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4
등산로에 나타난 마운틴 라이온
지난 수요일 TV 뉴스에 따르면 LA 그리피스팍의 등산로 주위에 마운틴 라이온이 나타났다고 한다. 산림 경찰은 혹시라도 산(山)사자를 만나면 절대 놀라 도망가거나 비명을 질러선 안 된다고 경고했다. 대신에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올리고 크게 고함을 질러야 하는데 산사자가 느끼기에 자기보다 더 크고 강하게 보이도록 해 겁을 주라는 뜻이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자기 보다 크고 힘이 세어 보이면 겁을 먹는다. 싸울 때 경쟁적으로 깃털을 세우고 뿔을 흔들고 소리를 더 크게 낸다. 일종의 무력 시위인 셈인데 과장할수록 효과가 더 좋다. 그러나 그것도 같은 종류나 비슷한 크기의 동물끼리 싸울 때나 통한다. 아예 상대가 안 되는 관계는 아무리 과장해야 별 소용이 없다. 멸치가 고래를 이길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다. “너 나와 결혼할래?”라고 말해 고래가 놀라 기절(?)하도록 해야 한다.
최근 LA 인근 지역에 자주 나타난 말썽이 되는 또 다른 야생 동물은 코요테다. 주택가 근처까지 내려와 애완 동물, 가축, 어린 아이들에게 큰 위협이 된다. 그러나 농부들은 오히려 코요테를 좋아한다. 야채나 나무 밑 둥지를 갉아 먹는 들쥐, 두더지, 토끼 같은 것들을 잡아 먹기 때문이다.
토끼에게 코요테는 천적(天敵)이다. 미국 만화 영화 Road Runner에 토끼가 코요테를 매번 이기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그러나 코요테는 또 마운틴 라이온을 만나면 꼼짝 못 한다. 이들은 생물 시간에 배운 대로 먹이 사슬로 연결 되는 관계다. 피라미드 모양의 삼각형 맨 밑에 가장 하등 동물이 위치하고 위로 올라 갈수록 고등 동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정상에 인간이 위치해 있고 그 위에는 어떤 동물도 없다. 그럼 과연 지구상에서 인간의 천적은 없는 것일까?
명품에 기죽는 사람들
먹이 사슬의 정상에 인간이 마침표를 찍었기에 인간에게 천적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불신자다. 그들로선 세상의 주인은 당연히 인간이다. 우주에 로켓을 보내고 사람도 복제 하려는 판국에 인간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 오직 인간이 이 땅의 최고의 지성이자 만능의 연금술사다.
인간 위에 인간을 위협할만한 어떤 존재도 없으니 인간끼리 천적 관계가 되어버렸다. 지나간 인류 역사 전부는 더 많은 영토, 자원, 부를 차지하려는 싸움의 기록이다. 지금도 아무리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한다고 외쳐도 국익 추구를 교묘히 위장한 것에 불과하며 한국에서도 정파마다 개혁을 성취하겠다고 공약해도 자기 집단의 권력 유지 수단일 뿐이다.
거창하게 세계 평화와 국가적 개혁을 논할 필요도 없다. 개인적으로 따져도 모두가 그저 자기 잘 먹고 잘 사는 일에 목을 매단다. 이웃은 어떻게 되든 관심이 없다. 사실 이웃이야 그들 생각대로 어떻게 되든 문제가 아니다. 그러는 자기들의 영원한 운명이 어떻게 될 지에 관해서 전혀 감각이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스스로 운명을 책임지고 개척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 운명이 자기들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순전히 돈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데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고 큰 소리만 친다.
같은 종류의 동물끼리 싸우면 잔뜩 목에 힘주어 무력시위부터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끼리 싸우니 어떻게 하든 수입 외제 차, 크고 근사한 집, 값 비싼 명품, 최고급 호텔에서 식사로 거들먹거리려 든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더 고급차, 더 명품을 갖고 있으면 기부터 죽는다. 또 한국에선 어떤 싸움에서건 목소리 큰 자가 이긴다. 깃털을 세우고 뿔을 흔드는 것과 하나 다를 바 없다.
신자는 그들과 다르다. 큰 차, 큰 집이 중요하지 않고 무조건 악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인생의 참 가치를 결정하거나 삶의 승리와 패배를 가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런 가장(假裝)된 무력 시위로 인간 관계에 영향을 끼치려 들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영향 받지도 않는다.
토끼가 코요테를 이기려면?
먹이 사슬의 정상에 있는 인간에게도 사실은 인간 외의 천적이 따로 있다. 인간 위에 인간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존재가 있다는 말이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의 천적인가? 하나님이 인간이 적이 될 수는 없다. 특이하게도 인간에겐 세 가지 천적이 있다. 죄와 사탄과 사망이 그것이다. 아담이 범죄 한 이후로 모든 인간은 이 세 천적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죄의 노예로 사탄의 자식이었고 그 삯은 사망이었다.
천적이란 숙명적으로 지게 되어 있는 관계다. 자기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토끼가 코요테를 만나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죄를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 모든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그런데 토끼가 간혹 코요테에게 잡히지 않고 끝까지 도망갈 수도 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체력이나 스피드로 도저히 비교가 안 되니까 토끼에게 나름대로 코요테를 피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놓으셨다. 쫑긋한 귀로 천적이 접근하는 것을 미리 감지할 수 있게 했다. 또 따라오는 적을 쉽게 따돌릴 수 있도록 순간적인 방향 전환이 가능하게끔 다리 관절 모양을 설계 해 놓으셨다. 인간도 죄악을 다 이겨낼 수는 없지만 죄악과 시험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신자에게 기도와 말씀이라는 무기를 주셨다.
또 토끼가 도망가지 않고 코요테와 직접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도 있다. 다 같이 힘을 합해 싸우면 된다. 하이에나 한 마리로는 사자를 절대 못 이기지만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덤벼 들어 사자의 아킬레스 근육을 물어 뜯으면 쉽게 이긴다.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죄를 이겼다 못 이겼다 한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와 함께 합심하여 중보기도 하며 죄악을 무찔러야 한다. 믿음의 동료 끼리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권면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런데 토끼는 몰라서 힘을 합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알고도 안 되니 더 큰 일이다. 심지어 간혹 교회 전체가 죄악과 시험에 빠질 때도 있다.
죄뿐 아니라 사탄의 경우는 더 그렇다. 개인적으로나 단체로나 이기기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나아가 사망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조차 없다. 사람은 한 번 나면 죽는 것이 정해져 있고 누구라도 도망 갈 재간이 없다. 그럼 인간은 이 천적들에게 영원히 눌려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인간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내 버려 두시지 않았다.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는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8:1,2)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환난과 슬픔과 눌림과 더럽고 추한 죄악을 십자가에 다 짊어지고 올라 가셔서 못 박으셨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 아래 완전한 대속제물로 바쳐지셨고 부활 하심으로 인간을 묶고 있던 사탄과 사망의 멍에를 끊어 주셨다. 이제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나 성령으로 거듭나 그 분의 십자가 사랑 안에 내 전 인생을 바쳐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그것들이 결코 천적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10:17)고 하셨다. 그 권세가 예수의 제자로 살고 있는 오늘의 신자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
숨어 있는 천적들
인간은 절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며 먹이 사슬의 정상에 있어 천적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불신자들은 사탄의 미혹한 영에 휩싸여 예수님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이 땅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사탄이 꼼짝달싹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님이 사탄의 천적이 되었다는 것은 사탄 스스로 너무나 잘 안다.
불신자들은 거짓의 아비 사탄에 속아 죄악 중에 살다가 그 삯인 사망으로 마친다. 특별히 신자보다 더 추악한 죄를 짓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과 아무 관계를 맺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겐 영원토록 하나님과 분리되는 결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저들은 하나님만 모를 뿐 아니라 인간에게 천적도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 천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로 이루어진 가시적인 영역에선 인간만한 존재가 없고 가장 위대하므로 따로 영적인 존재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만은 이 물질계 내에서도 유일하게 영적 존재로 만들었다. 동물과는 그 차원이 다르게 창조 되었다. 사실 인간이 먹이 사슬의 정상에 위치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슬 밖에 있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는 신분과 권능을 가지고 있다. 먹이 사슬의 정상에 있어 천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역으로 말하자면 자신을 스스로 동물의 왕자라고 생각하는 수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사보다 조금 못한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지 겨우 사자보다 조금 나은 동물로 만들지 않았다. .
하나님은 인간이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 천적들 또한 영적 영역 안에 보이지 않은 상태로 두셨다. 따라서 영적 전투가 아니면 이 천적들을 이기지 못한다.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고 무시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격하여야 한다. 특별히 그 적들의 급소인 아킬레스건을 공격해야 한다. 바로 그것들의 천적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십자가의 권능을 확신하고 그 은혜에 내 인생을 완전히 의탁하여야 한다.
오늘 야외 예배로 모인 까닭이 단지 자연에서 쉬고 맛 있는 바비큐를 즐기고 즐거운 게임을 하고 교회의 단합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의 야유회 모임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이 자연 속에 우리 눈에 안 보이지만 정말 목숨을 건 죽고 죽이는 처참한 싸움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듯이 신자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영계에서도 격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오랜 만에 기분 좋게 야외에 나와 있어도 인간의 천적들이 신자인 우리마저 가만 놓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죄와 사탄과 사망이 그리피스 팍에 나타난 산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문 밖에 숨어 있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는 더 이상 염려 안 해도 된다. 주님의 보혈이 우리와 산사자를 막고 있는 문의 인방과 설주에 십자가 모양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죽음의 사자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구원 방주인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 오지 못하고 패스해 간다. 죄악과 사탄을 함께 이겨내어야 교회가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지 게임해서 즐겁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야외 예배 와서도 세상살이의 걱정거리들을 놓지 못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돈, 권력, 명예, 질병, 자존심, 좀더 실감나게 말하면 좋은 차 큰 집 명품 옷들은 절대 우리의 천적이 아니다. 비록 그것들로 인하여 불편하고 힘들어 할 수는 있겠지만 신자에겐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의 통로다.
세 천적들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는 인간에겐 절대 평강이 없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들에 풍족하고 불편이 없더라도 그 천적들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영혼 속에 원인 모를 눌림이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천적들의 천적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고는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에서 꿀맛 같은 바비큐 갈비를 먹더라도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몸이 야외에 와서 쉼을 얻더라도 영혼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만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오늘의 야외 예배만은 우리 천적들이 완전히 패망 되었음을 재확인하고 십자가 안에서 자연을 즐기시고 주님께만 의탁하는 삶을 살기로 다시 한 번 결단하는 기회가 되기 바란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1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