽고 오늘도 사랑하고 내일은 더욱 사랑스러울 것이다.
성도들도 사랑하고 교회도 사랑하며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영혼은 더 사랑스럽다. 약점이 많아 아무 짝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던 사람도 여전히 가끔은 그 약점이 걸림돌이 되지만 주님이 그런 그도 사랑함을 안다. 또 바로 그 약점 때문에 그 사람에게 자꾸 관심이 더 가게 되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되며 결국은 사랑하게 된다. 말하자면 신자 되기 전에는 자기가 사랑할 만한 사람과 일만 사랑했지만 이제는 주님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신자가 신자 된 증명
그래서 신자 된 증명을 한 마디로 하면 어떻게 되는가? 또 당장에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해선 안 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자가 된 후에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그리스도 안에서 인내와 소망을 잃지 않는 것만이 신자의 신자 된 분명한 증거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루신 일이 무엇이며 그 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된 자가 신자다. 그래서 더 이상 자기 삶과 인생에 대한 불만과 포기와 저주가 있을 수 없다. 또 자기 존재, 삶, 인생을 더 없이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고 주님의 영광이 자기를 통해 드러나기 소원하게 되므로 얼마든지 환난 중에도 인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신자란 자기 앞에 아무리 큰 환난이 가로 막혀 있고 사방이 우겨싸임을 당한 것 같을지라도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는 자다. 이전처럼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그저 불안해 좌우로 오락가락하거나 상하로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는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어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실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과 사람이 신자를 절대 패배 시킬 수 없으며 죄악과 사탄 때문에 그 믿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날마다 새롭고도 귀하게 가꾸고 있는 소망이 약해질 수 없다.
성악가는 노래하는 사람이라 노래하는 실력으로서 밖에 증명할 수 없다. 아무리 세계 각지를 여행 다니고 비싼 옷에 좋은 차를 타고 다닐지라도 그 돈이 부모 유산이지 자기 레코드를 판매한 돈이 아니라면 성악가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란 하나님을 믿는 자다. 하나님을 믿는 실력으로서 밖에 신자 된 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소유하였기에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그 바탕 위에 실제로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선행을 이웃에게 베풀기 훨씬 이전에 자기 삶부터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자기에게 이루신 일이 완전하고 충족하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주님이 자기에게 이루신 일, 이루고 있는 일, 이루어질 일에 절대로 한 치의 하자도 없음을 확실하게 믿고 그렇게 살고 있는 본을 보여야 한다.
신자가 신자 된 증명은 오직 흔들림 없는 믿음뿐이다. 세상 사람이 갖지 못하는 평강, 위로, 자유함, 기쁨, 부요함, 풍족함, 감사, 능력을 보여줄 때 비로소 저들이 우리를 신자라 하지 않겠는가? 불신자가 신자에 비해 유일하게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믿음밖에 더 있는가? 그럼에도 식사 때마다 기도는 거창하게 해 놓고 끼니거리가 조금만 염려되어도 그저 불안해 하면 저들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당신 정말 신자 맞아? 사진 붙은 신자 증명서 있으면 좀 보여줘.”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흔들림 없는 믿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5:2절에서 본 바 대로 환난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해야 한다. 신자란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자다. 어제, 오늘, 내일을 다 사랑하는 자가 신자다. 어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원 받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오늘을 사랑하는 것은 현재 어려운 일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내일을 사랑하는 것은 비록 지금 환난 중에 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정금으로 바꾸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기필코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어제는 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하는 것이다. 오늘은 내가 어려운 일을 인내하며 기도로 모든 연단과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다. 내일은 소망을 잃지 않고 더 귀하게 가꾸며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을 바라며 즐거워 하는 것이다.
신자가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할 때에 좁은 문이 열리어 구원을 받는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그 후에는 매일 주님과 성령 안에서 교제하면서 좁은 길 위를 동행해야 한다. 모든 환난을 주님의 도움으로 이겨낼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는 목적지로 향하는 남은 여정에도 지금까지와 똑 같이 아니 그 보다 더 큰 은총과 권능으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그래서 신자란 세상 사람과 달리 환난 중에 즐거워하는 자다. 하나님이 이 어려운 일을 통해 또 어떻게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고야 말 것인가, 그래서 어떤 영광과 신비가 드러날 것인가 설레임으로 기다리며 기대해야 한다.
신자가 기도해 환난을 이겨내는 것은 신자가 되는 필요 조건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은 그것으로 부족하다. 어떤 면에선 다른 종교인들도 다 그렇게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과거,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다 이루셨다. 신자란 비록 지금은 너무 힘들고 어려워 어떻게 결말 되어질 줄 전혀 알 수 없지만 주님이 다 이루셨기에 종국에는 메마른 사막이 사랑의 옥토가 되고 거칠은 광야가 은혜의 바다가 되리라는 것은 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즐거워하며 소망을 더 키워 나간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찬이 되는 충분 조건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 외에 신자가 신자 된 증거란 없다. 당신은 지금 좁은 문을 열고 있는 단계인가? 그 문을 열긴 열되 좁은 길 위를 마지못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좁은 길 위를 주님의 손을 잡고 즐겁고도 신나게 달음질 하고 있는 중인가?
주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늘 저와 함께 동행해 주심에 더이상 그 무엇을 바랄까요? 그저 아버지 나라가 확장됨에 낮은곳에서 작은일에라도 쓰임받기만을 간절히 원하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