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02) 5/23/04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 좇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을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찌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
믿음으로 칭찬 받은 세 명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좋다고 특별히 칭찬을 받은 자가 세 명 있다. 누구누구인지 기억하는가? 수제자 베드로인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인가? 제자들은 믿음이 적은 자라고 야단만 맞았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엉뚱한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다.
예수님께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듯이 이스라엘의 어린 양들만 구원하지 마시고 우리 딸도 고쳐 달라고 간구한 수로보니게 여인(마15:21-28)과 자기 가진 수중의 돈 전부인 동전 두 개를 헌금한 한 가난한 과부가 칭찬을 받았고(막12:41-44) 본문의 로마인 백부장이 또 다른 한명이다. 이 세 명이 겪고 보여준 구체적인 상황은 각각 다르지만 그 믿음의 근본 핵심은 같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자. 여러분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을 자신이 있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 질문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일 것이다. 그럼 대답하기 쉬운 질문으로 바꿔보자. 어떤 사람을 두고 믿음이 좋다고 평가하는가? 목사, 전도사, 장로들인가? 물론 믿음이 좋은 자들이 그런 직분을 감당하지만 그렇다고 그분들이 다 믿음이 좋다는 보장은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사 제사장들은 주님께 단골로 야단 맞은 자들이다. 본문 12절에서도 나라의 본 자손들은 어두운데 쫓겨 나간다고 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은 선민 백성이라 당연히 구원 받는다고 자신했던 교만 때문에 천국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가르친 장본인들이다. 그래서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라는 꾸중을 들었다.
흔히들 성경을 많이 알고 기도를 뜨겁게 하고 교회 봉사를 성실히 하며 평소 때 선하게 사는 외형적 모습만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쉽게 판단한다. 본문의 백부장이 예수님께 칭찬 받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만 생각한다.
백부장(百夫長)은 말 그대로 부하 백 명을 둔 로마군 장교다. 요즘으로 치면 중대장, 대대장 정도 되는 영관급 고급장교다. 그런 자가 본인의 병도 아니고 노예나 다름 없는 하인의 병으로 예수님께 직접 나왔다. 그는 유일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커녕 인식도 없으며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다. 얼마든지 강압적으로 와서 병을 고쳐 보라고 명령을 할 수 있는 처지인데도 너무나 겸손하게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했다. 처방전을 달라든지 하인을 데리고 와 안수를 해 달라든지 하지도 않고 말씀만 하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대개 “우리의 믿음도 백부장을 닮아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야 하며 또 주님은 말씀으로만 어떤 병이든지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강조하는 것으로 그친다.
믿음의 정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믿음 자체는 아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행동은 그 다음이다. 회사 사장이 비서에게 자신의 개인 금고 열쇠를 맡기는 것은 비서가 절대 돈을 훔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열쇠를 주고 나서 믿어 볼까 하는 법은 없다. 그것은 시험이다.
믿음이란 우리의 말과 행동이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밖에 나타날 수 없도록 만드는 내적인 근거이자 완전히 고정화된 사고체계다. 동일한 여건인데도 행동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면 벌써 믿음에 따른 행동이 아니다. 또 외부의 영향을 받아 그 사고체계가 흔들리거나 변화되는 것도 믿음이 아니다.
본문의 5-8절까지는 믿음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지 정작 백부장이 가진 믿음의 본질은 9절에 나타난다. 우리말 번역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로는 8절과 9절 사이에 영어로 치면 Because같은 접속사가 있다. 9절처럼 믿고 있기 때문에 5-8절 대로 예수님께 이렇게 해 주십시오 한 것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가장 따져 보아야 할 대목은 9절이다. 도대체 백부장의 어떤 면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까?
9절을 흔히 하는 시쳇말로 쉽게 풀이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 졸병들도 내 말 한 마디에 미리 알아서 슬슬 깁니다. 예수님도 저에게 한 말씀만 해 주시면 나도 알아서 기겠습니다.” 극도로 낮아져 최고의 예의를 갖춘 모습이다. 아마 천성이 겸손한 자로 도덕적 인품이 훌륭했던 모양이다.
나아가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를 하지 않는다. 함께 식사도 나누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리 집에 오실 필요 없다고 말한 것이다. 사회 문화적 종교적 규율을 잘 알아 그대로 따랐다. 집에 오는 것을 감당조차 못하겠다고 까지 표현 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영적인 처지가 비참하며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하나님에 대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극존칭으로 부르며 알아서 슬슬 긴다. 기독교에서 요구하고 교회에서 시키는 신앙 훈련도 잘 따라 실천한다. 스스로 영적으로 비참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백부장에 비해 크게 손색이 날 것 없다. 그럼 우리도 믿음이 좋다고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인가? 우리가 자신들을 되 돌아 볼 때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는가?
부하가 상관에게 슬슬 기는 이유
군대에서 부하가 상관의 말 한 마디에 복종하는 이유는 부하가 천성이 온순하고 겸손하며 상관의 인격이 훌륭하여 신뢰 할만 해서가 아니다. 군대란 그런 인격적 관계로 작동되는 집단이 아니다. 부하가 상관의 명령에 슬슬 기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듣지 않으면 기합을 받거나 감옥에 가고 심하면 총살 형을 당하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본문 9절의 “나도 남의 수하에” 있다는 표현의 원어적 의미는 로마 황제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 황제는 말 한마디로 자기 통치력이 미치는 모든 식민지의 모든 사람의 모든 사건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 수억 금의 재산을 하루 아침에 뺏기도 하고 사람의 생명도 죽였다 살렸다 했다.
백부장의 말을 부하가 듣는 이유는 백부장의 인격이나 권세가 일차적인 원인이 아니라 그 뒤에 로마 황제의 권세가 있기 때문이었다. 로마 황제에서 시작되는 명령 체계는 군단장, 사단장, 여단장, 천부장을 거쳐 백부장에게 내려오고 또 백부장이 십부장을 통해 졸병 한 사람에게까지 내려 보낸다. 그 중간에 단 한 번이라도 황제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거역은 바로 죽음이요 그 사회 체제에서의 영원한 추방을 뜻한다. 황제가 로마 제국의 모든 체계, 먹고 마시고 입고 살고 죽는 것의 최종 책임을 졌다.
백부장의 믿음이 단지 그가 주님께 직접 찾아 올 정도로 겸손했다든지 안수해 달라고 하지 않고 말씀만으로 낫는다고 믿었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 세계의 눈에 보이는 영역의 절대적 주권자가 로마 황제인 것처럼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예수님을 중풍병이 소속된 영역을 조종하고 관리하는 황제로 인정했다는 것이 그가 가진 믿음의 핵심이다.
문둥병이나 중풍병은 지금이나 당시나 운동, 식이요법, 약물 처방으로 나을 수 없는 불치병이다. 그런 것들로 나을 수 있다면 그 병들은 인간의 능력이 통제하는 가시적 세계의 물질적 영역 안의 문제다. 반면에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며 로마 황제의 권세가 단 한 치의 힘도 발휘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백부장이 예수님의 말 한 마디로 나을 수 있다고 고백한 것이 주님을 “수리수리 마수리…”식의 신비한 마술사 정도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는 영역, 비물질 세계의 절대적 주권자라는 뜻이다. 중풍병은 째고 약 바르고 해서 나을 정도의 병이 아니다. 인간 육신의 전부를 근본적으로 치유해야만 한다. 생명 자체를 고치고 생명의 근원을 다스리지 않고는 고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백부장은 예수님을 인간에게 생명 자체를 주신 분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기도할 테니 돛을 올리시오
여전히 백부장의 믿음이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과 별로 특별한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혹시 드는가? 중국에 최초로 선교사로 간 허드슨 테일러라는 분이 있었다. 당시는 범선으로 여행하던 시절이라 몇 달씩 걸려 항해했다. 배가 남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 섬 사이 해협을 통과할 때에 선장이 급하게 테일러의 선실을 두드렸다. 사연인즉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바람이 전혀 불지 않아 배가 조류 따라 어떤 섬으로 밀려 가고 있는데 혹시 그 섬에 식인종이 살고 있지 않을까 걱정입니다”라는 것이었다.
테일러가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선장은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선교사인 줄 아는데 바람이 불어 배가 방향을 바로 잡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테일러는 그러겠다고 하면서 한 마디 덧붙이기를 “지금 바로 돛을 올리라”고 요청했다. 선장은 “아니 지금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데 어떻게 돛을 올립니까? 선원들이 선장이 갑자기 미쳤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바람이 불어야 돛을 올리지요?”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요구가 강력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약 45분이 지나 다시 선장이 테일러의 방문을 두드리고 열어 보니 아직도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선교사님 이제 기도 그만하셔도 됩니다. 방향을 제대로 잡을 만큼 충분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라고 선장이 말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3년이 가물어 청명한 하늘에서 사람 손바닥만한 구름을 일으키신 후 순식간에 천지가 잠길만한 폭풍우를 쏟아지게 할 수 있는 분이다.(왕상18:44) 테일러는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서 눈에 안 보이는 바람마저 완전히 주관하는 분임을 확신했었다.
또 다시 우리 가운데 고개를 갸웃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우리도 여름 수련회나 야외 예배 때 좋은 날씨 달라고 매번 기도하는데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의 근거가 되는 믿음은 테일러의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얼마나 오래 기도하느냐, 눈물 흘리며 뜨겁게 하느냐, 찬송과 방언으로 기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세기, 열성, 진지함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솔직히 따져 우리의 기도는 눈에 보이는 영역, 물질 세계 안에서 일반적으로 통용 되는 단순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거의 전부다. 심지어 그런 믿음을 하나님에게마저 적용시킨다. “나는 너가 공부를 잘해 대학 입시에 꼭 붙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할 때의 믿음이다. 이 경우는 믿음이 아니라 기대, 예상, 희망일 뿐이다. 우리도 야외 예배 때에 비가 안 오고 날씨가 좋도록 열심히 기도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비가 오지 않게 해 주시리라 기대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밑에다 “비가 오더라도 춥지 않게 해달라”는 요구를 한 자락 더 깔고 기도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춥더라도 바람이 불지 않게 해달라, 혹시 바람이 불더라도 지붕이 달린 피크닉 장소를 얻게 해 달라, 바람 불더라도 지붕이 막아 바비큐 굽는데 지장이 없게 해달라, 지붕 밑에 모여서도 재미 있는 게임을 할 수 있게 해달라, 나중에는 비오고 바람 불고 추워도 주일 학교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는 것까지 기도한다.
도대체 좋은 날씨 달라는 기도 밑에 지하실을 몇 층까지 파는지 모른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포함시킨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란다는 명목으로 자기가 생각하는 계획과 희망 사항을 한꺼번에 전부 동원한다. 한 쪽 머리로 기도하면서 다른 머리로는 온갖 궁리로 분주하다.
기대와 믿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대는 기대대로 안 될 것에 대해 미리 예비하지만 믿음에는 그런 절차가 개입되어선 안 된다. 사장이 비서가 돈을 훔쳐 가리라는 가능성을 단 1%라도 인정한다면 열쇠를 절대 맡길 리 없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 밑에다 다른 가능성을 깔 수는 없지 않는가?
비가 오도록 기도했으면 우산을 준비하라
물론 우리 중에도 하나님이 우주 만물의 주인으로 비바람을 주관하시며 말씀 한 마디로 모든 병을 낫게 해주심을 진정으로 믿고 기도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실제 테일러 선교사와 같은 경우를 겪었다고 가정했을 때에 기도는 할 수 있겠지만 기도하면서 바로 돛을 올리시요라고 자신 있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비가 오기를 기도만 하는 것과 기도해놓고 구름 한 점 없이 쨍쨍 햇볕이 비취는데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엘리야처럼 손바닥만한 구름만 보고도 비에 막히지 않도록 급히 궁으로 당장 돌아가라고 그것도 잔인하기로 소문난 왕에게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왕상18:44) 우리가 백부장의 경우였다면 그 당시에 정말 중풍병이 말씀 한 마디로 나을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주님 앞에 나와 그처럼 고백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지금 성경을 배우고 설교로 듣고 주위의 간증으로 기도하면 불치병도 낫더라는 것을 잘 안다. 백부장은 구약을 몰라 엘리야의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그런 그가 말씀만 하십시오 알아서 기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 슬슬 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기는 시늉만 했지 실제로 기지는 안 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안 것 뿐이지 믿지 않았고 또 기도의 응답을 기대한 것이지 실제로 믿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해는 하지 마시기 바란다. 비오기를 기도해 놓고 우산 들고 나가는 것이 도깨비 방망이식 믿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게 내 소원하는 것을 들고 나와 “금 나오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면서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 내 소원과 계획을 하나님에게 강요하거나 기도 했으면 그대로 응답되리라 무조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과 그 주권을 철두철미하게 확신하고 그것에 실제로 반응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인도와 보호를 체험으로 알아야 하고 그 체험한 것들이 쌓이고 싸여서 어떤 경우가 닥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그 분만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그 분에게 내 삶, 존재, 인생, 생명 전부를 완전히 바쳐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매일매일의 삶에서 아무리 큰일이든 적은 일이든 그렇게 살고 있어야 한다.
최소한도 이전에 건짐을 받아 합력해서 선으로 인도되었던 동일한 환난이 닥치면 흔들리지는 말아야 한다. 이전과 똑 같은 환난과 더 작은 고통이 매번 처음 만나는 환난이요 더 심한 고통이 되어선 믿음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예수님도 기도하면서 밑 자락을 깔았다.
그런데 믿음에 있어 꼭 알아야 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느부갓네살 왕의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도 하나님이 극렬한 풀무불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고 백 퍼센트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비오라고 기도하고 무조건 우산을 들고 나가지는 않았다. 분명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제목 밑에 한 자락 깔고 들어갔다. 심지어 예수님도 그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발 이 잔을 비켜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시라고 했다. 기도한 대로 뚝딱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야외 예배 때 좋은 날씨 달라고 기도하지만 한 쪽 마음으로는 비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다 같이 기도하며 밑 자락을 깔았지만 다니엘의 세 친구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면 그들은 극렬한 풀무 불에 기꺼이 목숨을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할 정도로 그 고통이 극심하다는 것을 알고도 묵묵히 십자가에 달리러 올라가셨다.
테일러 선교사도 바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바로 돛을 올리라고 했을 때에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무조건 그렇게 이뤄지리라 믿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45분간이나 기도한 것이 오래된 한국 유행가 가사의 “바람, 바람, 바람…” 하듯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한 몇 분간 바람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나머지 몇 십분은 틀림 없이 중국 선교사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기도했을 것이다. “주님 저를 중국으로 불러 놓고 이 곳에서 표류하게 하는 뜻이 과연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섬에 표류하게 되면 미개인들에게도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꼭 갖도록 도와 주십시오. 만약에 이 섬이 식인종만 살아 잡혀 죽임을 당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증거 하는 선교사답게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담대할 수 있도록 해 주셔서 죽더라도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는 뭔가 달라도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다음 선교사에게 전도의 길이 쉽게 열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가 땀 방울이 되어 흐르도록 기도하셨듯이 테일러 선교사도 단순히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순교할 준비를 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기대와 욕심으로 기도에 지하 통로를 파고 있지만 예수님과 테일러 선교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늘로 올라 갈 사다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기도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순종의 행동이었다.
교회 생활 십년 만에 생긴 요령
많은 신자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한다. 그러나 그 중 얼마나 많은 믿음이 단순히 그렇다는 객관적 사실이나 교회에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배운 일반적 진리만 붙들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믿음이란 확실히 믿어져야만 믿음이다. 세뇌 당해 믿는 것, 믿어 보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것, 남이 이야기 하니까 그러려니 하는 것, 교회 10년을 다녔으니 아무 생각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그 모두가 믿음이 아니다.
나아가 조금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이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도 사실은 좀 따져 볼 여지가 많다. 그 말의 뜻으로는 전혀 하자 없이 맞는 말이다. 만약 그 말이 기도 응답이 안 되는 것에 대비해 제 3의 방안을 간구하는 핑계로 쓰인다면 이것 또한 믿음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기도 응답 해주시지 않는 것에 대해 신자가 하나님에게 면죄부를 주어 용서해 주는 꼴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과연 있는가? 혹시라도 교회 생활 한 10년 하고 나니까 남들 앞에 믿음이 좋아 보이려 가장하는 요령이라면 더 큰일이지 않겠는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이 되지 않더라도 그 응답되지 않은 것에도 신자가 가진 전부를 걸 수 있어야 참 믿음이다.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극렬한 풀무불에 생명을 던져 넣는 믿음이 아니고는 믿음이 아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어떤 인도라도 우리 또한 살아 역사하는 행동으로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이 통제하는 영역과 그 체계 안에 우리의 전부를 갖고 뛰어 들어가 함께 울고 웃고 호흡하고 교제하며 동행해야 한다.
신자에게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나 본문의 백부장이나 교회 안에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의 하나님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세계 60억 명의 인구 중에 나를 제외한 다른 59억 구천 구백 구십만 구천 구백 구십 구명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든지 간에 천지가 개벽할 일이 생겨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
바로 나 자신의 믿음이 되지 않는 믿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하라는 뜻이 아니다. 주님의 은혜가 나의 은혜요, 주님의 권능이 나의 권능이요, 주님의 사랑이 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매일매일 매 순간의 삶이 사람과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통제를 받고 있느냐의 차이다. 비록 쓰러지고 또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묵묵히 매일 십자가를 달게 질 때만이 참 믿음이자 살아 있는 믿음이다.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고 중풍병은 절대 나을 수 없다. 대신에 자신의 전부를 걸어 반응하는 믿음은 자기 하인의 병마저 주님의 말 한마디로 나을 수 있게 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대답하기 곤란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자. 여러분의 믿음이 주님께 칭찬 받을 수 있겠는가? 신앙적 실력으로 판단하지 말라. 종교적 외형만으로 분석하지 말라. 아무리 힘들고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생겨도 내 생명을 주님께 완전히 바칠 수 있겠는가? 각오만 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아니면 아직도 단순히 기도하고 착하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시리라 기대만 하고 있는가?
받는 자가 신자인데... 너무도 자주 사람의 시선에 아파하고 상황에 휘청거리고..
아직도 엉망진창인 제 신앙을 들여다 봅니다. ㅠ.ㅠ